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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경기도의 고문서는 다 어디로 갔을까?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그 많던 경기도의 고문서는 다 어디로 갔을까? >


-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고문서는 지금으로부터 먼 과거에 작성된 문서가 현재까지 전해져 오늘날 우리가 과거 어느 시점의 역사적 맥락을 추정할 수 있게 해주는 퍼즐조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 시대와 대한제국기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지도 백 년 이상 흘렀고, 그러는 사이 경기도 내의 각 관청과 민가에 보관되어 왔던 문서들도 대부분 자취를 감추었다. 이번 호부터 시작하는 <경기도 고문서 산책>에서는 다행히 지금까지 그 모습을 잘 보존한 경기도의 고문서에 관한 이야기를 한 꾸러미씩 풀어보고자 한다.


경기(京畿)라는 말은 원래 서울을 뜻하는 경(京)과 그 주위를 둘러싼 일정 지역인 기(畿)가 합쳐진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서울로 지칭됐던 곳은 어느 특정한 한 곳만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바뀌어 왔다. 신라의 서울 하면 경주를 떠올리고, 고려의 서울은 개성을 떠올린다.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수도 서울과 경기도의 지리적 이미지는 조선시대 이래에 형성된 것이다. 조선 개국 후 새 왕조의 수도로 한양(漢陽)이 정해졌고, 한양에 한성부(漢城府)가 설치되면서 그 주위를 둘러싼 고을들이 경기도를 형성하게 되었다. 물론 조선시대 경기도에는 지금 북한 지역의 일부와 강원도, 충청도, 인천 광역시의 일부가 포함되었지만, 대체로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경기도의 범주와 비슷하다.


조선은 전국을 크게 여덟 개 도(道)로 나누고 그 아래에 목(牧), 부(府), 군(郡), 현(縣) 등의 지방 체제를 확립했다. 그리고 해당 지방에 왕명을 받들어 제반 업무를 관장할 수령들을 빠짐없이 부임시켰다. 우리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각 도에서 일어나는 업무는 관찰사(觀察使)가 관할했고, 그 아래에 규모에 따라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감(縣監), 현령(縣令) 등이 고을 사또(使道)로서 임무를 수행했다.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도나 각 고을의 실무는 감영과 관아에서 근무한 수많은 실무자들의 문서 행정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조선은 엄격한 문서 행정의 나라였다고 해 도 과언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고을 사또께 민원을 제기할 때도 문서를 작성해서 제출했고, 관아끼리의 업무 협조도 지금과 다를 바 없이 공문을 주고받으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시대 관아에서 작성되고, 또 각 관아의 문서고에 차곡차곡 보관되어왔던 고문서의 실체는 머릿속으로 상상만 할 뿐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 조선시대에도 이미 몇 차례 큰 전란을 겪었고, 대한제국·일제강점기·해방 등의 격변기를 거치면서 조선시대 관아의 기록물 대부분이 폐기되거나 유실되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전래된 고문서가 경기도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현재 시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경기도 고문서의 모습을 하나씩 살펴보자.



『동여도』의 한성부 돈의문 밖 경기감영(기영圻營) 표기 부분


경기감영의 고문서


감영(監營)은 관찰사가 집무한 공간을 비롯하여 조선시대 도정이 집행된 관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경기감영은 시기에 따라 수원·광주·한성부 등에 건물을 두었다. 이 가운데 구체적인 모습을 미루어 볼 수 있는 것은 한성부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곧 돈의문(서대문) 밖에 접해 있었던 경기감영이다. 현재 지하철 서대문역 인근 서울적십자병원 일대에 경기감영이 자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