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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 ②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
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
정해득 | 한신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강화 고려 왕릉 조사성과
Ⅲ. 조사연구 과제
Ⅳ. 맺음말
Ⅱ. 강화 고려 왕릉 조사성과
고려 왕릉에 대한 조사는 일제강점기부터 시작되었다.1* 일제강점기에는 왕릉에 부장(附葬)된 청자를 비롯한 부장품을 목적으로 한 도굴이 성행하였고, 그 과정에서 고려 왕릉의 훼손이 뒤따랐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주도로 고려 왕릉에 대한 정비를 위해 고고학적 조사를 시행하였고, 그 조사를 바탕으로 연구 성과를 발표하였다.
강화도의 고려 왕릉에 대해서는 국립문화재연구소가 2001년에 석릉을 발굴 조사하여 2003년 보고서를 펴낸 바 있고, 2004년 가릉과 곤릉 발굴, 2006년 가릉 뒤편의 ‘능내리 석실분’을 발굴조사한 후 2007년 이에 대한 조사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정비·복원을 위해 실시한 고고학적 조사를 실시하여 여러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는데, 이 보고서들을 토대로 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 성과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석릉(碩陵)
1237년(고종 24) 8월 10일 희종(熙宗)이 훙서(薨逝)하여 10월 19일(정유) 석릉(碩陵)에 장사지냈는데 석릉 조성에 70일 정도가 소요되었다. 석릉은 일제강점기에도 한차례 정비된 적이 있고, 1974년에도 복원·정비가 있었다. 석릉은 현재 5단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제1단에는 봉분과 담장, 석인상 1기가 서편 담장 앞부분에 접하여 있다. 제2단에는 중앙에 “高麗熙宗碩陵”이라 각자한 비석, 동쪽에 석인상 1기, 문화재 표석이 각각 1기씩 있고, 제3단 ∼ 5단에는 아무런 구조물도 확인되지 않지만 전(塼)과 와(瓦)편들이 다량 수습되었다고 한다.2*
그러나 관리자 한관수(당시 77세)가 1974년 정비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담장이 없었고, 능역의 단은 3단 정도의 흔적이 육안으로 관찰되었다고 구술한 것을 통해 보면 1974년 정비과정에서 원형을 크게 상실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01년 발굴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은 봉분의 규모가 지름 2.6 ∼ 2.7m에 불과하지만 봉분에서 8각형의 구조물이 확인되었고, 완전 파괴된 상태에서도 난간석에 사용되는 원주석(圓柱石)과 죽석(竹石)을 확인하였다. 또한 3단 탐색갱 조사 시에 초석과 잔탁, 다량의 기와편이 출토되어 정자각이 있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확인되었다.3*
석실 자체는 길이 3.3m, 너비 2.2m, 높이 2.3m이고 1매의 판석으로 입구를 막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석릉 석실의 규모는 개성의 왕릉에 비해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봉토(封土)의 규모를 줄였을 뿐 전체 왕릉의 규모를 대폭 축소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석실내부에서 벽화흔적이 아무것도 확인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앞으로 종합적인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석릉 석실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 가운데 청자는 비색 청자의 전통이 13세기 전반까지 계승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점과 절대연대를 갖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2. 곤릉(坤陵)
1239년(고종 26) 5월 강종(康宗) 왕비로서 고종 즉위 이후 왕태후(王太后)가 된 유씨(柳氏)가 서거하였다. 1242년(고종 29) 4월에 고종이 곤릉(坤陵)을 배알하였기 때문에 왕후릉 격식에 따라 조성되었을 것이다.
곤릉 역시 1970년대에 정확한 고증 없이 정비된 적이 있다. 원래 3개 구획으로 보이는데, 2004년 조사단은 봉분 남쪽의 경사면을 하나의 공간으로 인정하여 4단 구획으로 보았다. 제1단은 봉분이 있고 남쪽의 경사면 끝에 경계석을 놓아 공간을 분할하였고, 제2단은 조선시대에 건립한 ‘고려원덕태후곤릉’ 표석이 있을 뿐 아무런 석물이 없으며, 제3단에는 건물지가 있었던 것이 확인되었다.4*
발굴조사 결과 석실 내부의 규모는 3.1m, 너비 2.5m, 높이 2.2m로 부정형 할석을 면 맞춤하여 8단 이상의 허튼층쌓기로 조성한 뒤 회칠로 마감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석실 입구는 대형석재 1매로 막았으며, 석실 바닥에 전석(磚石)을 깔았다. 석실 내부는 도굴된 상태로 동전과 철정, 금속장식품이 수습되었고, 석실 문비석 앞 묘도부에서 청자사자삼족향로 등 8점의 최상품 청자가 수습되었다.
석실 상면에 12각 구조물이 확인되었고, 그 안에 할석을 가득채운 후 봉토를 쌓았다. 제3단 건물지는 전체적으로 정자각의 형태를 보이고 있는데, 경사지를 보강하기 위한 보조 기단이 덧붙여져 있다. 건물지 중앙의 계단지 부근에서 석인상 머리 및 건물에 쓰였던 귀목문 막새, 잡상 등의 기와류가 집중 출토되었다. 조사과정에서 총 17개의 난간석 부재와 하대석 2기, 석인상 머리 3기, 석수 1기 등을 수습하였다.5*
이러한 조사결과를 보면 곤릉 역시 봉분의 규모를 줄였을 뿐 개성의 고려 왕릉과 비교하여 큰 차이없이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봉분 주위에 배설한 석수와 2단에 있었던 석인이 파괴되어 매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 가릉(嘉陵)
1244년(고종 31) 2월 6일 태자비(太子妃)가 서거하여 예장하였는데, 태자였던 원종이 왕위에 오른 뒤 1262년(원종 3)에 정순왕후(靜順王后)로 추숭하고, 무덤을 가릉이라 추봉(追封)하였다.
가릉은 3단으로 공간 구획되어 있는데, 제1단에 봉분이 있고, 봉분의 북편을 제외한 동·서·남편에 장대석을 1단으로 돌려 봉분을 감싸고 있는 형태로 조성하였고, 제2단은 문인석이 서 있으며, 제3단은 경계석이 없어 확실하지 않다.6* 석실은 길이 2.55m, 너비 1.68m, 높이 1.78m 규모로 만들고 입구를 대형석재 1매로 막았으며, 주변에 할석을 쌓았다. 석실상면에 8각 구조물을 설치하여 봉토를 쌓아 봉분을 조성한 형태로 보인다. 석실과 그 주변에서 청자, 도기, 기와, 철제품, 청동사, 동전, 은제 장식품과 옥제품, 호박구슬 등이 출토되었는데, 은과 옥제품의 제작수준이 높다. 봉분의 북동과 북서에 석수가 1기씩 있는데, 북서편 모서리에서 111㎝의 남북방향이 긴 타원형의 돌출된 적심석군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자리에서 옮겨진 것으로 조사단이 판단하였다.6* 조사단은 2기의 석인을 문인석과 무인석으로 판단하였으나 필자가 현장에서 확인한 결과 모두 문인석이었다.7*
4. 능내리 석실분
능내리 석실분의 피장자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으나 왕릉급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능내리 석실분은 3단으로 구획되어 있는데 1단 조사결과 석실과 석실상부구조물과 난간석, 난간엄지기둥[童子柱], 석수 2기, 곡장 등이 확인되었다. 석실은 잘 치석한 장대석을 5단으로 쌓아 길이 2.6m, 너비 1.96m, 높이 2.03m의 내부공간을 조성하고 1매의 화강암 판재로 폐쇄하였는데 다른 가릉과 비슷하여 왕후의 무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석수 2기는 난간석 바깥으로 북서·북동 모서리에 각기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을 제외한 ‘冂 ’자 모양으로 쌓은 담장을 설치하여 보호하였다. 석수 옆에서 옥개석으로 보이는 석재 1매가 엎어진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담장의 지붕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 있다. 이미 도굴을 당한 석실 내부에서 부장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으나 동전, 관대 장식품, 철정 등이 수습되었다.
대부분의 고려 왕릉은 제2단에 석인이 있는데, 능내리 석실분에서는 확인되지 않아 도난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제3단 장대석 축대 남쪽으로 ‘凵’자형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곤릉과 같이 경사진 지형을 보호하기 위해 보조기단을 쌓았다.8*
5. 홍릉
1259년(고종 46) 6월 30일 고종은 유경(柳璥)의 집에서 훙서(薨逝)하였다. 강화시기에 서거한 고려의 왕은 고종이 유일한데, 산릉(山陵) 제도는 검약에 힘쓰고, 하루를 한 달로 계산하여 상복을 입고[易月之服], 3일이 지나면 상복을 벗으라는 유명을 내렸다. 고종의 홍릉 능역(陵域)은 3단으로 되어 있다. 급경사지에 3단의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는데, 제1단에 봉분을 조성하였고 경사지 밑에 마련한 제2단에 문인석 2쌍이 있고, 제3단은 현재 빈 공간이지만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9* 상단의 봉분이 높이 5척, 지름 14척으로 규모가 작고, 봉분 4방에 석수(石獸) 1구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중단에는 문인석(文人石) 2쌍이 마주하고 있으며, 하단에는 제향시설이 있었던 공간이 남아 있다. 홍릉은 아직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 구조에 대해서는 확인이 필요한 상태이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고려 왕릉의 석실 내부 규모로 보면 석릉과 곤릉이 비슷하고, 가릉과 능내리 석실분이 그보다 작으면서 비슷한 규모를 보이고 있다. 석릉과 곤릉이 미가공 할석으로 축조한 후 회로 마감한데 비해, 가릉과 능내리 석실분은 가공한 장대석을 사용하였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그런데 개석 상부의 시설물의 경우 석릉과 가릉이 8각인데 비해 곤릉과 능내리 석실분은 12각으로 되어 있어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이에 대한 면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현재까지는 피장자가 사망할 당시의 상황과 신분적 차이가 반영된 결과라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즉, 희종은 최충헌에게 폐위되어 교동도로 유배되었다가 1237년 강화도에서 죽었고, 원종의 왕비 순경태후는 1236년 사망 당시 태자비의 신분이었다가 뒤에 태후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엄밀하게 보면, 왕릉으로 조성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왕릉과 차이를 두었다는 것이다.10* 그런데 이는 개석 상부시설물에 국한하였을 때에 그런 것이고 이를 석실의 규모나 건물지의 유무를 고려할 때도 그렇게 설명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처럼 강화도에 조성된 고려 왕릉은 개성의 왕릉제도를 충실히 따르면서도 봉분의 규모를 상당히 줄였고, 병풍석에 12지신상을 장식하지도 않았다. 강화도의 왕릉이 지나치게 검소하게 조성된 것은 개경 환도(還都) 이후에 천장(遷葬)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송(南宋)에서도 환도를 염두에 두고 황릉을 검소하게 마련하였던 전례가 있기 때문에 대몽항쟁이 끝난 후 천장을 고려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1. 고려 왕릉에 상설된 석물을 조사하거나 언급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今西龍, 1917,「高麗諸陵墓調査報告書」 『大正五年度古蹟調査報告』, 조선총독부, 261∼291쪽.
關野貞, 1932, 『朝鮮美術史』, 東洋文化史(2003년 심우성 역, 동문선).
고유섭, 1946 『송도의 고적』(2007년, 열화당 재간행본).
김원룡, 1973 『한국미술사』범우사, 249∼251쪽.
왕성수, 1990,「개성일대 고려 왕릉에 대하여」 『조선고고연구』32∼33쪽.
리창언, 2002, 『고려 유적연구』사회과학출판사(2003년 백산자료원 재간행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江華碩陵』발굴조사보고서.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江華 高麗王陵-嘉陵․坤陵․陵內里石室墳-』발굴조사보고서.
김인철, 『조선고고학전서47 고려의 무덤』(2009, 진인진 편, 진인진).
2.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江華碩陵』38쪽.
3. 국립문화재연구소, 2003 『江華碩陵』135∼138쪽.
4. 위 보고서, 141쪽.
5. 위 보고서, 141∼155쪽.
6. 국립문화재연구소, 2007 『江華高麗王陵 -嘉陵․坤陵․能內里石室墳-』59쪽. 조사단은 제1단에 설치된 봉분보호시설을 계체석으로 보아
3단으로 구분하였다.
7. 위 보고서, 62∼63쪽. 정비․복원이 끝난 뒤 현장방문 결과 석수는 북서, 북동 모서리로 옮겨 자리 잡았다. 눈․코․입만 표현한 이 석수를 조사단은
호랑이로 판단하였으나 근거가 명확하지는 않다.
8. 위 보고서, 69쪽. 조사단은 동편 석인이 허리에 있는 자연적인 결석을 칼로 보고 무인석으로 오판하였다. 문인석 하단에 시멘트 기초가 되어있
어서 1970년대에 한차례 정비가 있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9. 위 보고서, 343∼358쪽. 10. 2009년 필자가 현장을 직접 답사하여 조사하였다.
‘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 다음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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