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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칠쟁이 배금용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사람'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칠쟁이 배금용


- 칠순을 넘어서도 하루 10시간 작품 활동 이어가는 청년 -

끝없는 도전과 탐구의 ‘칠쟁이’ 배금용



‘끝없는 도전과 탐구정신’ 경기문화재단 2018년 발행한 책 『경기도의 예인과 장인』에서 경기도 무형문화제 24호 나전칠기장 칠장 배금용 씨를 일컫는 말이다.


배금용 장인은 1944년 전라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제 때 징용에 끌려갔다와 6살이 되던 해에 돌아가시면서 고아원에 맡겨지기도 했다. 고아원을 탈출해 외삼촌을 만나 서울로 오게 된 배금용 씨는 나천칠기장 최준식 선생을 만나면서 나전칠기에 입문하게 됐다.


▲ 배금용 나전칠기장 (사진 = 『경기도의 예인과 장인』)


나전 칠기는 지난한 작업이다. 뼈대를 만들고 옻칠을 하지 않은 목기나 목물을 뜻하는 백골에 생칠을 발라 건조시키고, 고운 황토분과 물, 생칠을 섞어 만든 칠죽을 백골 표면에 발라 나무결을 메운다. 그리고 또 다시 칠죽을 바르고 연마하고 또 칠죽을 바른다. 다시 연마한 자리에 기름칠을 하고 다시 연마를 반복한다. 두 번째 기름칠을 하고 다시 사포로 칠한 자리를 다듬으면 비로소 나전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 된다.


나전장은 먼저 밑그림을 그리고, 밑그림 위에 부레풀을 두 번 칠한다. 그 위에 자개를 만들어 붙이고, 완전히 마르면 풀빼기 작업을 한다. 표면을 연마하면서 자개의 미세한 높낮이를 바르게 맞추고 다시 그 위에 도칠하는 과정을 이어간다. 도칠 공정은 자개 두께보다 낮게 할지, 같게 할지, 아니면 높게 할지에 따라 다르다. 자개와 낮게 할 경우는 초질, 중칠, 상칠로 마무리하면 된다. 하지만 자개와 두께를 같거나 높게 할 경우 초칠만 10번 이상을 발라 높이를 맞추고 중칠해 말린다.


마지막 상칠은 중칠한 자리를 갈아낸 다음에야 할 수 있다. 상칠할 때는 먼지하나 없는 공간에 정성을 다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미리 날짜를 정하고 목욕을 깨끗이하고 마음을 비운 뒤 작업에 들어간다. 이 때 파리 한 마리만 들어와 작품에 앉아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상칠한 면은 잘 건조시켜 부드러운 사포로 갈고, 자개 문양 위 갈려나가지 않는 부분은 칠긁기칼로 긁어내 자개 문양을 노출시킨다. 이후 광내는 작업에 들어가는 데 광내는 작업 역시 초벌과 재벌 두 번의 작업이 필요하다고 한다.


▲ 배금용 장인이 재현한 나전대모국당초문모자합 (사진 = 『경기도의 예인과 장인』)


이처럼 복작한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나전칠기는 각 과정마다 별도의 장인이 필요해 국가가 직접 나전칠기를 관리하는 기구를 두기도 했다. 통일신라시대 때 칠전, 고려 때 중상서 아래 나전장을 뒀고, 조선 때는 공조 소속으로 칠장과 나전장이 분업화 돼 있었다고 한다.


배금용 장인은 19세에 최준식 선생으로부터 독립해 다른 나전칠기 공방에 취직했다. 김영찬 선생이 종로에 차린 공방에서 일했지만 김영찬 선생의 죽음으로 좌절을 겪고, 이후 이환용 선생 공방, 박철공 선생 공방 등에서 일하다 자리를 잡은 곳이 최준식 선생의 친구인 민종태 선생의 공방이었다. 일한지 3년 만에 민종태 선생의 권유로 하청 공방을 차렸지만 생각만큼 잘되지 않았다. 어려운 집안 살림에 공장 취직해 일을 하기도 했지만 집안 살림이 나아질 기미가 없었다.


“하는 일마다 안 되어 맨 날 빚만 지니 이젠 안 되겠다 싶더라구. 그래서 하던 하청공장을 다 정리하니 400만 원이 되더라고. 그 때부터 작품 길로, 작가로 간 거예요”


이 때부터 배금용 장인이 문화재를 재연하고 복원하는 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작품을 준비하면서 겪은 어려움도 컸다고 한다. 배금용 장인은 “뭘 봐야 만들 텐데... 우리나라에는 작품이 없었어요. 서점들을 다 뒤져서 책을 한 권 샀는데,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 일본 가서 찍은 사진으로 만든 책이었어요. 거기 한 작품을 보고 재현을 하는데...”라고 말했다. 하루 2~3시간 박에 못자고 두 점을 만들어 출품한 대회가 1988년 ‘13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이다. 여기서 입선을 한 이래, 14, 15. 16. 17. 18, 20회 공예대전에서 입선과 특별상 등을 받았다.


▲ 배금용 장인이 재현한 나전대모국당초문염주합 (사진 = 『경기도의 예인과 장인』)


상을 받고 명장의 반열에 올라도 가계에는 큰 보탬이 못됐다. 배금용 장인은 “일년에 상장을 6, 7개를 타도 나는 여전히 돈이 없고, 집사람은 파출부를 다녀야 되는 거야. 선배들이나 후배들은 나 보고 미쳤다고, 그렇게 어려운데 뭐로 작품 활동을 하냐고…”고 회고했다.


배금용 장인은 평생 옻으로 인해 까맣게 착색된 손끝과 손톱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여전히 주문제작을 받지 않는다고 한다. 기한을 두고 수요자의 요구에 따라 작업을 하면, 제대로 된 작품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돈벌이를 위한 작품을 제작하지 않아 여전히 가난할 수밖에 없었고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가야 했다. 그럼에도 젊은 시절에는 두세 시간 밖에 자지 않고 작업에 전력했고, 칠순을 넘은 지금도 10시간 이상 어김없이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배금용 장인은 여전히 끝없는 도전과 탐구를 이어가는 청년으로 살고 있다.



『경기도의 예인과 장인』은 경기도메모리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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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의 예인과 장인』

    원문 서비스/ 경기도메모리(https://memory.libr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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