*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경기를 빛낸 인물, 성삼문

경기천년을 빛낸 인물을 만나다


천천천 경기천년 기자단은 2018년은 경기천년의 해를 맞아 천년을 이어온 경기도의 다양한 모습을 담고 미래의 꿈을 함께 공유하기 위해 경기도 내 거주자와 학생, 직장인들로 꾸려진 기자단입니다.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경기도는 긴 역사만큼이나 훌륭한 위인을 많이 배출하였습니다. 오늘은 경기도를 빛낸 위인 중 성삼문에 대해 소개해드리고 합니다. 우리는 성삼문을 사육신의 한 명인 정도만 알고 있을 뿐 그의 삶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합니다. 저 또한 이번을 계기로 그의 발자취를 함께 걸어보았는데요, 지금부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성삼문의 생애와 경기도에 남아있는 그의 흔적들에 대해 설명 드리겠습니다.


성삼문(1418 ~ 1456)은 무관 성승(成勝)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출생 시 그의 모친이 꿈에서 '낳았느냐?'라는 질문을 세 번 받았다고 해서 이름은 삼문(三問)이라고 지었습니다. 성삼문의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근보, 또는 눌옹이요. 호는 매죽헌입니다. 성삼문은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로 세종 때 《예기대문언두》를 편찬하고 한글 창제를 위해 음운 연구를 해 정확을 기한 끝에 훈민정음을 반포케 했습니다. 세조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단종의 복위를 협의했으나 김질의 밀고로 체포되어 친국(親鞫)을 받고 처형되었습니다.


           

성삼문 초상


성삼문이 한양에서 살았던 장원서(궁중 정원에 과일, 꽃등을 가꾸는 관청)는 현재 종로구 화동 23번지의 정독 도서관 부근으로 1442년(세종24)에는 삼각산 진관사에서 박팽년, 신숙주, 하위지등과 사가독서를 하였습니다. 삼문은 1449년(세종29) 장원급제하여 집현전 학사로 뽑혀 세종을 가까이 모시면서 신숙주와 함께 '예기대문엄독'을 편찬 했습니다. 훈민정음을 만들 때에도 정음청에서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등과 훈민정음 28자를 만든 주역으로 창제 과정에서 명나라의 학림학사 황찬과 13번이나 왕래하면서 음운을 질의하고 음운과 교장의 제도를 연구해1446년(세종28) 10월 9일 훈민정음을 발표하기에 이릅니다.


통일된 한자 표준음을 정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동국정운



세조와 성삼문의 죽음


삶과 죽음이 '하늘의 뜻'이라고 흔히들 논하건만 자신의 안위를 위해 천륜을 거스른 사람도 존재 했습니다. 세조는 어린 조카에게 찬탈한 재위를 14년간 붙들고 있었습니다. 세조는 지속적으로 성삼문을 회유하지만 끝내 변절 하지 않는 성삼문에게 거열형을 단행합니다. 거열은 사지를 찢어 죽이는 극형의 방법으로 남편살해, 반역죄를 범한 중죄인에게 내려진 형벌로 시신을 전국으로 돌리며 일벌백계의 본보기로 보이는 것인데 성삼문 본인은 물론 성삼문의 남자 동기간(동생 성삼빙, 성삼고, 성삼정)을 비롯하여 자식, 손자까지 죽이고 그 가손(여자)들은 비천한 관노로 입적하게 하였습니다. 삼문의 아들 맹첨, 맹년, 맹종, 그리고 갓난아기까지 4대가 죽임을 당해 손이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의 묘


성삼문의 할아버지 성달생은 성석용의 큰아들로 부인 풍양 조씨가 59세에 사망하자 파주 천현면 금곡리 산 37-4 파평산 남쪽 관모봉 아래 묘를 쓰고 재실과 마구간을 설치한 한편 산소 수호와 시묘살이를 위해 아들 성승이 내려와 거주하였는데 손자인 성삼문도 이곳에서 공부하도록 하고 하인과 시종을 두어 한양 청진동 집을 오르내리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삼문의 일족은 경기도 파주, 포천, 양주, 고양등지에서 뿌리내린 권세가의 씨족으로 성달생의 묘소 산 너머 산골짜기에는 성삼문이 공부하던 터가 있었는데 지금은 문수암이라는 암자가 자리하고 있다.


파주 법원리 곰시 개묵동 성달생의 묘


세종조의 육진개척 등에 많은 공을 세웠고 판중추원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던 할아버지 성달생 묘도 파헤쳐져 실전되어 수백 년을 내려오다가 300여 년이 지나서야 신원이 되어 비석과 석물들을 찾아내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국청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선운사의 말사(末寺)이다. 1624년(인조 2) 벽암(碧巖) 각성(覺性)이 창건하였습니다. 각성은 당시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총절제중군주장(總節制中軍主將)에 임명되었는데, 팔도의 승병을 동원하여 남한산성을 쌓으면서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비밀리에 무기와 화약·군량미 등을 비축해 두기 위해 국청사와 천주사·개원사·남단사·한흥사·장경사·동림사 등 7개 사찰을 세웠습니다. 당시 남한산성 내에는 이들 7개 사찰 외에 신라 때 지은 망월사와 옥정사도 있었습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요사채가 있으며, 유물로는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친필이 적힌 병풍 1점과 송시열(宋時烈: 1607∼1689)의 친필로 된 책자 3권이 전하고 있습니다.


국청사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글, 그리고 세종대왕과 함께 훈민정음 창제에 힘쓴 성삼문입니다. 또한 한번 옳다고 여긴 신념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키려고 했던 산봉우리의 낙락장송(落落長松) 성삼문은 본받아 마땅하네요. 그의 곧고 맑은 지조야말로 경기천년을 빛낸 인물로 성삼문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경기천년에서 경기도의 조선의 정신을 보여주는 거울이 될 것 같습니다. 이상 경기천년 기자단이었습니다.



세부정보

  • 자료출저/ 네이버 지식백과, https://blog.naver.com/june6012/50186653461, http://blog.daum.net/salamstory/15862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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