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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약용 열수에 돌아오다’ 기획연재 (2) 정약용 부자와 이학규

2018-04-16 ~ 2018-07-15 / 사내아이의 엉뚱한 요청이 만든 귀한 유물

정약용 부자와 이학규

사내아이의 엉뚱한 요청이 만든 귀한 유물


이학규(李學逵, 1770~1835)는 정약용의 벗으로 성호 이익의 종손인 이가환李家煥이 그의 외삼촌이다. 유복자로 태어난 이학규는 외조부인 이용휴李用休와 외숙인 이가환의 훈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그는 26세 되던 해인 1795년에 <규장전운奎章全韻> 편찬에 동참할 정도로 정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성호가문의 실학적 분위기에서 자랐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정약용과 함께 사학교도로 몰려 유배되었다가 55세인 1824년에 해배되었다. 당시 이학규가 천주교를 신봉한 혐의는 없다고 하였지만, 곧 전라도 능주(綾州; 전남 화순군)로 유배되었다. 이후 신유사옥이 일단 마무리되기는 했으나 황사영 백서 사건이 일어나 능주에서 김해로 귀양지가 변경되었다. 유배 기간 동안 두 자식, 아내, 노모가 죽었으나 장례에 참석하지도 못하였다.

이학규는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도 김해지방을 내왕하며 이곳의 문사들 및 중인층과도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결과 김해 지역의 문화의식과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 일정한 기여를 했다. 만년에는 주로 신위申緯 및 정약용과 시와 글을 주고받으며 마음을 달랬다고 전한다. 그러다 가세가 더욱 곤궁해져 충주지방으로 이주해 여생을 마쳤다.


“전씨全氏 성을 가진 사내아이가 배를 빌려 타고 두물머리에 와서는 이곳에 거처하던 정약용 부자에게 뜬금없이 부채를 건네며 정학유의 나비 그림과 이학규의 한시, 정약용의 해서 글씨를 요구했다. 일면식도 없는 녀석이었으나, 그 정성이 기특했는지 정학유가 먼저 그림을 그리고 이학규가 시를 짓자 정약용이 정성껏 글씨를 써주었다.”


한 소년의 엉뚱한 요청으로 세 문인의 탁월한 기예가 부채라는 작은 공간에서 조화롭게 완성되는 순간이다. 이 일화는 이학규의  <낙하생집洛下生集>, <백문창화집(白門倡和集)>에 소개되어 있다.


낙하생집(洛下生集) 내용과 표지 그림, 이학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낙하생집>은 조선후기 문인 이학규(李學逵, 1770~1835)의 시문집이다




상심낙사첩(賞心樂事帖), 정약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

정약용의 친필시첩인 <상심낙사첩> 중 나비 그림 나비를 잘 그렸던 정약용의 아들 정학유의 그림이다




세부정보

  • 실학박물관/ 특별기획전 리뷰

    / 정성희 수석학예연구사(실학박물관 학예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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