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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직언하는 소신의 경세 관료, 서필원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 인물'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직언하는 소신의 경세 관료, 서필원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 경세가”



육곡 서필원에 대해 경기문화재단이 엮은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인물』은 “서인 중 한당 계열 관료로서 민본과 변통을 중시하는 실천적인 경세가”라고 평가했다. 효종 때 김육과 함께 대동법을 적극 추진했던 인물이다. 붕당에 기댄 활동보다 신념과 사상에 의한 활동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필원은 58세가 되는 1671년에 사망했다. 당시 병조판서였지만 기록적인 재난으로 백만에 가까운 이들이 죽은 경신대기근을 피해갈 수 없었다.


서필원은 역사학계에서 그 연구가 미진하지만 17세기 두 차례의 전란을 겪은 조선왕조에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한 ‘실무관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서필원은 지방관일 때는 지방에 누적된 폐단을 개선하고자 부단히 노력했고, 중앙에 올라와서는 소신의 정치를 추구했다.


▲현재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있는 서필원 인정비 (사진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필원은 대대로 서인의 집안이었다고 한다. 책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인물』은 “증조부 서익은 이이를 비방하는 정여립을 배척하고 성혼과 정철을 옹호했다. 이 때문에 자신은 물론이고 후손까지 서인의 당색을 띠게 됐다”고 밝혔다.


서필원은 작은 아버지인 서양갑이 광해군 때 기축옥사의 수괴로 몰려 처형되면서 조부인 서용갑과 부친 서운기가 귀양가있던 함경도 이산부에 태어났다. 귀양을 가면서 증조부 때부터 이룬 서울의 가업이 모두 붕괴됐다. 인조반정으로 신원이 복권됐지만 서필원의 가족은 증조부 이전부터 살았던 은진으로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서필원은 효령대군의 후예인 이성갑의 딸을 부인으로 맞으면서 27세 때 서울로 거주지를 옮겼다.


1648년 문과에 급제하면서 언관직을 두루 거쳤다. 이 때 직간한다는 다는 평판을 받았고, 충청도 관찰사로 나가서는 서원이 끼치는 민폐를 들어 도내 서원에 대한 철폐를 주장하기도 했다. 특히 시무를 아는 경세가로서 인정받아 김육의 추천으로 전라도대동법 실시를 주관했다. 송시열과 서인 산당 계열의 배척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지만 현종의 신임으로 곧 관직에 복직할 수 있었다.


▲ 양주에 있는 서필원의 묘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당시 서인계열은 낙당, 원당, 산당, 한당이라는 4개의 분파로 구분돼 있었다. 낙당과 원당은 상낙부원군 김자정과 원평부원군 원두표를 각기 영수로 뒀다. 이른바 공신세력에서 나온 분파라고 할 수 있다. 산당은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영수로 둔 분파다. 모두 충천도 연산, 회덕의 산속 사람들이라 산당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한당은 김육과 신면을 중심으로 대개 서울과 그 인근에 사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효종 때 김육이 정승이 되면서 한당에 힘이 실리기도 했다. 이 때 김육은 대동법 시행과 화폐사용 등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김자점의 역모에 한당 영수인 신면이 연루됐다는 의혹에 장살되기도 하지만 김육은 대동법을 추진해 나갔다. 서필원도 김육과 함께 대동법 시행을 이끌었고 김육이 부국강병을 노리는 효종과의 갈등으로 물러났을 때도 대동법의 실무를 이어갔다.


서필원이 대동법 시행의 맡은 것은 1656년 총청감사에 제수되면서다. 당시 이조가 충청감사 적임자를 찾지 못하자 효종이 직접 이조정랑이던 서필원을 지목했다. 이조정랑(5품)에서 충청감사(종2품 가선대부)으로의 승진은 당시로서도 파격이었다. 그만큼의 서필원의 대한 효종의 신망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 기간 동안 호서대동법을 안정적으로 운영하면서 서원의 남설금지, 충청병영의 산성이전, 충청 수군의 폐단 개혁 등을 추진했다.


이어 1658년 서필원은 전라감사에 임명됐다. 호서대동법이 긍정적 효과를 보자 전라도의 대동법 시행을 위한 조치였다. 전라감사로 부임한 서필원은 대동법의 시행과 함께 백성을 구휼을 위해 노력했다. 1659년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자신의 봉록을 내어 백성을 구휼하고, 소 전염병으로 경작이 어려울 때는 다른 지방에서 소를 얻어 나눠주기도 했다. 이를 공덕을 기려 주민들이 논산군 황화정에 인정비를 세우기도 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에 있다. 이곳은 효종이 자신의 동생인 인평대군에게 정해준 자리인데, 숙종이 서필원에게 하사했다고 한다.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은 경기도메모리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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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변화와 개혁을 이끈 경기 인물』

    원문 서비스/ 경기도메모리(memory.library.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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