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암울한 상황에도 아이는 강낭을 꿈꾼다

아동 분야 『강냉이』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강냉이』

권정생 지음, 김환영 그림, 사계절, 2018







암울한 상황에도 아이는 강낭을 꿈꾼다


김혜진 - 그림책독립연구자





아이가 길모퉁이 토담 밑에 강낭(강냉이, 옥수수)을 심고 있다. 아이는 혼자가 아니다. 어매(엄마)와 생야(형)가 함께 심는다. 후두둑 뿌리며 내던지지 않는다. 생야가 파놓은 구덩이에 작은 손으로 한 알 두 알 정성껏 넣으면 그 위를 어매가 흙으로 덮어준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 오줌 주고 거름 주고 정성을 다해 돌본다. 그 과정이 내내 평화롭다. 하지만 하룻밤 새 암울한 시절로 접어든다.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고, 가족은 갑자기 짐을 싸 들고 피난길로 나서게 되었다. 전쟁 통이었고 다들 어떻게 해야 할지 혼란스럽지만, 아이는 아끼고 보살펴온 강낭이가 더 걱정이다. 흙에 뿌리내린 강낭을 데리고 함께 피난 갈 수도 없는 노릇. 저 혼자 점 찍어둔 강낭을 모퉁이에 놓아두고 눈물을 훔치며 떠난다.


피난길에 든 사람들은 낮이나 밤이나 두고 온 고향 생각에 먼 하늘을 바라본다. 그 틈에서 아이는 평화롭다. 엄마 무릎을 베고 누워 잠을 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전쟁 통 난리 통이지만 엄마 품만큼 안온하고 평화로운 곳이 있으랴. 아이는 누운 채로 눈을 감으나 뜨나 모퉁이에 두고 온 강낭이 생각뿐이다. 그 평화로운 품에서 이내 잠든 아이의 꿈은 다시 강낭이를 만나는 것이다. 이제 곧 싹을 틔울 강낭, 잎이 나고 쑥쑥 자라 얼마만 지나면 알이 영글 강낭의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아이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한중일 평화그림책 연작이 벌써 10권째다. 『강냉이』가 그 열 번째 책이다. 세 개국의 12명의 작가가 만드는 평화의 메시지가 첫 책 『꽃할머니』를 시작으로 열 번째 결실을 맺은 것이다. 권정생 선생의 시에 김환영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시는 13살 초등학생 권정생이 쓴 것인데, 13살만큼의 생각을 담백하게 담고 있다. 권정생 선생이 한국 전쟁을 맞았던 때가 13살이다. 어른들이야 전쟁 때문에 잃어서 아픈 것들이 좀 더 많을 테지만 아이들은 달랐을 것이다. 그저 평화롭게 살던 그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리움만이 애절할 터였다. 학교생활이 한창 재미나던 시절, 전쟁은 그렇게 선생의 유년도 강낭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다만 그가 기억하는 전쟁의 풍경과 정서가 글로 남았다. 크게 아프지도 슬프지도 않게 아이 마음 그대로가 강낭에 빗대어 쓰였다. 13살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글은 그래서 더 전쟁의 아픔을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언제 읽어도 여전히 질박하되 영리하며, 덤덤한 듯 예리하고, 평범한 이야기 속에 풍자와 해학을 놓치지 않는 글이다.


권정생 선생은 1937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광복 직후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1969년에 『강아지똥』, 1973년 『무명 저고리와 엄마』가 각각 기독교아동문학상을 받았고,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다. 평생을 시골 교회 종지기로 살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선생은 숱한 책들을 펴냈다. 선생의 관심은 언제나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이었다. 질곡의 역사를 살아온 사람들을 껴안은 선생의 글은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권정생 선생은 한국 대표 작가다. 거기에 노련한 화가 김환영의 그림이 더해졌다.


김환영은 “멋진 그림이 아니라 진실한 그림이 늘 문제다. 이를 위해 나는 수없이 패배해야만 했다”라고 말한다. 그만큼 붓끝이 단단한 화가는 또 없을 것이다. 그는 책마다 각기 다른 이야기에 걸맞은 다양한 채색 기법들을 다양한 종이에 접목해 작업해왔다. 『강냉이』 역시 마찬가지다. 거친 붓의 결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물기 없이 뻑뻑한 채색을 들여다보자면 먹먹한 목마름이 가슴을 치듯 전해져온다. 그것은 잠깐 감상에 빠지게 했다가 이내 그 시절 흙에 땅에 기대 살던 시간과 공간을 생각해보게 한다. 큼큼하고도 고소한 흙냄새, 달큰하니 쫀득한 강냉이 맛 그대로다. 표지와 본문의 글씨는 화가가 직접 손으로 썼다.


형제가 이마를 맞대고 앉아 강낭을 떨구는 장면 위로, 둘을 감싸 안 듯 웃는 얼굴의 어매가 몸을 기울여 들여다본다. 이 장면은 따뜻하고 안전하다. 강낭이 자라기를 지켜보는 아이는 매일 개구리를 잡고 굴렁쇠 굴리며 즐겁게 논다. 이 장면은 마치 리듬을 타듯 강약 조절이 되어 있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또, 피란민들이 전쟁 중에 화염과 포탄이 터지는 먼 산을 바라보는 장면은 마치 숨을 죽이고 순간이 멈춘 듯 표현했다. 즐거우면 즐거운 대로 불안하면 불안한 대로 그 감정이 오롯이 전해진다.


이야기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감정을 상승시키기 위해서는 반복하듯 짝을 이루는 장면을 배치하는 것이 좋다. 하지만 짝이라고 해서 똑같은 장면을 쓰는 것은 아니다. 제자리걸음처럼 반복하는 장면의 연결은 자칫 지루해질 수 있다. 이 책에서는 비슷한 장면에 조금씩 변화를 주어 장면과 장면 사이를 배치했다. 반복하되 조금씩 다르게 표현하여, 이야기를 나아가게 하고 서사를 엮어가는 것이다. 잘 설계된 그림책에는 반드시 그런 짝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에서는 아이의 꿈속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인지 쯤 샘지(수염) 나고”의 장면과 “알이 밸낀데…”의 장면은 짝을 이루되 극단적으로 상반된 상황을 그린다. 같은 옥수수밭을, 처음에는 별빛이 가득한 밤하늘 아래 초록으로 자라난 옥수수밭으로 보여준다. 책장을 넘기면 불에 타 검은 재가 되어버린 옥수수밭이 나온다. 아이의 꿈속과 현실은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더불어 독자의 감정도 상승한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이처럼 짝을 이루는 장면 뒤로 이어지는 마지막 네 페이지다. 글 없이 그림만으로 과감히 마무리했다. 독자의 공간을 남겨둔 것이다. 그렇듯 암울한 상황에도 아이는 알이 꽉 밴 강낭을 꿈꾼다. 한동안 무구한 얼굴로 별빛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아이 모습을 바라보았다.


2015년 초판과 2018 개정판이 있는데, 표지와 판형부터 전체적으로 조금 달라졌다. 개정판에서는 본문 글씨를 좀 더 크게 넣거나 배치를 바꿨다. 그러다 보니 판형도 커졌다. 책의 인상이 되는 표지 색도 바뀌었다. 표지 분위기를 바꾸니 속표지도 따라 바뀐다. 본문 글 배치 역시 앞뒤로 가고 오며 어떤 글은 더하기도 해서 적절한 자리를 다시 찾았다. 이모저모 초판의 아쉬웠던 여러 가지를 고루 손질하여 새 얼굴로 내놓았다. 두 권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오소리네 집 꽃밭』

권정생 지음, 정승각 그림, 길벗어린이, 1997


『빼떼기』

권정생 지음, 김환영 그림, 창비, 2017


『깜장꽃』

김환영 지음, 창비, 2010







김혜진 - 그림책독립연구자


2011년부터 현재까지 월간 학교도서관저널 신간추천위원으로 그림책 신간 서평을 쓰고 있다. 2012년부터 2016년까지는 동아일보 어린이 신간 서평을 격주로 썼다. 한때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으며 그림책으로 할 수 있는 독후 활동에 관심이 많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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