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이산과 분단을 넘는 예술혼,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 1

2019-04-12 ~ 2019-04-12 /

이 글은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개최된

「코리안 디아스포라 국제 학술 컨퍼런스」 자료집에서 발췌되었습니다.

박본수(경기도박물관 책임학예사)


1. 코리안 디아스포라와 경기도


‘코리안 디아스포라(Korean Diaspora)’는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모국을 떠나 세계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한민족 ‘이산(離散)’을 의미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 이산을 넘어》는 2018년 올 해가‘경기(京畿)’라는 이름이 정해진 지 1천년이 된 것을 기념하여 열린 전시회이다. 경기도의 지리적 위치는 고대부터 한반도의 중심부이며, 고려시대의 수도인 개성과 조선시대의 수도인 한양(서울)을 끼고 있기 때문에 경기도는 주요한 역사적 사건의 관련지로서 비껴가기 힘든 장소였다. 삼국시대 고구려․백제․신라가 한강 유역을 차지하기 위해 각축을 벌였으며, 1953년 한국전쟁의 휴전협상 장소인 판문점과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상당 부분 또한 경기도에 위치하고 있다. 따라서 경기도의 역사를 살펴보면 지방사(地方史)라기보다는 고스란히 한반도의 역사를 담아내고 있는 민족사의 핵심임을 알게 된다. 한민족의 이산과 연결지어보면, 1902~3년경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농장으로의 노동이민의 출발점이 인천항이었다. 인천은 1981년 직할시로 분리되기 전까지 경기도의 영역에 속했었다.

19세기 중반 만주로의 이주로부터 시작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쳐 1945년 해방 이전까지 ‘타의(他意)’에 의해 조국을 떠나야 했던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함께 오늘날 743만여 명으로 성장한 재외한인 동포의 규모는 우리가 의도하고 계획하지 않았지만, 민족의 이산과 조국의 분단을 극복하고 새로운 ‘한민족 네트워크’를 열어가는데 직간접적인 도움을 줄 든든한 우군으로 보인다(세계의 재외한인에 대한 현황, 이주사에 대한 개론적인 서술은 윤인진, 『세계의 한인이주사』(나남, 2013). 참조). 지리적 영토를 넘어 ‘문화적 영토’의 개념이 대두되는 ‘초연결 사회’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존재와 위상은 경기도의 1천년 역사에서 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흐름, 특히 미래를 내다보는 관점에서 그 역할이 클 것으로 기대된다. 한민족 해외 동포들과의 연결, 이들의 도움과 국내외 한인들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경제와 문화 분야를 비롯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이 더욱 순조롭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예측은 누구라도 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중국․일본․러시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 등 아시아 지역 5개국에 거주하는 재외한인 동포 작가 25인을 초청하여 그들의 작품 114점을 전시했다. 전시품은 회화가 대다수이며 사진과 영상 작품이 5점 정도이다. 전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전시를 준비하면서 수집한 책과 도록, 그리고 2015년부터 재외동포들 사이에서 불리고 있는 노래〈고려아리랑〉을 영상물로 틀어 전시장에 울려퍼지게 했다.


2. 전시 준비와 작가들과의 만남


‘경기천년’을 기념하는 전시회의 하나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전시를 경기도미술관에서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5~6월경이었다. 2017년 여름, 코리안 디아스포라 관련 전시회와 작가들에 관한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1990년대 초반 소련체제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인해 중국과 구소련 지역 동포들과의 교류의 물꼬가 트였고, 동포 작가들을 소개하는 전시가 국내에서 열리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부터는 광주비엔날레를 비롯하여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전국의 국․공립 미술관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에 대한 대규모 전시가 기획되어 열렸다(가장 대표적인 전시로 2009년 7월 17일부터 9월 27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아리랑 꽃씨: 아시아 이주 작가전》을 꼽을 수 있다). 이러한 전시를 통해 중국 용정 출신의 한락연이나 우즈베키스탄의 신순남과 박성룡 등이 소개되고, 러시아의 변월룡과 꽤 많은 재일동포 작가들이 국내에 알려졌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의 전시회 자료를 토대로 작가 목록을 만들었다.

2017년 9월, 코리안 디아스포라 전시 추진을 위한 전문가 자문위원회를 구성하였다. 1980~90년대부터 한국근대미술과 더불어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들에 관한 연구를 펼치고 있는 윤범모 교수(동국대), 김복기 교수(경기대), 그리고 한국이민의 역사를 전시하는 인천 한국이민사박물관의 신은미 관장을 자문위원으로 위촉하였다. 경기도미술관 최은주 관장과 필자는 자문위원들과 만나 토론하며 전시회 추진을 위한 얼개를 그려나갔다. 논의의 출발은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에 대한 성격 규정에서부터였다. 자문위원회 위원장인 윤범모 교수는 코리안 디아스포라 미술에서 가장 핵심적 개념으로 ‘타의에 의한 이주’를 꼽았다. 김복기 교수는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아리랑 꽃씨: 아시아 이주 작가전》에서 설정한 범위를 보다 넓혀 전시 규모를 전 세계적으로 펼쳐보자고 했다. 이 제안은 예산과 시간의 한계로 인하여 실현되지 못한 미해결 과제로 남게 되었다. 하지만 2009년 전시에 포함되지 않았던 사할린 작가를 발굴하여 이번 전시에 소개하였다. 신은미 관장은 러시아 사할린의 동포 작가와 중앙아시아에서 활동한 주요 인사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최은주 관장은 2009년 국립현대미술관의 《아리랑 꽃씨》전의 주관 학예연구실장이었기에 심도 있는 리서치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2017년 12월, 구체적인 전시 예산이 확정되지 않은 시점이었으나 재외한인 동포작가의 현황을 알아보기 위한 예비조사의 성격으로 중국 연변지역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4박 5일간의 일정으로 중국 길림성 연변과 용정을 윤범모 교수, 김복기 교수와 함께 방문하였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연변대학 미술학원에 재직 중인 여러 교수 작가들과 몇 명의 젊은 작가들을 만났다. 살을 에는 듯한 만주벌판의 추위를 실감하며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가를 둘러보고, 해란강이 내려다보이는 일송정에 올라서서 〈선구자〉를 불렀다. ‘중국의 피카소’로 추앙받는 용정 출신의 조선족 작가 한락연(1898-1947)을 기념하는 공원과 전시관도 가보았다.

2018년 연초에 코리안 디아스포라 전시 예산이 배정되었다. 작가정보를 좀더 보완하고, 전시의 범위와 내용을 구체화하기 위해 자문위원을 추가로 위촉하였다. 원광대학교에서 한락연에 관한 박사학위논문을 쓴 이광군 교수(심양노신미술대), 연해주 출신으로 러시아 최고 미술학교인 레핀아카데미의 교수로 재직했던 천재적인 화가 변월룡(1916-1990) 연구의 권위자인 문영대 미술평론가, 재일동포 미술에 관한 전문가인 김희랑 분관장(광주시립미술관 하정웅미술관),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25년을 거주하며 한글학교 교사․고려일보 기자를 지냈기에 중앙아시아 고려인의 문화를 잘 알고 러시아어에 능통한 김병학 시인이 새로운 자문위원으로 보강되었다. 아울러 중국과 일본의 작가연락 및 조정 역할을 해줄 코디네이터로 권상해(도쿄예술대 박사과정), 정금령(홍익대 박사과정) 선생을 섭외하였다.

2017년 12월부터 2018년 7월까지 10여 차례가 넘는 크고 작은 자문회의를 거쳤다. 자문회의를 통해 전시의 규모와 내용, 초청작가가 결정되었으며 전시의 제목으로 사용된 ‘이산을 넘어’는 윤범모 교수의 제안이었음을 밝혀둔다. 또한 일본(오사카․교토․도쿄, 3/22~26), 중국(북경․하얼빈․심양․단동, 4/9~13), 러시아 사할린(유즈노사할린스크․코르사코프, 4/28~5/1),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타슈켄트․알마티, 7/1~6) 등 5개국을 차례대로 다니며 작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작품을 보았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동포작가들 까지 포함하여 50~60명의 작가들을 만났다.

일제강점기에 건너간 일본 동포들과 그 후손들이 살고 있는 오사카․교토․도쿄에서 만난 동포 작가들, 과거사에 대한 책임과 사죄나 성찰 없이 전진하는 일본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재일동포 작가들은 분단된 조국이 겪고 있는 남과 북의 대립과 갈등을 마치 거울처럼 투영하며 살고 있었다(재일동포들이 두 그룹으로 나누어져 서로 반목과 갈등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글로는 정호승, 「재일동포, 그 외롭고 쓸쓸한 한국인」, 『분단의 경계를 허무는 두 자이니치의 망향가』(현실문화연구, 2007), pp. 182-189. 참조). 그래서인지 유독 통일에 대한 갈망이 더 컸다. 19세기 중반부터 국경 넘어 만주로의 농경이주로 시작되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되었던 만주 지역의 조선족 동포들이 살고 있는 연변․용정․심양․하얼빈, 그 중에서도 중국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의거와 함께 일제가 만든 ‘731 부대’로 기억되는 공간이다. 하얼빈에서 심양으로 연결되는 일직선의 고속철을 타고 가면서 본 차창 밖 풍경은 시인 이육사가 그린 막막한 ‘광야(廣野)’의 느낌을 실감케 하는 끝없이 펼쳐진 평원이었다. 사할린 동포에 대해서 “일본은 강제로 데려갔고, 소련은 고향 길을 막았고, 비정한 모국은 그들을 버렸다”는 표현은 매우 적절한 상황 묘사인 것 같다(이연식․방일권․오일환 저,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사할린한인 문제를 둘러싼 한․로․일 3국의 외교협상-』(채륜, 2007)). 사할린은 그 땅의 선주민들-아이누, 키랴크(니브흐), 오로크인-에게는 이방인들에게 선대의 땅을 빼앗긴 ‘한(恨)’의 공간이고, 우리 동포들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갈 날만 손꼽아 기다리던 ‘망향의 한’이 깊이 서린 곳이었다. 연해주에서 잘 살고 있던 17만 명 이상의 고려인들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송되어 살고 있는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와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동포 작가들의 관심과 환영은 한국에서 떨어진 먼 거리만큼이나 크고도 뜨거웠다. 스탈린의 폭압에 의해 겪게 된 무자비한 폭거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소련 체제에서 성공한 소수민족이 되었다. 하지만 1937년의 강제이주는 한 동안 금기어였다. 소련체제가 무너지고 새로운 민족 정권이 등장한 이래로 이른바 ‘고려인’의 입지는 오히려 불안해진 것으로 비쳐진다(고려인의 역사에 관해서는 김호준, 『유라시아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아픈 역사 150년』(주류성, 2016) 참조). 빡빡한 일정으로 위에서 열거한 장소들을 다니며 작가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작품을 보았다. 시간과 공간, 예산의 한계로 인해 이번 전시에 초청하지 못한 동포 작가들에게도 언젠가는 한국에서의 전시기회가 주어지기를 고대한다.

재외한인 동포들은 한민족의 혈통이지만 재일동포, 재일조선인, 재일한국인, 자이니치, 조선족, 카레예츠, 고려사람, 고려인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린다. 그들은 대체로 한국과 연결되고 싶어 했다. 혈통적 근원이 한반도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고, 또한 소수자로서 겪는 크고 작은 차별로 인해 자신이 누구인가, 정체성에 대해서 늘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동포 작가들 중에서 중국 조선족과 재일동포는 비교적 한국말을 잘 하는 편이었다. 조선족 2세대까지는 비교적 우리말을 잘 하지만, 3~4세대로 가면 우리말을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러시아어 권역에 속하는 사할린과 중앙아시아 작가들은 한국말을 살짝 알아듣는 정도이고, 한국말 의사소통은 통역을 필요로 했다. 1937년 강제이주와 그 뒤로 이어지는 냉전체제를 거치는 동안 러시아어 권역의 동포들이 우리말을 전승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컸던 것 같다. 반면에 음식은 언어에 비해 비교적 잘 전승되고 있었다. 러시아의 사할린과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서는 밥과 국, 국수, 인절미, 김치, 그리고 콩나물․시금치․고사리 같은 나물류 등을 즐기고 있는 것을 보았다. 한국음식은 이들에게서 현지인들에게 전파되기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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