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 가라하네’

여주 신륵사를 돌아보며



한강 상류에 해당하는 여강(남한강)


신륵사의 키워드는 ‘나옹화상’

여강(驪江)은 여느 때처럼 절 앞을 온유하게 흐른다. 외부 사람들은 남한강이라는 이름이 익숙하지만 토박이들은 여주군을 관통한다 해서 먼 옛날부터 여강으로 불러왔다. 고요한 절에서 바라보는 강은 유난히 더 아름답고 평화롭다. 강을 바로 앞에 둔 사찰은 드물기에, 정토(淨土)에서 낙토(樂土)를 바라보는 풍경은 무척 귀하다. 물 맑고 땅이 좋아 예부터 낙토라 불리던 땅 여주. 그 명성에 걸맞게 신륵사와 가까운 곳에 세종대왕이 묻힌 영릉이 자리하며 신륵사는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절을 아늑하게 감싼 뒷산은 봉황의 꼬리를 닮았다 해서 봉미산으로 불리는 해발 156m의 야트막한 산이다. 예전에는 속세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는 의미로 속리산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신륵사 강월헌과 삼층석탑


신륵사가 사찰 그 이상의 영지(靈地)가 된 동기는 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륵사라는 이름은 신령 신(神)에 굴레 륵(勒)자를 쓰는데 풀이하면 신비로운 굴레라는 뜻이다. 고려 우왕 때, 마을에 용의 머리와 말의 몸을 가진 용마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고통을 줬는데 이때 나옹화상이 용마에게 신비한 굴레를 씌워 제압시켰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추측컨대 용마는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를 뜻할 것이다. 폭우 때마다 여강이 범람해 수해를 입으면, 마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부처님에게 올리는 기도뿐이었을 것이다. 또한 나옹화상은 당시 사람들의 존경을 받던 이름난 고승이었고 그런 미륵과 같은 존재를 사람들은 정신적 지주로 여겼을 테다.


신륵사는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품고 있는 설화와 보석이 무수한데 그중 단 한 가지의 키워드를 꼽자면 ‘나옹화상’이다. 인물 한 명으로 현재 신륵사에 남겨진 보물들, 숱한 옛 이야기들이 다 설명될 수 있어서다. 본지 ‘경기도의 아름다운 사찰’ 시리즈에서 소개했던 이천 영월암도 나옹화상이 중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가 영월암에 꽂은 지팡이는 은행나무로 자라 오늘날까지 성하다. 나옹화상은 신륵사에도 지팡이를 꽂았다. 신륵사 은행나무 역시 수령 650년이 넘은 아름드리 노거수다.




신륵사 구룡루


‘도장 깨기’하듯 보물을 찾는 즐거움

일주문과 불이문을 거쳐 은행나무 앞까지 당도하면 방문객 입장에선 우측 정자로 향할지, 좌측 누각으로 향할지 고민된다. 정해진 순서는 없지만 좌측 누각부터 발걸음을 옮겨 가람을 한 바퀴 돌고 가장 나중에 강가의 정자로 향하는 편이 좋다. 하이라이트를 먼저 보면 이후 만나는 풍경들이 시시해진다. 물론 시시하다고 하기에 신륵사는 볼거리가 많은 절이다. 국가지정 보물 8점, 경기도 지정 문화재 5점, 총 13점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소위 ‘도장 깨기’ 하듯 보물의 개수를 헤아리며 둘러보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금당으로 들어서기 전 통과하는 중문격의 오래된 누각은 구룡루다. 단청이 희끗해진 오래된 누각으로 1858년 중창되었다. 누각 바로 앞에는 유원지에서나 볼법한 포토존을 설치되어 있는데 그 언밸런스한 풍경이 다소 아쉽다. 구룡루라는 이름은 절의 창건설화에서 기원했다. 확인된 기록은 없으나 신륵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원효대사의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연못을 가리키며 신성한 자리라 일러주었고 원효는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는데 그곳이 바로 신륵사였다고 한다. 연못을 메우기 전, 연못에서 9마리의 용이 승천했다고 하는 설화에 따라 누각 이름이 구룡루가 되었다. 구룡루에는 신발을 벗고 들어가 여강의 바라볼 수 있는데 강보다는 등을 돌려 바라보는 극락보전의 모습이 좀더 근사하다. 극락보전과 그 앞의 다층석탑을 감상하기에 구룡루만큼 좋은 자리가 없다. 누각의 기둥 사이로 보이는 법당과 탑이 마치 액자 속 사진처럼 드라마틱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시선이 극락보전의 현판과 수평으로 닿아 건물의 일부가 아닌 전체를 감상하기에 탁월하다. 시선의 각도에 따라 다층석탑 뒤로 극락보전 내부에 모셔진 아미타불이 석탑머리와 맞닿아 보인다.



신륵사 극락보전과 다층석탑


극락보전은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28호, 다층석탑은 보물 제225호,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보물 제1791호다. 보물들의 진가를 확인하려면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야 한다. 화강암이 아닌 새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신륵사 다층석탑은 얼핏 봐도 고급스럽고 세련된 자태로 기단에 돋을새김한 정교한 구름과 용이 백미다. 조선 후기 중창된 팔작지붕의 극락보전은 정문 위에 ‘천추만세(千秋萬歲)’라고 쓰인 현판이 돋보인다. 천추만세는 ‘천만년의 세월을 누린다’는 뜻으로 나옹화상이 직접 쓴 것이라고 전해진다.



신륵사 향나무와 조사당


향나무가 수호하는 전각을 지나 108개 계단을 오르면

극락보전 안에는 주존불인 아미타여래삼존상이 좌상으로, 왼편에 대세지보살과 오른편에 관세음보살이 입상으로 모셔져 있다. 신륵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다른 불상과 달리 이국적인 얼굴과 독특한 옷 주름 등이 특징이다. 아미타여래삼존상 안 복장에서 발견된 통일신라 때의 청동불상과 아미타 부처님의 복장 발원문이 한쪽에 전시되어 있다.

극락보전을 마주보는 위치에서 왼쪽으로 걸음을 옮기면 근사한 향나무가 보인다. 수령 500년을 자랑하는 이 나무는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고 전해지는데 빼어나게 고급스런 자태에서 고찰의 품격이 느껴진다. 향나무가 수호하는 아담한 전각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보물 제180호인 조사당이다. 조사당에는 지공, 나옹, 무학 세 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나옹의 스승이 지공, 나옹의 제자가 무학으로 이들은 고려시대 삼대화상(三大和尙)으로 일컬어질 만큼 불가에 큰 영향을 끼친 스님들이다. 이중 나옹화상은 따로 소조상이 봉안되어 있다.



신륵사 보제존자석종과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


생불로 불렸던 나옹화상에게 잠시 예를 갖추고 전각 뒤편의 108개 계단을 올라가면 나옹화상의 사리를 모신 보물 제228호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을 볼 수 있다. 석종 부도 오른편에는 보물 제229호 보제존자 석종비가, 앞쪽에는 보물 제231호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이 서 있어 이 세 석조물이 하나의 유기적인 작품처럼 보인다. 이른바 ‘보물 3종 세트’로 세월의 더께가 앉은 석물은 투박한 듯 보이지만 하나씩 들여다보면 보물이 보물인 까닭이 보인다.

석종부도의 승탑은 이름 그대로 종 모양의 몸돌을 금강계단처럼 네모난 받침돌이 지지하고 있다. 석종형 몸돌의 겉면은 아무 장식이 없지만 꼭대기에는 불꽃 무늬를 새긴 4각의 보주가 장식되어 있다. 이는 통도사, 금산사 등의 승탑과 함께 조선시대 석종형 승탑의 선구적인 양식으로 평가된다. 보제존자석종 앞 석등은 단조로운 느낌의 부도와 달리 섬세하고 화려한 용과 비천 조각이 돋보인다. 스님이 가시는 길, 불을 환히 밝힌다는 느낌이다. 부도 옆 석종비에는 나옹화상의 묘탑과 영정을 모신 사당을 조성한 내력과 스님의 업적이 적혀있는데 이는 고려 말 명필로 통하는 문인 한수가 썼다.


다층전탑, 옛 뱃사공들에게 위치를 알려줬던 등대

석종부도까지 보았다면 ‘신륵사 보물투어’도 거의 끝이 난다. 이제 진짜 하이라이트가 남았다. 석종부도에서 왔던 길을 되돌아 다시 은행나무 앞에 서면 강 쪽으로 덩치가 꽤 큰 다층전탑이 보인다. 화강암으로 만든 기단 위에 흙으로 구운 벽돌을 쌓은 형태로 마치 서로 다른 탑 두 개가 합쳐진 듯하다. 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으로 국내에 몇 기 남지 않은 다층전탑이자 고려시대의 것으로는 유일한 문화재다. 풍수적으로는 수해를 막는다는 의미의 비보탑(裨補塔) 역할을 한다. 벽돌을 자세히 보면 넝쿨 문양, 반원 문양 등이 새겨져 있으며 탑 안에는 나옹화상의 사리 중 5개를 봉안했다고 한다. 1726년, 탑이 무너져 복원 작업을 할 당시 ‘나옹탑’이라는 기록이 나왔다.



신륵사 다층전탑


높이는 약 9.4m로 강 위에서도 탑이 잘 보인다. 옛날에는 물길을 따라 한양으로 향하던 뱃사공들에게 위치를 알려주는 등대 역할을 했다. 오늘날에는 불자의 마음에 빛을 비추는 등대나 다름없다. 혹 불자가 아니더라도 멀찍이 서서 탑을 보는데 그치지 말고 꼭 탑을 돌아보길 추천한다. 탑을 반 바퀴 돌아 강을 마주하는 순간 신륵사의 상징적인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때문이다. 너럭바위 위의 정자와 그 옆에 온순하게 자리한 삼층석탑, 호수처럼 너른 폭으로 고요하게 흐르는 여강….


청산은 나를 보고 말 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 같이 바람 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동양화폭에 담을 법한 풍경에 시 한 수를 절로 읊게 된다. 타고난 문장가이기도 했던 나옹화상이 남긴 <청산가>다. 오랫동안 머물며 강을 바라보게 되는 정자 ‘강월헌(江月軒)’은 나옹화상의 당호이며 삼층석탑은 나옹화상을 다비(茶毘, 불교식 화장)했던 자리에 세운 것이다. 신륵사는 나옹화상이 유배를 가는 도중 병세가 심해져 머물게 된 사찰이었다. 스님은 결국 이곳에서 열반에 올랐는데 객(客)으로 든 절이었음에도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흔적은 곧 오랜 시간 스님을 섬겨온 사람들의 곡진한 마음과 다름없다. 스님의 가르침에 무수한 이들이 강물에 번뇌를 씻겨 보내고 해탈에 이르렀으리라.



봉미산 솔숲길


좀더 걷고 싶다면 다층전탑 뒤편으로 난 솔숲 산책을 권한다. 산책로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비석은 보물 제230호 대장각기비다. 오래 전에 그 자리에 대장각이 있었는데 지금은 비석만 남았다. 비석에는 고려 말 유학자 이색이 공민왕과 부모의 명복을 빌기 위해 나옹화상의 제자들과 대장경을 새기고 장경각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여기까지 봤다면 더 이상의 보물찾기는 없다. 이제 봉미산 울창한 숲길에서 마음 속 보물을 발견할 차례다.



여주 동네막국수


여긴 어떠세요

신륵사와 그 주변은 관광단지로 묶여 있다. 관광단지 내에는 여주박물관, 백웅도자미술관 등이 모여 있는 도예단지가 있고 자전거길, 산책로 등이 정비된 공원이 있다. 관광객들에게는 옛 황포돛배를 그대로 재현한 황포돛배유람선 체험이 인기다. 신륵사 입구에 있는 황포돛배나루터에서 탑승권 구매 후 배에 탈 수 있으며 배는 약 25분간 강을 유람한다. 다만 코로나19로 인해 운영시간이 비정기적이다. 식사는 신륵사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동네막국수’가 괜찮다. 지역 주민들에게 맛이 보장된 막국수집으로 유명하다. 들기름과 다진 돼지고기 양념으로 감칠맛을 낸 비빔막국수가 이 집의 간판메뉴다. 잡냄새 없이 쫄깃하게 삶은 편육도 수준급이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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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신륵사

    주소/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누리집/ www.silleuk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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