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정수연

[문화플러스] 도시들의 시간

2019-12-14 ~ 2019-12-14 / 2019 경기북부 문화예술공모지원사업



이전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그 공간을 채워가는 것을 바라보는 경험은 누군가에게 아쉬움이고, 누군가에게 기대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공간의 소멸이고, 누군가에게 공간의 창조이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것들이 아쉬운 이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임을 알기 때문에 변화를 한탄하기보다는 이전 것을 기록하고 기억함으로써 소멸되어가는 옛 공간과의 추억을 간직하기로 했다. 12월 14일 일산에 위치한 ‘마두그곳’에서는 ‘도시들의 시간-일상 잔여물’ 전시회가 열렸다. 일산은 우리나라 계획 1기 신도시로 지정되어 빠른 속도로 개발이 이루어졌고 기존 주택을 허물고 아파트촌이 들어서면서 순식간에 예전과는 다른 도시의 모습이 형성되었다. 주민들은 뉴타운지구 형성을 위해 곳곳에 철거 예정 스티커가 부착되는 것을 봐야 했고, 순식간에 익숙한 공간은 사라지고 낯선 신도시 공간 속에 들어와 있었다. 워낙 급격한 변화였기에 미처 사라져간 것들을 충분히 기록하지 못한 채 떠나보내야 했던 경험이 있기에 젊은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변모하고 사라지는 경기 북부 지역의 소리와 이미지들을 기록하고 아카이빙 자료의 설치 미술을 통해 지역 기록을 지역민과 공유하는 전시회를 기획하였다.


전시장에 들어서니 커다란 스크린에 상영되고 있는 영상물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작가들이 기록한 어느 동네의 뒷골목이, 어느 산속 풍경이, 어느 해안의 도로가 거기에 있었다. 너무 일상적이고 사소한 풍경을 담은 작품들이지만, 작가들은 “도시는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닮고 상호간 영향을 주며 변화해간다. 인간의 욕망과 추구, 삶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본 작업을 통해 계속해서 변화해가는 공간과 사라지는 것에 담긴 이야기들에 주목하고 기억하고자 한다.”며 작품취지를 밝혔다. “어떤 소리는 그 곳에서만 나는 소리가 있다. 살면서 그냥 지나치기 쉽지만 귀기울이는 순간 새로운 소리가 발견된다. 그 소리에 집중하고자 했다”는 말처럼 일상적이고 익숙한 풍경과 소리이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고자 노력한 다면 전혀 새로운 것들이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김희령, 이정민, 정연빈 세 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각자 자신이 기록하고 싶은 공간을 설정하였는데, 김희령 작가는 구일산을, 이정민 작가는 고양동을, 정연빈 작가는 동해를 선택했다. 우선 김희령 작가는 <구일산, 구일산VR>이라는 작품을 선보였는데, 구일산의 풍경과 그 곳에서만 들을 수 있는 사운드를 기록했고, 주민인터뷰를 통해 추억을 공유하고 공간을 기억하고자 하였다. 김희령 작가는 “본 작업은 사람들의 기억이 촘촘이 퇴적된 공간으로서 구일산을 기록하고자 했다. 구일산은 많은 중국 교포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다면적이고 복잡한 성격을 지닌 구일산을 이방인으로서 그곳의 풍경을 기록하고, 이방인으로 그곳에 정착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기억을 기록한다.”고 작품에 대해 설명했다. 이정민 작가는 <공간, 그리고 사람들에 대하여>를 통해 일산 고양동을 기록하였다. “도시발전에 따라 대한민국의 많은 공간들이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겪으며 사라져가고 있다. 내가 학창시절 살았던 삼성군인아파트가 위치한 고양동 역시 지역이 발전됨에 따라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사업장들이 곳곳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중략)...이처럼 어느 곳에 가던지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이유로 많은 공간과 소리들이 사라지고 있다. 하지만, 공간에 대한 기록은 당시 행하고 느꼈던 것들을 추억하게 하며 그 추억을 또렷이 회상하게 그 공간이 어떻게 사라져 가는지, 사라지는 그 공간에 있던 사람은 누구였는지 알게 한다는 점에서 소중하다.”고 작품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정연빈 작가는 <동쪽바다, 낡은 벽, 고양이들> 작품을 통해 동해에 대한 기록물을 남겼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동쪽바다의 산책자, 무거운 짐을 지고 걷는 여행자다. 바닷마을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이며, 불쑥 튀어오르는 길고양이이다. 그녀는 바다에서 일하는 노동자, 매료된 구경꾼이고, 잃어버린 기억을 불러들이고 기원하는 무당이다. 길 위에 어색하게 솟은 흔적을 더듬어 기억을 발굴하는 고고학자다. 여러 개의 목소리는 사소하고 개인적인 서랍을 열어 내밀한 순간과 마주한다. 그러면 문득 작은 고양이처럼 낯선 시간이 다가온다.”고 밝혔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남는 것은 기록뿐이다. 공간도, 기억의 주체도 시간에 따라 소멸되어 갈 수 밖에 없으니 결국 사라져간 공간에 대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전해줄 수 있는 것은 기록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젊은 예술가들의 열정이 반갑고 기특하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것에 열광하는 시대에, 사라져가는 것들에 주목하고 그 속에 있었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다시는 듣지 못한 그곳의 사운드와 이미지를 채집해 우리의 기억을 선명하게 되살릴 기록을 축적한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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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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