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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로의 길목이었던 도란마을

경기학광장Vol.2 _ Village & History

< 영남대로의 길목이었던 도란마을 >


- 경기학광장Vol.2 _ Village & History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도란마을은 경기도 이천시 율면 산성리에 있는 자연마을이다. 율면은 조선시대에는 이천군이 아닌 음죽현 지역이었고, 도란마을도 원래 이름은 돌원(乭院)이었다. 음죽현은 일제강점기인 1914년 행 정구역통폐합 때 경기도 이천군과 충청북도 음성군으로 분할된다. 돌원의 경우는 윗돌안과 아랫돌안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때 아랫돌안은 음성군 금왕리에 편입되고 윗돌안은 이천군 산성리에 편입된다. 그러니 지금의 도란마을은 예전 윗돌안에 해당하던 마을인 것이다. 한때 100여 호에 달했고,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70여 호가 사는 마을이었지만 지금은 40여 호에 불과하며, 외지인도 잘 들어오지 않는 한적하기 그지없는 농촌마을이다.도란마을 가운데로는 일생로라는 구간명칭을 가진 318번 국지도가 지난다. 워낙 교통량이 적은 도로라 군데군데 설치된 ‘경기옛길 영남길’이라는 표지가 아니라면 이 길이 그 유명한 조선시대의 영남대로라는 것을 모르고 지나칠 수밖에 없다.


「1872년 지방지도」 중 「음죽현 지도」에 표기된 돌원

함종 어씨가 집성촌을 이루다

도란마을은 함종 어씨가 세거하던 집성촌이었다. 도란마을에는 1984년 국가지정 중요민속문화재 제127호인 어재연 장군의 생가가 있다. 어 장군 생가의 사랑채와 헛간, 광은 모두 19세기 말에 지 어진 건물로 추정되지만, 안채는 현종 원년인 1660년에 건립된 것으로 확인된다. 도란마을이 함종 어씨의 세거지가 된 시기는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 거슬러 내려가는 셈이다. 따라서 애초 도란마을 은 함종 어씨의 입향조가 이곳에 자리를 잡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라 판단된다. 하지만 이후로 도란마을은 각성바지 마을로 변해갔고, 지금 도란마을에 살고있는 함종 어씨는 어영선 씨와 어홍선 씨 두 집안뿐이다.


어재연 장군 생가

어재연 장군(1823~1871)은 조선후기의 무장으로 1871년 미국의 로저스 제독이 강화도를 침략한 신미양요 당시 동생 어재순과 함께 6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결연한 항전을 치렀으나 중과부 적으로 미군에 패하여 동생과 함께 전사한 인물이다. 국가를 위해 산화한 두 형제를 기리기 위해 도란마을에는 충장사라는 사당이 건립되었고, 쌍충연이라는 연못으로 된 공원이 조성되었다.


충장사


쌍충연 공원

영남대로가 마을을 통과하다


증보문헌비고 등의 문헌기록을 보면 원래 이곳은 ‘돌원(乭 院)’ 혹은 ‘석원(石院)’이라 표기되던 마을이다. 지금의 도란은 돌원에서 유래되어 변화된 발음인 것이다. 원(院)은 조선시대 국가에서 운영하던 여행자를 위한 숙박시설이었으니, 당연히 옛길이 이 마을을 통과했고, 이 마을은 일종의 정류장이자 휴게소였다는 의미이다.
조선후기에는 국가적 간선도로망이 정비된다. 그 중 영남대로라고도 부르는 동래로는 한양에서 동래까지 이어진 길로 요즘으로 치면 경부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길이었다. 도란마을은 바로 이 영남대로가 통과하는 마을로 경기도와 충청북도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이 때문에 도란마을은 교통취락으로 변화되며 함종 어씨 집성촌에서 각성바지 마을로 이행하게 되었을 터이다.


옛 영남대로는 현재 포장도로로 변해 있지만, 교통량이 많지 않은 한적한 도로다.

과거를 보러가던 영남 선비가 묵어가다

노상추라는 조선후기의 무관이 쓴 <노상추일기> 에는 그가 선비였던 시절 영남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오가며 돌원에서 하룻밤 묵어간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영남에서 과거길에 오른 선비들은 다른 고개를 제쳐두고 문경새재를 넘었다. 추풍령을 지나면 ‘추풍낙엽’ 처럼 떨어진다고 하고, 죽령을 넘으면 ‘쭈욱’ 미끄러진다는 속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聞喜)’는 기쁜 소식을 듣는다는 뜻이므로 호남의 선비들도 먼 길을 돌아 문경새재를 넘기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아무튼 문경새재의 주막에서 하루를 묵고 아침에 길을 나서 충주를 지나면 날이 저물 무렵 돌원에 당도하기 마련이라 이곳 주막에서 묵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소몰이꾼을 위해 마방집이 들어서다

영남대로는 장사꾼과 소몰이꾼들도 자주 왕래하던 길이다. 경부고속도로가 뚫리기 전인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영남이나 충북지방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했으므로 마을의 길가에는 그들을 위한 주막집과 마방집이 즐비했다.
그런데 대로라고 하면 상당한 규모의 포장된 도로가 떠오르지만 사실 이 마을을 통과하던 길은 1970년대 자동차가 보급되어 노폭을 넓히고 콘크리트 포장이 되기 전까지는 우마차가 하나 다닐만한 넓이의 흙길이었다고 한다. 영남에서 올라오는 소몰이꾼은 소를 서너 마리씩 줄에 묶어서 끌고 다녔는데 도란마을을 지나치면 마땅한 마방집이 없었으므로 언제 도착하였든 무조건 여기서 묵어가야 했다. 마방집은 서너 집이 길가에 늘어서 있었으며, 각각 10~20마리 정도의 우마를 수용할 수 있는 외양간과 행인들이 쉬어갈 수 있는 커다란 방 두 개 정도를 갖추고 있어서 숙식을 해결해주고, 소죽을 끓여주기도 했다.
소몰이꾼이 몰고 가던 소는 발을 보호하기 위해서 짚신을 신겨서 다녔다. 그래도 개중에는 다리를 다쳐 절거나 주저앉아 이동이 여의치 않은 경우가 생긴다. 이럴 경우 마을에서 소를 싸게 사서 잡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소를 도살하는 것은 불법이었으므로 몰래 잡아야 하는데, 혹시라도 발각되면 아랫도란에서 잡았다고 핑계를 댔다. 아랫도란은 충청북도의 관할구역이었기 때문에 그냥 없던 일로 넘어가곤 했다. 마을에는 소를 잘 잡는 소위 소백정이라는 별명이 붙은 사람이 있어서 도끼로 머리 한방을 쳐서 소를 잡아준다.
그러면 보상으로 쇠머리를 그에게 주고 나머지 부분은 마을 사람들이 나누어 가졌다.

마방이 있었던 도란마을의 길가


마을의 번영을 위해 난장을 트다

사람과 물류가 오가는 교통의 요지에는 자연발생적으로 시장이 서는 법이다. 도란마을에도 당연히 시장이 섰다. 도란마을에 장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으나, <동국문헌비고> 에는 2와 7로 끝나는 날짜마다 매월 6회씩 돌원장이 섰던 기록이 보인다. 따라서 적어도 18세기 말부터는 장이 생겼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의 문헌기록에는 돌원장이 들어가 기도 하고 빠지기도 해서 장의 지속 여부에 대해서는 종잡을 수 없다. 하지만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에는 난장이 서는 등 번성했었고, 해방무렵까지도 장이 섰다. 도란마을은 5개 면의 경계지역이라 인근 면에서 모여드는 사람들로 장세가 좋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장이 쇠락해지는 기미가 보이면 몇 년마다 한 번씩 마을에서 돈을 모아서 시장축제를 거행하기도 했다. 이를 장별신을 세운다고 하였다. 이때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고 난장도 텄다. 난장 을 트면 줄타기, 박첨지놀음을 하는 놀이패도 들어왔고, 농악과 씨름판이 벌어지며, 야바위와 도람쁘(트럼프) 등 온갖 노름들도 성행했다. 난장은 일주일에서 보름에 이르기까지 이어졌으므로 주변 동네뿐만 아니라 멀리에서 온 구경꾼들도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술과 도박으로 마을이 기울다

도란마을이 교통의 요지이자 장터로 오가는 사람이 많아지자 유흥문화 또한 발달하였다. 그래서 술과 도박 등이 만연하기 시작했고, 인근 일죽· 대소· 무극 등지에서 건달들도 몰려들었다.
술집은 색싯집 혹은 니나노집이라 불렀고, 열두 집이나 있었다. 두세 명의 색시를 고용하여 손님들의 술시중을 들게 하였는데, 흥이 나면 젓가락 장단을 두드리며 유행가를 불러대곤 했다. 색시들 은 주로 외지에서 들어오므로 괜찮은 색시가 새로 오면 손님들이 서로 차지하려고 싸움이 벌어지는 일도 허다했다. 오가는 행상인들이야 현금을 주고 술을 사먹었지만 마을 주변에서 오는 단골손님들은 외상거래를 했다. 그런데 이 외상값이란 게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법이어서 보통 추수가 끝난 후 쌀 몇 가마는 외상값을 갚느라고 날아가 버리기 일쑤였다.
술은 도가에서 가져오기도 하지만 밀주를 만들어 팔기도 해서 이런 일화도 전한다. 한번은 밀주를 담은 항아리를 머리에 이고 가던 아주머니가 단속반에 걸렸다. 아주머니는 미끄러지는 척하면서 도랑에 쓰러지며 항아리를 엎었다. 술이 도랑의 물과 섞여서 도가에서 만든 술인지 밀주로 담근 술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던 단속반원은 그만 포기하고 가버렸다.
술판보다 더 무서운 것이 노름판이었다. 마을에 마방집과 색싯집과 같은 공간이 많다 보니 불법 노름이 성행했던 것이다. 특히 ‘채패’라는 노름이 유행을 했는데, 36문의 판에 쓰인 글자를 선택하여 돈을 걸고 맞추면 36배를 따가는 일종의 즉석복권과 같은 노름이 었다. 인근 마을에서도 노름을 하려고 도란마을로 몰려들었고, 간혹 따기도 했지만 대개는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가곤 했다. 채패를 주도하는 물주를 ‘오야’라고 했는데, 일정 기간 마을에 머물며 장소를 빌려 영업을 하다가 마을사람들이 돈이 다 털릴 때쯤에는 슬그머니 다른 마을로 옮겨 갔다. 채패는 일제강점기부터 1960~70년대 까지 성행했는데, 이후 정부의 강력한 단속조치로 근절되었다고 한다. 마을 어른 중 몇몇 분은 지금 도란마을이 쇠락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색싯집과 채패놀이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도란마을에 대해 제보해주신 신호철 어른(가운데)

6.25 동란의 아픔이 기억되다

6.25 당시 영남대로는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을 향하여 진격할 때와 후퇴할 때 군사도로로 이용되었다. 도란마을의 어르신들은 그래서 민족분단의 아픔에 얽힌 이야기를 다수 기억하고 있다. 이 마을에 살던 이종갑이란 분은 조금 모자란 동생이 길 안내자로 인민군에게 끌려가자 바로 인민군의 행렬을 쫓아가 자원하는 척 합류했다. 그리고 자기가 저 모자란 녀석보다 길을 잘 아니 돌려보내라고 하자 그렇지 않아도 답답해하던 인민군이 동생을 풀어주었다. 이종갑 씨는 길을 안내하는 척하다가 탱크와 트럭이 고개를 넘어갈 때 슬금슬금 대열의 뒤로 빠졌다가 도망쳐 마을로 돌아왔다고 한다. 반면 인민군에게 협조하거나 인민군을 따라 월북하는 경우도 있었다. 율면 면장을 지냈던 이용선 씨도 월북을 시도하다 잡혀 징역살이를 한 인물이다. 월북했던 마을 청년 중에는 간첩이 되어 고향으로 내려오는 경우도 있었다.
해방 이후 좌익 활동을 했던 인물과 6.25 때 월북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이 마을에서 지금도 들을 수 있는 이야기지만 상당히 조심스러워하는 경향이 있다. 당사자들의 친척들이 아직도 마을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란도란 살아가는 마을을 꿈꾸다

지금껏 살펴보았던 팔색조와 같은 마을 역사를 뒤로 한 채 현재 도란마을은 한적한 시골마을로 바뀌었다. 공식적인 마을이름을 ‘돌원’에서 ‘도란’으로 바꾼 것도 ‘살기 좋은 행복한 마을’이라는 마을 표석의 글귀가 말해주듯 과거지사를 접고 주민들이 도란도란 정겹게 살아가는 마을로 거듭나기를 소망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지만 돌원 시절 겪었던 마을의 역사는 도란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 소중한 문화자산으로 활용될 가치가 충분하다는 점은 잊지 말아주었으면 한다.
경기문화재단에서는 ‘경기옛길 영남길’이라는 문화탐방로를 조성하여 운영하고 있다. 충청도와 경계를 이루는 도란마을은 이 옛길의 종착지이며 핵심마을이다. 영남대로 시절의 위상으로야 되돌릴 수 없다고 해도 도란마을은 이곳을 탐방하는 여행자들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역사적·문화적 유산을 지닌 마을임에는 틀림없다.


글 김준기

동국대학교에서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대학원에서 구비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민속학연구소에 근무하며 마을조사를 다니면서 살아있는 민속현상과 그 안에 담겨있는 전통문화의 가치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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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ormation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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