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여름 양평, 끝과 시작은 같다

두물머리로 떠난 여행


모든 것은 연결되어 순환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밝다. 놀이동산에서 우울한 어린이가 없듯 두물머리에서 외로운 어른은 없는 것 같다. 한여름 따가운 땡볕 아래서도, 신종 바이러스의 제약 속에서도 사람들은 만남을 갈구한다. 얼굴을 마주하고서야 스마트폰으로는 충족시키지 못했던 정을 나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 한강을 이루듯 나와 당신도 만나야 우리 삶이 더 풍요롭다.

혼자 여행하는 즐거움이 있다. 또 고독이 위로가 될 때도 있다. 우리는 곧잘 개인의 시간을 예찬하지만 결국 소리 내어 웃는 때는 누군가와 함께할 때다. 두물머리는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아침에는 일출과 물안개를 보러, 점심에는 강바람 맞으러, 저녁에는 그윽한 조명 아래 산책을 하러 사람들이 모여든다.




연꽃 개화기인 6월 말부터 8월 말까지는 두물머리의 성수기다. 해서 주변에는 연잎밥 정식을 파는 식당이 많다. 반죽에 연잎가루를 넣은 연핫도그는 두물머리의 간판이 된 지 오래다. 서너 곳의 핫도그집이 모여 있는데 그 중 원조집은 언제 가도 줄이 길다. 놀이동산에선 아이들이 솜사탕이나 츄러스를 들고 다니는데 두물머리에선 어른들이 죄다 핫도그를 들고 다닌다. 수변 산책로로 들어서면 커다란 느티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시골마을 입구에서 으레 만나는 어르신 당산나무다. 수령 400년이 넘은 아름드리 느티나무는 옛날부터 ‘도당할배’라 불렸다. 도당할배 곁엔 두 그루의 작은 느티나무가 자식처럼 서 있다.




사실 도당할배 옆에는 도당할매라 불리는 느티나무도 있었는데 팔당호가 만들어지면서 수몰되었다. 이후 홀로 남은 도당할배가 쓸쓸해 보였는지 두 그루의 느티나무가 새로 자랐고 오늘날 세 식구가 보기 좋게 어우러지게 되었다. 현재는 나무와 그 주변을 ‘소원쉼터’라 명명해 사람들의 휴식처로 거듭났다. 두물머리 일대에는 그늘이 많지 않다보니 나무 아래는 늘 사람들이 자리한다. 느티나무는 두물머리가 한때 마을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존재다. 그러나 완전히 공원화된 오늘날의 두물머리에서 옛 민가를 상상하긴 어렵다. 팔당호가 생기기 전까진 나루터 주변으로 40가구 정도가 모여 살았다. 나루터에는 두물머리마을과 광주 귀실마을을 잇는 배가 수시로 드나들었고 매일 수십 척의 배가 정박했다고 한다.

사실 나루터 옆에는 여울이 있어 물살 때문에 뗏목을 대기 어려운 환경이다. 그러나 이 일대가 육로상 요충지였기에 배와 사람이 자주 오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두물머리는 남한강 최상류인 강원도 정선군과 충청북도 단양군, 그리고 물길의 종착지인 서울의 뚝섬과 마포나루를 이어주던 마지막 기착지였다. 또한 서울에서 경북 울진에 이르는 조선시대 10대로 중 3대로인 관동대로의 중요 길목이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팔당댐 건설 후 육로가 신설되었고 이 일대가 상수원보호구역으로 지정돼 어로행위 및 선박건조를 할 수 없게 되면서 나루터의 기능은 완전히 상실했다. 팔당호가 생기고 수심 또한 높아졌기에 이제 여울은 없어지고 한때는 걸어도 들어갔던 소내땅은 섬이 되어 ‘소내도’로 불린다.



한때 뱃사람과 상인들이 들르던 주막과 마굿간의 일종인 마방馬房이 있던 나루터 자리에는 과거의 내력을 설명하는 안내판만 있을 뿐이다. 두물머리는 물론 이 근방의 마을마다 행해지던 도당굿은 사라졌고 땅보다 물이 익숙하던 뱃사람과 어부들 역시 사라졌다. 그리하여 폐허가 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한동안은 버려진 땅처럼 적요했던 시기가 있었지만 현재는 앞서 묘사한 바와 같이 활기가 넘친다. 두물머리 근방, 사람들이 덜 모이는 수변 마을에는 전원주택들이 들어섰고 또 들어서는 중이다. 끝인가 하면 시작이고 시작인가 하면 끝이 나는 순환 속에서 강물은 그저 유유히 흘러간다.



나루터에서 조금 더 걸으면 ‘두물경’이라는 표지석이 보인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지점을 시야 안에 아우를 수 있는 자리다. 그 풍경은 끝이기도 하고 시작이기도 하다. 두 강의 끝이며 한강의 시작이다. 해서 ‘한강’이라는 이름은 기가 막히다.

두물머리의 매력은 시작과 끝이 같은 지점에 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데 있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게끔 물길로 증명한다. 두려운 시작 끝에 보람이 있을 수 있고 가볍고 활기찬 시작 끝에 허무함이 있을 수 있다. 대개 시작을 끝이라고, 끝을 시작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희비가 오간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한 감정에 몰입되면 삶은 곧잘 피폐해진다. 허나 한줄기로 섞이는 두 줄기를 보면서 시작과 끝이 다른 지점에 있지 않음을, 모든 것은 하나로 연결되어 순환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 앎이 잠시뿐이더라도 강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삶의 큰 위안을 얻는다. 무한할 것 같은 슬픔도 영원할 것 같은 기쁨도 결국 동전의 앞뒷면과 같다는 것, 그리고 모두 다 머무름 없이 흘러간다는 것을 안다.

해서 두물머리는 양평 여행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도착점이 될 수도 있다. 두물머리에서 ‘물소리길’을 따라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도 좋고, 폐역이 된 구둔역부터 기찻길을 따라 두물머리까지 움직여도 좋다. 시작과 끝을 품은 이 길은 언제가도 아름답다. 다만 혼자보단 함께였으면 좋겠다. 두 물줄기가 하나의 물길로 만나는 풍경을 같이 보면 더 좋겠다.



물소리 따라 걷다보니 조금 알 것 같다

두물머리 수변에는 돛이 접힌 관상용 황포돛배 한 척이 정박해 있다. 물길을 달리지 않는 배는 단지 카메라의 피사체 역할만 할 뿐이다. 여주와 부여에선 유람용 황포돛배가 인기리에 운행되는데 양평 두물머리에선 물길을 달려보지 못하니 내심 아쉽다. 상수원 보호구역이라서 유람선이 다닐 수 없는 것인지 궁금했는데 양평군에서 황포돛배 운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머지않은 시기에 두물머리에서 배를 탄다면 같은 물길을 오갔던 다산 정약용의 기분을 느껴볼 수 있으리라.


당장 배를 타지 못하는 아쉬움은 걷는 길로 대체한다. 수변 따라 철로 따라 숲까지 이르는 길이 두물머리 근처를 지난다. 양평의 대표 트레킹 코스인 물소리길이다. 이름처럼 걷는 내내 물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로 양수역에서 출발해 용문산에서 끝나는 총 길이 60여 km, 6개 코스로 이루어져 있다. 코스별 거리는 10km 안팎으로 평균 3시간 정도 걸리는데 각 코스마다 경의중앙선의 역이 있어 대중교통으로 접근이 편리하다. 사실 물소리길은 아직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돌아보면 십수년 전 제주 올레길이 전국적인 인기를 끈 이후 트레킹 코스를 개통하지 않은 시‧군이 드물다보니 요즘은 ‘~길’이라 소개할 때 딱히 주목을 끌지 못할뿐더러 유행을 좇아 급하게 조성하거나 개통 후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허술한 길도 많다. 물소리길이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더욱이 양평은 걷기보다 바퀴로 돌아보는 코스가 유명해서 걷기를 마다할 이유는 충분하다. 아무리 걷기 예찬을 한들 네 바퀴로 드라이브를 하거나 두 바퀴로 라이딩을 하는 쪽을 선택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제주 해안도로변의 올레길을 걸어본 이들은 공감할 것이다. 드라이브 코스가 근사하면 걷는 길도 만만찮게 멋지다는 사실을 말이다. 기실 물소리길은 남한강자전거길과 상당 부분 겹친다. 특히 2,3,4코스는 코스의 3분의 1 구간 이상이 자전거길과 같은 길을 걷는다. 그렇다보니 상대적으로 빠른 자전거를 피해 걸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반듯한 길과 쉼터, 남한강의 멋진 풍광이 보장된다. 사족이지만 물소리길 개발에 사단법인 제주올레가 참여했다는 점도 신뢰를 준다.




물소리길은 두물머리와 가까운 양수역에서 시작한다. 남양주에서 팔당역을 출발해 강을 건너지 않고 북쪽의 운길산으로 향했던 여정을 강 건너 양평에서 이어가는 셈이다. 행정구역만 달리할 뿐 내내 이어져온 길이지만 남양주 권역에서는 페달을 굴리고 양평 권역에선 두 다리를 택한다. 빤한 말이지만 같은 길도 속도에 따라 다르게 느껴진다.


물소리길은 대체적으로 보고 쉬고 먹는 여정을 모두 만족시키는 길이어서 한 코스 정도를 골라 날 잡고 걸어 봄 직하다. 곳곳에 길 안내 표식과 도보인증대가 있고 특별히 험한 구간도 없는데다 코스마다 역이 있어 접근성뿐 아니라 화장실 이용도 편하다. 무엇보다 모든 코스에 물이 흐른다는 점이 큰 특징이다. 큰물길인 남한강을 비롯해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인 가정천, 복포천, 사탄천, 흑천, 용문천 등 어떤 코스든 작은 물길을 반드시 지난다. ‘물의 고장’이라는 양평의 수식이 물소리길로 증명되는 듯하다.

양수역에서 출발하는 1코스는 한동안 아스팔트길을 따라 부용리 마을길을 걷다가 하계산과 부용산 언저리 산길로 접어들어 2.7km 가량을 걷는다. 숲길이 꽤 긴 구간으로 산 하나를 크게 돌아간다. 1코스는 신원역에서 끝난다. 신원역은 다시 2코스의 출발점이 된다. 2코스는 남한강자전거길과 상당 구간이 겹치며 폐철로를 따라가기에 옛 철길과 터널을 지나는 재미가 있다. 끝 지점인 아신역에 거의 다다르면 보이는 등나무터널 아신갤러리가 포토존으로 유명하다. 여기에선 꼭 ‘인증샷’을 찍어야 한다.




마을길과 산길, 강변길을 두루 걷는 3코스는 11.4km로 물소리길 중 가장 긴 구간이고 오르막도 있어서 서두르면 힘든 길이다. 가는 길에 옥천냉면마을과 카페 순례객들의 성지가 된 스타벅스 더양평DTR점이 있어 쉬어가기 좋다. 양평역에서 출발해 원덕역에서 끝나는 4코스도 10.4km 구간 중 4km에 달하는 구간이 남한강자전거길과 겹친다. 사실 여섯 코스 중 딱 한 개 코스만 걷겠다면 4코스를 추천하는 편이다. 양평역에서 출발하는 4코스는 양평역 앞의 양평시장을 살짝 구경하면서 주전부리를 즐기고 여유롭게 남한강변으로 진입하면 된다. 날짜가 3, 8일로 끝나는 날이라면 양평오일장을 구경해도 좋다. 4코스의 강변길은 매년 열리는 마라톤 대회의 구간이자 양평군민들이 많이 찾는 산책로라서 걷기에 최적의 환경을 갖추었다. 봄에는 벚꽃이 흐드러져 손꼽히게 아름다운 길이기도 하다.




길은 남한강의 지류인 흑천으로 향하는 현덕교에서 굽이돈다. 이때 자전거길과도 갈라진다. 흑천길을 따라 걷다보면 그 유명한 양평해장국의 성지, 신내해장국거리를 만나고 논밭을 이웃한 천변길을 지나 원덕역에 닿는다. 길이 내내 트여 있어 외진 구간이 거의 없고 오르막 없이 평탄해 걷기도 편하며 풍경 덕에 눈이 즐겁고 먹거리가 있어 입이 신나는 코스다. 5코스인 흑천길은 7km로 물소리길 중 가장 짧은 구간이며 대부분 길이 흑천변을 지나고 아늑한 분위기의 오솔길도 걷는다. 코스들 중 가장 한적한 분위기다. 물소리길의 마지막길, 6코스는 용문산으로 접어드는 구간으로 중간지점까지는 마을길을 걷다가 용문산 자락으로 들어선다. 오르막 구간이 길어서 꽤 숨차지만 종점에 다다르면 양평의 자랑, 용문사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다. 용문역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용문시장에 들러 용문의 특산물인 버섯으로 끓인 버섯국밥을 즐겨도 좋다. 상설시장이 있지만 벅적한 오일장을 경험하고 싶다면 날짜가 5와 0으로 끝나는 날 찾으면 된다.




적어도 이 여섯 코스를 다 걷고 나면 ‘양평에 대해 조금은 안다’고 자신할 수 있을 듯 하다. 물론 양평은 경기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의 기초자치단체로 구석구석 제대로 돌아보려면 하루 이틀로는 시간이 부족하다. 다행히 물소리길이 이방인에게 양평의 축약본 역할을 한다. 남한강, 두물머리, 자전거길, 기찻길, 기차역, 레일바이크, 용문산, 은행나무, 양평해장국, 옥천냉면, 강변카페에 이르기까지 양평하면 떠오르는 키워드가 모두 물소리길에 있다. 두 발의 속도는 바퀴를 따라가지 못하지만 천천히 걷고 가만히 더듬은 시간만큼 우리의 여행은, 그리고 삶은 훨씬 웅숭깊어진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픽사베이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33권 『50만 살의 청춘- 경기 북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양평군 : 끝과 시작은 같다>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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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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