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이천의 온천수와 지하수, 그리고 쌀

가을 이천을 찾아서


어린 시절 이따금 이천에 가족 나들이를 가곤 했다. 가는 곳은 정해져 있었다. 이천시 안흥동 미란다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근처 식당가에서 따끈한 이 천쌀밥을 먹었다. 보양 여행이 따로 없었다. 요즘은 이천시 모가면 신갈리에 있는 테르메덴의 인기가 더 높지만 20~30년 전만 해도 미란다온천이 경기 남부에서 손꼽히는 온천이었다.

조선 초부터 미란다온천이 자리 잡은 일대를 ‘온천배미’라고 불렀다. 배미는 과거에 논을 세는 단위로 따뜻한 온천수가 나 오는 논이 몇 마지기 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1870년, 눈병을 앓던 한 농부가 논배미의 물로 세수했는데 눈이 깨끗이 나았다. 소문은 금방 퍼졌고 눈병, 피부병을 앓는 이들이 온천배미의 물로 환부를 씻고 효과를 보았다는 옛이야기 가 전해져 온다.



이천은 온천으로도 유명하다. ‘미란다온천’이라 불리는 미란다스파플러스 전경. ⓒ경기관광포털


우리나라 온천수는 지열로 지하수가 데워져 만들어지는데, 물 온도가 25℃ 이상이며 인체에 해롭지 않으면 온천수라 부른다. 『동의보감』에도 온천 수가 종기나 부스럼 같은 피부질환에 도움이 된다고 쓰여 있는 것을 보면 의료기술과 시설이 변변치 않던 옛날에는 온천을 찾아 치료하려던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피부질환이 심해서 온천욕을 위해 온양, 고성 등으로 순행을 나섰던 임금 세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온천이 흔하진 않아 임금조차 긴 시간 먼 길 거둥했을 정도니 온천수가 나오는 곳은 천연 치료소를 거저 얻은 운 좋은 땅이었을 것이다.

온천수와 지하수의 상관관계는 잘 모르겠지만 이천 농가의 80% 이상은 농사를 지을 때도 저수지나 냇물보다는 지하수를 끌어올려 논에 물을 대왔다고 한다. 물론 가뭄 때는 저장용수를 썼겠지만(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이천에도 근현대에 축조된 저수지가 많다) 지하수가 풍부한 고장임은 확실한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비맥주, 진로소주, 해태음료, 샘표간장 등 물맛이 중요한 다수의 식음료 공장이 이천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깨끗한 지하수로 비옥한 토양에서 자란 이천 쌀의 품질이 좋고 그 물로 지은 쌀밥은 더욱 맛있었을 것이란 분석이 있다. 안타깝게도 최근 들어서는 우후죽순 들어선 공장들과 골프장, 축산농가들의 오·폐수가 땅 밑으로 흘러들어 지하수가 많이 오염되었다는 뉴스를 자주 본다. 물과 흙은 모든 생명의 근원인데 해결책 없이 방치하다가는 쌀과 도자기의 명성에 금이 감은 물론이고 인간 삶의 질도 떨어 진다.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은 옆 동네 주민의 오지랖은 어린 시절 추억이 된 보양 여행을 나중에 내가 노인이 되어서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에서 비롯했다. 



쌀의 고장답게 이천에는 수많은 쌀밥정식 식당이 있고 대부분은 이천쌀로 지은 돌솥밥을 낸다.


이천 시내 곳곳에는 이천쌀밥 한정식집이 셀 수 없이 많다. 임금님, 나랏님, 수라상, 수라간 등을 상호로 쓴 집이 여럿이다. 그중엔 현시대에 맞게(?) ‘청와대’를 간판으로 내건 집도 보인다. 진상미였다는 자부심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 결과다. 이천쌀이 진상미가 되었을 때는 성종 재위 기간으로 알려 져 있다. 『성종실록』을 보면 성종이 1490년 성종 21년에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을 참배했고 이때 이천부사 복승정卜承貞, 1490년 치적자료에 따르면 왕이 이천쌀밥 맛에 매우 만족해 이천쌀을 진상미로 삼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들이 직접 가꾸는 이천농업테마공원 안의 다랑논


수많은 이천쌀밥 식당 중에서도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들이 몇 있는데 가 만 보면 사람들이 방문하는 기준은 쌀밥의 맛보다 반찬의 종류와 가짓수를 더 우위에 두는 것 같다. 밥맛은 대부분 비슷하게 상향평준화되었기 때문일 것이 다. 이천에서 생산된 임금님표(공식 브랜드명이다) 햅쌀로 물양을 잘 맞춰 지 으면 어느 집이나 맛있다. 대부분 한정식집이 바로바로 만든 1인용 솥밥을 내어준다. 돌솥이냐 무쇠솥이냐 용기 차이는 조금씩 있지만 밥알에 윤기가 흐르고 적당한 찰기가 도는, 갓 지은 따끈한 쌀밥이다. 맛이 없을 수 없다. 갓 지은 햅쌀밥에 김치만 올려 먹어도 맛있지만 대부분 한정식집에선 한 술에 반찬 하나씩 올려도 다 못 먹을 반찬이 나온다. 중심 반찬이 무엇이냐에 따라 가격이 조금씩 달라지는데 보통 생선구이, 불고기, 게장, 낙지볶음 등이 주를 이룬다. 밑반찬은 김치, 나물무침, 잡채, 건어물볶음, 장아찌 등이, 국물로 된장찌개가 나온다. 손맛이 따라줘야 하는 한식 일체다. 한식은 반찬 하나하나 만드는 과정이 수고로운데 요즘은 사람들 입맛도 미식가 수준이라 다른 지역도 아닌 이천에서 한정식집으로 돈 버는 일은 참 쉽지 않겠구나 싶다.



이천의 한 카페에서 내놓는 우유빙수. 그릇과 모양을 쌀밥처럼 내놓은 재치가 돋보인다.


밥맛 좋은 집에서 한 상 푸짐하게 먹고 나면 한동안 다른 식당의 밥맛이 아쉽다. 지은 지 오래된 밥, 묵은 쌀로 지어 노르스름한 밥, 물양 조절이 잘못돼 너무 질거나 너무 된 밥을 내어주는 식당들은 다른 음식이 맛있어도 기본이 되지 않은 식당으로 기억되는 것이다. 돈 주고 사 먹는 밥이라도 음식을 해준 분의 노고와 각종 식재료가 상 위로 올라오기까지 과정을 생각하면 감사하게 먹어야겠지만 ‘좋은 밥맛’을 이미 경험한 자는 기대치가 높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쌀밥 또한 도자기의 탄생과 다를 바 없는 제조 과정을 거친다. 흙과 물에서 키운 벼를 탈곡해 도정하고, 그렇게 얻은 쌀알을 물에 불리고 불에 익히고 또 뜸을 들여 완성하기까지 그 기나긴 과정에 흙, 물, 불, 혼이 담 겨 있다. 그 모든 요소가 최상으로 결합해야 맛있는 쌀밥이 된다.



쌀알 모양의 안내소가 방문객을 맞이하는 이천농업테마공원 


한국인은 얼마나 밥에 진심인가.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은 ‘얼굴 보자’, ‘연락하자’와 다름없는 인사말이며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는 ‘밥맛 없다’고 한다. 자기 할 일 다하면 ‘밥값 했다’ 하고 일거리가 없으면 ‘밥줄이 끊겼다’고 한다. ‘한국인은 밥심이다’는 말은 한국인끼리 통용되는 ‘식사 구호’ 같다. 현대에는 단순히 쌀밥만이 아닌 끼니를 상징하는 포괄적인 범위로 쓰이긴 하지만 아무리 빵과 국수를 좋아해도 평생 쌀밥을 안 먹고 견딜 한국인은 없을 것 같다. 쌀은 한국인이 살기 위해 갖춰야 할 기본 토대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아닐까.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1권 『우리들의 캠퍼스- 경기 남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이천시 : 흙, 물, 불, 혼>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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