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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양평 지평양조장

지지씨가 들려주는 '경기도 근대유산' 이야기

지지씨에서는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한 도서를 한 걸음 더 가까이 살펴보는' 경기학 시리즈'를 기획했습니다.


경기학 시리즈는 [역사문화편], [현대인물편], [역사인물편], [근대유산편] 총 4부로 나누어 진행됩니다.


본 시리즈에서 소개되는 다양한 발간도서는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및 경기도메모리 홈페이지에서 원문으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 양평 지평양조장


격전지에서 살아남은 국내 최고령 양조장


치열했던 전투가 남긴 3기의 전적비



막걸리 애호가라면 지평막걸리를 모르지 않을 겁니다. 전통 막걸리의 맛으로 정평 난 지평막걸리는 90여 년간 3대에 걸쳐 운영되어온 지평주조에서 생산한 막걸리입니다. 지평막걸리의 ‘지평’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리의 지명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지평막걸리의 생산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양평군 지평면 지평의병로62번길 27에 세운 막걸리 양조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건축적 가치를 인정받아 2014년 국가등록문화재 제594호로 지정된 양평 지평양조장입니다.


▲ 지평양조장 전경 (출처:문화재청)


양조장의 건축양식은 조선 전통의 목구조 위에 일식 목구조를 접합한 절충식 구조입니다. 흙벽돌로 외벽을 쌓았으며 환기를 위해 건물 상단에 높은 창을 냈고 보온을 위해 벽체와 천장에 왕겨를 채워 넣은 점이 인상적인 건물입니다. 서까래 위에는 나무 산자 대신 대자리를 짜서 넣은 점도 특징입니다. 당시 탁주 생산 공장으로서의 기능을 잘 살린 건축물로 평가됩니다. 물론 현재 판매되는 지평막걸리는 새로 지은 현대식 공장에서 생산되고 있습니다.


지평양조장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양조장으로 한국전쟁의 격전지였던 양평에서 유일하게 잔존한 건물이라는 점 또한 주목할 만합니다. 지평리 전투가 벌어진 1951년에는 중공군에 맞서던 유엔군의 지휘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양조장 입구에는 당시 사령부였음을 알려주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지난 2020년 6월, 지평주조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막걸리 100만병에 6.25전쟁 70주년 엠블럼을 부착해 출시하기도 했습니다.


지평리 전투는 1951년 2월 13일부터 15일까지 3일간 유엔군과 중공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당시 중공군을 대파하고 1‧4후퇴 이후 한국전쟁을 다시 한 번 반전시킨 전투로 유명합니다. 이는 한국군 6사단이 중공군을 저지하며 큰 전과를 올린 용문산 전투와 함께 양평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로 꼽힙니다. 때문에 지평리 전투는 지평리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지평리 역사상 가장 큰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불어 지평양조장은 명성 높은 지평막걸리의 생산지였다는 사실 외에도 한국전쟁의 유적으로서 의미가 큽니다.


국내에서 지평리 전투는 같은 해 5월 일어난 용문산 전투보다 소홀하게 다루어진 측면이 있습니다. 용문산 전투는 한국군이 대승을 거둔 전투인 반면, 지평리 전투는 미군과 프랑스군이 중공군과 싸워 이긴 전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미국에는 지평리 전투와 관련한 책이 1,200여 권에 이를 정도로 미군과 UN 참전군에게는 한국전쟁에서 매우 중요한 전투로 다뤄져 왔습니다.


▲ 지평리전투 전적지 전경


평범한 시골 마을 지평리가 격전의 장소가 된 까닭은 전략적 요충지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군 입장에서는 지평리가 함락될 경우 중공군과 인민군이 여주 방면으로 진격 후 주력부대를 남하시킬 수 있는 위험이 있었습니다. 당시 횡성과 평창을 함락한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지평리를 돌파하기로 했고 연합군 23연대는 일찌감치 지평리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습니다. 그러나 중공군의 병력 규모가 컸기 때문에 지평리 사수 작전은 쉽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진지를 빼앗기고 또 빼앗는 전투가 3일간 치열하게 이어졌고 마침내 미군 특수임무 부대가 지평리에 도착하면서 적군은 퇴각했습니다.


당시 지평리를 포위했던 중공군 3개 사단을 1개 연대가 막아낼 수 있었던 요인은 미군과 프랑스군의 치열한 저항과 전술, 후방의 화력 지원 등으로 풀이됩니다. 또한 연합군 23연대의 연대장 프리먼 대령은 전투 중 종아리 관통상을 입었음에도 부대의 지휘권을 넘기지 않고 끝까지 싸웠으며 프랑스 외인 대대를 지휘했던 몽끌레아는 이미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군의 영웅으로 불렸을 만큼 이름난 군인이었습니다. 연합군이 참전한 지평리 전투였지만 한국군이 전무하진 않았습니다. 카투사 80명과 일반병 100명 등 180명의 한국군이 프랑스 대대에 섞여 싸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지평 사거리에서 400m 떨어진 곳에 지평리 전투를 기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화강암 계단 위에 편평하게 조성한 대지 위에는 총 세 개의 비석이 자리합니다. 앞쪽 두 개 중 왼쪽은 프랑스군을 향한 ‘지평리전투UN(프랑스) 군참전충혼비’, 오른쪽은 미국군을 향한 ‘지평리전투UN(미국) 군전승충혼비’입니다. 가운데 안쪽에 세워진 비석이 지평리지구 전투전적비입니다. 1957년 7월 국군 제5사단이 건립했으며 중공군 방어전투의 공적을 기념하고 전사한 장병의 영령을 추모하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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