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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④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신은제 | 동아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성종 14년 赤·畿縣의 설치

  Ⅲ. 현종 9년 京畿의 설치

  Ⅳ. 문종대 경기제의 변화

  Ⅴ. 맺음말



Ⅳ. 문종대 경기제의 변화


고려의 경기제는 문종대 한차례 더 큰 변화를 갖게 된다. 문종 16년 知開城府事를 복구하고 상서도성에서 관할하던 11개현을 개성부에 소속시켰으며 서해도 平州 임내에 있던 牛峯郡도 개성부에 예속시켰다.1* 문종 16년 개성부의 재설치는 일견 성종 14년으로의 회귀로 보이기도 하지만, 대다수 연구자가 인정하듯이, 경과 기를 구분한 현종 9년의 경기제를 보완한 것으로 이해된다. 다만 주목되는 점은 우봉군을 개성부에 소속시킴으로서 개성부의 관할 지역을 다소 확장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우봉군의 경기지역으로의 편입은 곧이어 벌어질 경기 확대 이른바 ‘대경기’의 서막이었다.


문종 16년 경기제(정학수, 앞의 논문, 153, 표4-5를 재인용)

『고려사』 지리지에 의하면 문종 23년 楊廣道, 交州道, 西海島의 41개 주현이 경기로 편입되었다. 양광도의 경우 漢陽 沙川 交河 高峯 豐壤 深岳 幸州 海州 見州 抱州 峯城 金浦 陽川 富平 童城 石泉 荒調 黃魚 富原 果州 仁州 安山 衿州 南陽 守安이, 交州道의 경우 永興 兎山 安峽 僧嶺 朔嶺 鐵原이, 서해도의 경우 延安 白州 平州 俠州 新恩 牛峯 通津 安州 鳳州 瑞興이 각각 경기도에 예속되었다.2* 이 기록의 수용여부는 논자들에 따라 이견이 있다.


이 기록이 공양왕 2년조의 세주에 나와 있다는 점, 41개의 주현명이 문종 당시의 원래 이름이 아니라 고려 말 공양왕대의 그것으로 표기되었다는 점, 경기에 편입된 주현이 그 이후에도 본래의 소속으로 표기되어 있는 점(예컨대 鳳州는 문종 30년에도 ‘黃州牧管內 鳳州’로 표기), 원래 경기 13현 가운데 하나인 토산현, 우봉현을 포함시킨 점 등을 들며 문종대 경기의 확대 즉 ‘대경기제’의 시행을 부정하는 견해3*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문종대 전시과 개정에서 확인되지 시지 지급지에 대한 규정이 ‘대경기제’의 영역과 일치한다는 점, 고려 말 전제개혁 상소에서 문종대 ‘대경기제’ 실시가 언급된 점, 송나라의 제도를 수용하면서 송의 ‘대경기제’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 등을 들어 문종대 경기도가 54현으로 확대되었다고 보기도 한다.4*


여기에 재반론이 나왔다. 대경기를 통제하는 기구가 존재하지 않는 점, 확대된 시지지급 지역이 대경기 지역과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점, 전시과 체제에서 토지분급지는 경기에 한정되지 않았던 점, 고려에는 개성부가 다시 설치된 이후 당과 송에서 실시한 경기채방사나 전운사가 존재하지 않았던 점 등을 지적하며 대경기제의 실시를 부정하였다.5*


이러한 견해를 수용하며 보다 세심하게 대경기제를 부정한 연구도 있었다. 柴地는 공한지라 간주할 수 없으므로 시지를 공한지로 간주한 견해를 수용하여 경기개발 문제와 경기제 확대를 연결시킬 수 없음을 강조하면서, 문종 23년 경기제 확대기사를 고려 말 사전혁파론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 낸 것으로 문종 23년(1069)의 기사는 공민왕 18년(1369)의 度田 즉 양전 기사였음을 주장한 것이다.6*


그러나 재반론도 결함이 있다. 우선 문종 23년조의 기사가 조선건국세력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변경된 것 인지부터 따져 볼 필요가 있다. 확실히 창왕 원년 이후 전제개혁에서 핵심적 논점은 경기 과전의 문제였다. 趙浚은 창원 원년 2차 상소에서 경기에 과전을 설치할 것을 주장했고 李穡을 필두로 文益漸 등은 조준에 맞서고 있었다. 공양왕이 즉위한 뒤, 역시 이색과 조준은 경기 과전의 문제로 대립하고 있었다.7* 공양왕 즉위년(1389) 이른바 조준의 3차 상소는 경기 과전의 원칙을 확정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므로 문종 때의 사례를 언급하며 논지를 강화하려 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의도가 문종 때 경기가 확장되었다는 점을 부인하는 근거가 되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고려사』지리지에서 문종 23년 경기 확장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물론 대경기제 부정론에서도 보자면 이 기사는 조선건국세력의 입장에서 사전개혁을 강화하기 위해 공민왕 18년의 기록을 변경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가 설득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고려사』찬자 혹은 지리지의 찬자가 조선건국 세력의 입장에서 전제개혁론을 옹호하였음을 논증해야 한다.


주지하듯이 『고려사』는 수차례의 교정과정을 거쳐 조선 문종 원년에 와서야 출간될 수 있었다. 출간과정에서 자신의 조상을 미화하려 한 권제와 체제의 개편을 위해 수차례 간행이 연기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려사』 출간될 당시 조준의 견해를 굳이 옹호하기 위해 그 내용을 수정할 필요가 있었는지의 문제는 별도의 논증을 필요로 한다. ‘以實直書’를 원칙으로 한 『고려사』에서 현재까지 그런 의도를 가지고 『고려사』의 내용이 변질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고려사』 저술 당시 기록이 미비해 그 연대를 정확히 고증하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의도적 수정의 사례를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런데 지리지는 그 저자가 명확한 유일한 志이다. 지리지는 梁誠之가 찬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8* 따라서 내용을 변경하였다면, 양성지가 사전개혁을 옹호하기 위해 저지른 일이 된다. 그러나 양성지가 그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 양성지 스스로가 문종대 경기가 확대된 것으로 이해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그것에 대해 논란의 여지가 있어 공양왕 2년 기사의 세주로 처리하였을지 가능성도 있다. 경기 확장에 대한 양성지의 인식은 그가 편찬에 참여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文宗 16년에 다시 개성현을 府로 승격시키고, 또 西海道의 平州를 나누어

牛峯郡에 소속시켜 개성부에 예속시켰다. 忠烈王 34년에 별도로 開城縣令을

두어 府에 속하게 하고, 城外를 관장하게 하였다. 忠肅王 원년에 楊廣道라하였다.

恭讓王 2년에 처음으로 경기를 左·右 도로 나누었다. 장단 임강토산 임진 송림

마전 적성 파평을좌도로 하고, 개성 상음 海豐 덕수 우봉을 우도로 했다.

또 文宗 때의 舊制에 의하여, 양광도의 한양 南陽 仁州 安山 交河陽川 衿州 果州

抱川 瑞原 高峯과 交州道의 鐵原 永平 伊川 安峽 漣州 朔寧을 좌도에 예속시키고,

양광도의 富平 江華 喬桐 金浦 通津과, 서해도의 延安 平州 白州 谷州 遂安

載寧 瑞興 新恩 俠溪를 우도에 예속시켰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의하면 공양왕 2년 경기 좌우도의 설치를 명확히 문종대의 구제에 의거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조준의 견해를 수용한 것으로 고려 말 이해 여러 사람들에게 수용되고 있는 견해였다. 그렇다면 문제는 조준의 견해가 문종대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 이다. 이와 관련하여 경기도가 공양왕 2년 개편되었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주지하듯이 공양왕대에는 경기 과전을 원칙으로 하는 과전법이 수립된 시기이다. 공양왕 2년은 창왕 즉위와 더불어 시작된 量田에 따라 작성된 田籍을 급전도감에서 반포한 해이자9*, 이전에 있던 전적을 시가에서 불태운 해이다.10* 따라서 이 시기에는 이미 과전법 실시를 위한 준비가 완료된 시기였다. 과전법은 경기 과전을 원칙으로 하였으므로 기왕의 경기 8현으로는 과전의 규모를 감당할 수 없었다. 때문에 경기도를 확대하는 조치를 취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경기의 확대는 과전법의 시행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종대의 경기 확대가 주목된다.


문종대는 고려의 田制에서 몇 가지 중요한 조치들이 단행되었다. 우선 문종 23년 토지 측량의 기준을 보수의 따라 정하였다. 이른바 方33步를 1結로 정하는 조치를 취하였다.11* 이러한 보수의 확정은 이 시기 대대적인 量田의 전조 혹은 결과로 이해된다. 그리고 양전은 조세수취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실제 문종 23년에는 田稅를 정하였다.12* 양전과 전세 확정은 전시과에도 영향을 미쳤다. 문종 30년 문무양반의 전시과를 다시 정했다.13* 따라서 문종대 양전과 전세책정 토지분급제의 정비는 고려 말 창왕 ~ 공양왕대의 전제 개혁과 대단히 유사하다. 문제는 문종대 전시과를 다시 정할 때 경기가 확대되었는가 이다. 이 문제와 관련한 핵심적인 기록이 문종 30년 전시과에서 시지의 분포지이다. 1일정과 2일정으로 기재된 분급대상 시지의 위치는 확장된 경기 즉 문종대 ‘대경기제’의 주요한 근거였다.


한편 고려전기 柴地는 空閑地 혹은 陳荒田으로 간주하기도 하나, 시지는 문자 그대로 땔나무를 채취하는 땅으로 간주하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온돌이 확산되어 있던 고려에서 땔나무의 채취는 생활에 필수적 요소였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이규보는 좋은 주거지의 조건 중 하나로 땔나무를 채취할 수 있는 산을 꼽았다.14* 이렇듯 시지를 柴木를 채취하는 땅으로 간주하면, 시지를 官人의 거주지와 멀리 떨어진 外方에 두기는 어렵다. 운송 때문이다. 시목을 채취하는 땅인 시지를 먼 지방에 두고 이로부터 땔나무를 채취하여 개경까지 운반하기에는 수송비 부담이 너무 컸다. 자기를 굽는 가마를 폐기하는 주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인근 지역에 땔나무가 부족해 질 경우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목을 채취하는 시지는 개경 인근에 자리해야 했다.


그렇다면 문종대 시지를 지급하기 위해 대상지를 개경 인근 지역으로 확대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와 관련하여 문종대 활발하게 산전이 개간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주지하듯이 문종대 田品의 규정은 산전의 개간이 왕성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사정의 반영이라는 점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연구자는 많지 않다. 고려전기 왕성하게 개간된 山田이 구체적으로 어떤 토지를 의미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平田에 대립하고 평전은 하천변에 위치한 토지15*라는 점을 고려하면 산전은 산 혹은 구릉부에 위치한 토지로 이해된다. 이러한 산전의 개간은 한편으로는 경작지의 확대를 의미하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땔나무를 채취할 수 있는 초채지 즉 시지의 감소를 의미할 수도 있다. 문종대 전시과가 가진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시지의 감소가 꼽히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산전의 확대는 시지의 감소와 일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종은 시지의 분급대상지를 외곽으로 더 확대하였을 것이다.




요컨대, 문종대에는 田品이 규정되었으며, 양전이 시행되었으며, 전세의 액수가 결정되었으며, 토지가 관료들에게 분급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지로 지급할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는데 이는 고려전기 활발하게 진행되던 산전의 개간이 초래한 결과였다. 이에 문종은 시지로 지급할 토지를 기존의 경기 즉 元京畿가 아니라 인근의 고을로 확장했고 고려 말 전제개혁론자들이 보기에 이것은 과전법 시행을 위해 경기를 확장한 것과 동일시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문종대 경기의 확대는 실체가 없는 일이 아니라 문종대 개간과 양전 등의 사건들 속에서 발생한 현상으로 생각된다. 다만 확대된 경기를 관할할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것을 경기의 확장 혹은 대경기제로 명명하기 위해서는 공양왕 2년의 상황과 연관시켜 천착할 문제로 판단된다.



1. 『고려사』권56, 지리 왕경개성부.  

2. 『고려사』권54 지리지 왕경개성부

3. 변태섭, 앞의 책, 252~253쪽.

4. 정은정, 앞의 책, 116~124쪽.

5. 정학수, 앞의 논문, 178~179쪽.

6. 윤경진, 「『고려사』지리지 대경기 기사의 비판적 검토」, 『역사와 현실』69, 2008.

7. 전제개혁론을 둘러싼 정국의 동향에 대해서는 신은제, 「고려말 정국의 동향과 전제개혁론의 전개」, 『한국중세사연구』32, 2014를

   참조.

8. 『단종실록』 권8, 단종 1년 10월 경자일.

9. 『고려사절요』권34 공양왕 2년 정월.

10. 『고려사절요』권34 공양왕 2년 9월.

11. 『고려사』권78 식화지 전제 경리 문종 23년.

12. 『고려사』권78 식화지 전제 조세 문종 23년.

13. 『고려사』권78 식화지 전제 전시과 문종 30년.

14. 『동국이상국집』권23 記 四可齋記.

15. 신은제, 「고려시기 사회경제사 연구의 진전을 위한 모색」, 『한국중세사연구』38호,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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