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연구원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③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신은제 | 동아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성종 14년 赤·畿縣의 설치

  Ⅲ. 현종 9년 京畿의 설치

  Ⅳ. 문종대 경기제의 변화

  Ⅴ. 맺음말


Ⅲ. 현종 9년 경기의 설치


성종 14년 설치된 적·기현은 현종대에 와서 京-畿로 개편된다. 현종 9년 개성부가 혁파되고 대신 開城縣과 長湍縣에 현령을 두었으며 개성현은 정주, 德水縣, 江陰縣을 관할하고, 장단현은 松林峴, 臨津縣, 兔山縣, 臨江縣, 積城縣, 坡平縣, 麻田縣을 각각 관할했다. 현종 9년 경기제의 개편이 가진 가장 주요한 특징은 京內가 적·기현으로부터 분리되어 5부 방리를 중심으로 새롭게 정비되고 경을 둘러싼 12개 현을 경기로 삼았다는 점이다. 지방관이 파견된 주현이었던 개성현과 장단현은, 다른 지역의 주현들이 경·목·도호와 같은 계수관에 예속된 것에 반해, 직접 상서도성에 예속되었다.


현종 9년 경기제의 개편은 각도의 安撫使를 폐지하고 4都護·8牧·56知州郡事·28鎭將·20縣令을 둔 조치1*와 더불어 시행된 것으로 이해된다.2* 현종 9년 지방제도 개혁은 기본적으로 ‘주현-속현’ 운영체계를 확립한 것3*으로 계수관제의 확립, 丁數에 따라 읍격을 편제하는 방식을 확대한 것이기도 하다.


현종대 지방제의 정비는 성종 14년 이후 시도된 지방지배인 주-현제를 통해 지방세력에 대한 효과적인 통제에 실패한 것에 대한 반응으로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으로 수립되었으며, 이는 목종대 이후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한 지속적 노력의 결과로 간주되어 왔다. 또 절도사에 의한 군사적 기능은 약화되고 민정 중심의 운영 체계를 구현한 것으로 이해된다.4*


현종 9년 경기의 행정체계(정학수, 앞의 논문, 147쪽 표4-3 재인용)


현종 9년 지방제 개혁의 의미를 이상과 같이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경기지역은 왕이 거주하는 특별한 지역이라 지방 세력에 대한 통제 등과 무관할 뿐 아니라, 수취방식 등 여러 면에서 지방과 상이함에도 불구하고, 성종대 적·기현제를 혁파하고 京內와 인근의 고을을 구분한 이유가 설명되어야 한다.


현종대 경기제로의 개편 배경에 대해 도성 안과 밖을 분리하여 지배를 강화하는 방향을 취했을 것이라 해석5*하기도 하나, 개성부의 폐지가 지배의 강화와 연결시킬 수 있을지, 나아가 지방제의 재편과 왕경 주변지역의 재편을 같은 방향에서 논할 수 있을지는 또 다른 논증이 필요해 보인다.


현종 9년 경기제의 개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현종대 거란과의 관계와 성곽의 축조이다. 강조의 변란과 더불어 목종이 폐위되고 왕위에 오른 이가 현종이다. 현종의 즉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 이는 거란이었다. 성종 12년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기로 하였음에도 고려는 거란의 침략을 대비해 북방에 성을 수축하는 등 적극적으로 거란에 대응해 왔다. 목종대에도 성곽의 수축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고려사』 병지에는 목종대 비교적 활발한 북방지역 축성기록이 확인된다. 성곽의 축성이 북부 지방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현종은 즉위 후 羅城의 축조를 결정했다.6*


이러한 상황에서 거란은 목종의 폐위와 현종의 즉위를 빌미로 침공해 왔다. 거란의 2차 침입이 시작된 것이다. 거란주가 직접 보병과 기명 40만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흥화진을 포위하여 고려군과 접전하였고 通州(지금의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강조를 사로잡은 뒤 곽산을 함락시키고 청천강을 건너 서경을 함락했다. 서경이 함락되자 왕은 개경을 버리고 남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7* 이듬해 거란주는 개경으로 난입해 태묘과 궁궐을 불태우자 왕은 나주까지 피난가야 했다. 왕의 피난과 무관하게 개경을 불태운 거란군은 곧장 말머리를 돌려 퇴각했고 한 달이 되지 않아 압록강을 건너 퇴각했다. 이에 왕은 다시 어가를 개경으로 돌렸고 한 달여 만에 개경으로 환도했다.8* 환도한 뒤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을 황성인 송악성을 증축하였다.9* 거란의 함락으로 피해를 입은 개경에 대한 정비는 현종 5년 社稷壇의 수리10*에서 확인되듯이, 이후에도 상당기간 지속되었을 것이다.


한편 거란과의 긴장은 계속 유지되었는데 거란이 압록강에 교량을 가설하고 다리 좌우로 성을 쌓았으며 흥화진을 포위하고 통주를 공격해 왔다. 북방의 변방은 거란의 침략으로 1년 가까지 이어지자, 현종은 郭元을 송나라로 보내 구원을 요청하기까지 했다.11* 그러나 송나라는 거란과 화목하게 지내라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보내었고 고려는 거란과 거듭되는 전란에 직면해 있었다. 거란은 현종 6년 1차례의 대규모 침략이후 현종 9년 12월에 蕭遜寧이 10만을 거느리고 침략해 왔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현종 9년 경기제의 개편은 거란의 압박이 강력해 지던 시점에 이루어진 조치이다.


거란과의 군사적 대결이 임박해 있던 현종 9년, 경기제의 개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현상은 나성의 축조이다. 나성은 현종 즉위년 수축이 계획되었으나 거란의 침략으로 한동안 유보되었다가 다시 축조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나성은 낙성까지 21년 소요되었다는 현종 20년 8월의 기사를 고려하면12* 현종 즉위년 계획과 더불어 수축이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3* 『고려사절요』에 의하면 나성은 姜邯贊의 건의로 축조가 시작되었고 王可道가 축성의 책임자였다.14* 나성의 축조는 경도에 성곽이 없는 것을 우려한 강감찬의 건의로 시작되었지만, 나성을 축조하게 된 배경은 거란의 압박이 적지 않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성곽의 축조는 단순한 방어시설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리장성에서 확인되듯이 성곽의 축조는 공간의 구획을 결정한다. 즉 나성이 축조되면 이제 나성의 안과 밖은 명확하게 공간적으로 구획될 수밖에 없다. 즉 나성의 안은 皇都의 영역 즉 京內가 되고 나성의 외부는 畿가 되는 것이다. 비록 나성이 현종 20년에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현종 즉위년 나성의 축조가 계획되었다면 나성을 경계로 한 구획은 현종 즉위년 이미 기획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京內 즉 나성 내부의 행정구획인 5부 방리 역시 나성이 완공되기 5년 전인 현종 15년에 정비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러한 사고는 단지 가능성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나성이 환공되기 전 이미 나성 내부의 공간이 구획되었다면, 나성이 계획되고 수축되고 있을 때 현종은 이미 경과 기를 구분할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현종 9년 경기제의 성립은 거란의 압박에 따른 나성의 축조와 그로 인한 행정구역 개편의 필요성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비록 나성이 현종 20년에 완공되었다고 하더라도 계획이 현종 즉위년에 수립되었다면 성곽의 축조는 현종 9년 이전부터 시작되었을 것이고 그 성곽의 경계를 기준으로 경과 기를 구분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현종 9년 성종의 황성에 근거하지 않은 적·기현제가 성곽에 근거한 경기제로 전환하게 된 주요한 요인으로 판단된다.



1. 『고려사절요』권3 현종 9년 2월.

2. 변태섭, 앞의 책, 245~246쪽; 정학수, 앞의 논문, 141쪽.

3. 윤경진, 『고려 군현제의 구조와 운영』,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159~179쪽.

4. 구산우, 『고려전기 향촌지배체제연구』, 혜안, 2003, 165~181쪽.

5. 정학수, 앞의 논문, 142쪽.

6. 『고려사』권4 현종 세가 현종즉위년 3월.

7. 『고려사』권4 현종 세가 현종 원년 11월조의 기사를 참조.

8. 『고려사』권4 현종 세가 현종 2년 정월, 2월조의 기사를 참조.

9. 『고려사』권4 현종 세가 현종 2년 8월 기사일.

10. 『고려사』권4 현종 세가 현종 5년 7월 경인일.

11. 『고려사』권4, 현종 세가 현종 6년 11월 갑술일.

12. 『고려사』권4, 현종 세가 현종 20년 8월 갑인일.

13.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나성은 현종이 처음 즉위하여 정부 304,400명을 동원하여 축조하였다고 한다.(『고려사』권56 지10

    지리 왕경개성부 현종 20년, “二十年, 京都羅城成【王初卽位, 徵丁夫三十萬四千四百人, 築之, 至是功畢. 城周二萬九千七百步--하

    략”)

14. 『고려사절요』권3 현종 20년 8월 “先是, 平章事姜邯贊以京都無城郭, 請築之, 可道初定城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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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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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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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