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블록체인이 당신을 속박하고 있다.

2024-03-21 ~ 2024-08-18 / 《빅브라더 블록체인》 리뷰

1948년 조지 오웰은 『1984』에서 빅브라더에 의한 감시와 통제로 인해 주인공 윈스턴이 저항적인 자아를 잃고 체계에 유순한 신체로 재생산되는 과정을 묘사한다. 반면 백남준은 1984년 `조지 오웰이 그려낸 통제사회라는 미래가 반만 맞았다며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라는 인공위성 예술을 선보인다. 백남준에게 있어서 ‘텔레 스크린’으로 대표되는 조지 오웰이 우려한 감시와 통제의 기술은 오히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연결하여 즐기는 소통의 기술이 될 수도 있는 하나의 가능성이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백남준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미스터 오웰, 당신은 틀렸다”라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절반은 ‘맞았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1984년 당시 백남준은 조지 오웰이 그려낸 디스토피아에 대해 전적으로 부정하지 못했다. 오히려 절반만 맞았기에, 아직은 기술에 의한 통제사회가 완벽하게 도래하지 않았기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구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남아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조지 오웰과 백남준 둘 다 즉각적이면서도 전 지구적인 연결 기술이 가져올 미래를 상상했다. 한쪽은 디스토피아를 묘사했다면 한쪽은 그 기술이 가져올 도래할 밝은 미래를 상상했을 뿐이다. 40년이 지난 오늘날 전 지구적 연결은 현실이 되었다. 조지 오웰이 감시와 통제의 기술로 상상했던 커뮤니케이션 기술은 『1984』의 텔레 스크린처럼 감시와 통제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을까? 오늘날 기술환경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각자의 심상은 모두 다를 것이다. 그렇지만 본 전시와 동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특별전 《일어나 20204년이야!》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는 아직도 기술에 저항하기 위해 깨어있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는 것 같다. 오늘날 우리는 백남준의 “굿모닝 미스터 오웰, 당신은 절반만 맞았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전시의 제목이 요상하다. ‘빅브라더’와 ‘블록체인’은 일견 모순되는 개념의 조합이다. 빅브라더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기술에 대한 디스토피아적 상상이라면 블록체인은 암호화 기술에 토대를 두고 있는 분산된 원장 시스템으로 중앙 서버나 중개자 없이 전 지구적 수준에서 정보의 공급자와 소비자를 연결하는 수단으로 평가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블록체인은 정부나 글로벌 자본에서 개인의 자유와 사생활을 지키는 보호막으로 여겨지며 이처럼 위로부터의 통제할 수 없기에 자유의 보장과 개인들의 직접적 참여라는 디지털 민주주의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아니었던가?


이때의 디지털 민주주의란 오늘날 대한민국 정부가 그토록 찬양해 마지않는 전자정부와 같은 도구로서의 기술에 기댄 민주주의가 아니라 기술을 통해 사회가 새롭게 형성되어 가면서 혹은 재구성되어 가면서 만들어지는 새로운 민주적 사회의 작동 원리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기존 권력관계가 배태된 주류 미디어들의 권위와 권력을 약화하고, 대중들 스스로가 송신자이자 수신자로 기능하며 분산된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서로의 의견을 공유하고 성찰하는 민주적 숙의의 과정을 거친다는 의미로서의 민주주의 말이다.


아마도 2010년 ‘아랍의 봄’이라는 사건이 이 새로운 디지털 민주주의에 가장 부합되는 사례일 것이다. 당시 페이스북과 트위터와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는 정보의 유통 창구로 기능했다. 대중들은 새로운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집합적 지혜를 모아 기존에는 상상할 수 없는 사회적 변혁을 이뤄내려 했다. 이때 개별적인 존재로서의 개인들은 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마치 거미줄처럼 연결된 네트워크를 이루며 창조적인 활력을 일으켰다. 무력해 보였던 존재들이 기술을 이용하여 연결되었고, 대중들의 정치 참여를 이끌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기술로 인해 새로운 디지털 민주주의를 형성하고 구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자유와 해방을 이끌던 도구로서의 기술보다 가짜뉴스와 탈진실일 것이 유통되는 창구로 이용되는 기술이 우리에게 더 친숙하다. 사람들의 연결을 통해 참여와 공유의 문화를 만들던 기술은 오히려 사람들이 만들어 낸 문화를 어지럽히고 어렵게 만들어 낸 공론장을 파괴하는 데 일조한다.


이토 마사아키(2023) 이토 마사아키, 『플레이밍 사회』, 유태선 역, 북바이북, 2023 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의 대중들은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디지털 공간에서 도를 넘은 비방을 일삼는다. 연결을 통한 공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로 이행되기도 하지만, 기술을 통한 공감은 타인의 의견이나 인상에 대한 평가에 근거해 자신이 어떻게 그와 동일시될 수 있는가 혹은 좋아할 수 있겠느냐는 동감 혹은 호감으로 변환된다. 평가의 대상이 되는 타인이 자신의 평가 근거와 부합되지 않는 행위를 하면 비난의 대상으로 곧바로 변질된다는 것이다. 온라인에서는 차별에 반대하는 반차별 운동도 활발하지만, 동시에 반차별 운동에 반대하는 반반 차별 운동도 활발하게 일어나며 극단적 상황들이 연출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여 이 모두를 디지털 기술이 태생적으로 이러하다는 비관적 결정론으로 이해하거나 자율적 속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우리를 배신했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옳지는 않을 것이다. 오늘날 기술환경은 현재의 사회적 관계가 드러나는 일종의 인터페이스이다. 오늘날의 기술환경에는 어떤 사회적 구조와 맥락이 결정화되어 있는지 또 그 인터페이스를 통해 이동하는 정보는 무엇이 재현되어서 어떠한 방식으로 유통되는지 우선으로 살펴봐야 한다, 기술이 유토피아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배신한 것은 오히려 새로운 권력관계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점을 망각한 우리 자신들이 아닌지, 자신이 가진 모든 권한을 무턱대고 기술에 위임했던 안일함에서 나왔던 것은 아닌가 자문해야 하는 시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조지 오웰은 맞았는가 아니면 틀렸느냐는 것이 아니라 1984년과 비교해 볼 때 현재는 과연 어떠한 상황인가가 그것이다. 아직도 절반만 맞은 상황일까? 오히려 더 기술에 의한 통제가 강화된 사회는 아닐까? 그런데도 기술을 통해 서로 다른 문화가 연결되고 전 지구의 개인들이 소통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백남준의 바람은 아직 실현 가능한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빅브라더 블록체인》을 통해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40년 뒤인 오늘날의 모습을 확인한다. 《빅브라더 블록체인》에 참여한 작가들은 백남준이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섭외했던 다양한 작가들의 현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자 하는가?


백남준, 〈칭기즈 칸의 복권〉, 1993, 217×110×211cm, CRT TV 모니터 1대, 철제 TV 케이스 10대, 네온관, 자전거, 잠수 헬멧, 주유기, 플라스틱관, 망토, 밧줄, 1-채널 비디오, 컬러, 무성, LD


《빅브라더 블록체인》을 보기 위해 전시장 2층에 입장하기 위해 계단을 올라가기 전에 우리는 백남준의 <칭기즈 칸의 복권>이라는 작품을 만나게 된다. 1993년 백남준은 동양과 서양을 연결해 주었던 실크로드가 광대역 통신으로 대체될 것을 예견한다. 그에게 있어서 칭기즈 칸은 칼과 피, 고통과 증오, 살육과 침략으로 얼룩진 전쟁하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 가슴과 가슴, 그리고 기술을 한데 묶어 세계를 연결하는 새로운 칭기즈 칸이다. 이 새로운 칭기즈 칸은 어떠한 모습인지는 홍민키의 <라이브 방송 중 해킹당한 BB?!??>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홍민키의 작품 안에서 ‘버타리’라고 하는 온라인 방송 플랫폼은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전자화된 실크로드이자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는 장이며 스트리머인 BB는 오늘날의 칭기즈 칸이다.


홍민키, 〈라이브 방송 중 해킹 당한 BB?!??〉, 2024,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9:40, 백남준아트센터 커미션


백남준이 광대역 통신을 통해 마음과 마음이 연결되기를 염원했던 것처럼 그곳에서는 스트리머와 시청자들이 서로의 감정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연결되는 마음은 마음이지만 동시에 상품화된 마음이다. 따라서 표면상, 스트리머 BB와 시청자는 친밀한 관계이며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이 주고받는 것은 상품으로서의 마음이기에 그곳은 개인 간의 자유로운 연결이라기보다는 감정 노동자와 그의 감정 노동을 구매할지 고민하는 자본가들을 연결해 주는 시장이다.


오늘날의 광대역 통신은 사람들의 연결성을 강화하지만 동시에 그 연결을 통해 교환되는 것은 감정 노동과 그것의 보상으로서의 화폐이다. 본디 마음과 마음의 교환은 무언가 증식해 나가는 호혜성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 하지만 플랫폼 기술은 이 호혜적 교환의 더딘 속도를 기다려 주지 않고 계속해서 사람들의 소통을 상품화의 영역으로 포섭해 간다. 버타리라는 플랫폼의 인터페이스는 더미 이미지로 대표되는 기호들의 배치를 통해 스트리머와 시청자 간 소통의 형식을 규정한다. 방송 화면에 끊임없이 표현되는 BB와 시청자의 소통은 전혀 읽을 수 없는 더미 이미지들이지만 그들이 어떠한 상호작용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이 없다. 오늘날 플랫폼에서 마음과 마음이 교환된다면 소통의 내용이 중요하겠지만 그곳에서 이뤄지는 것은 상품 교환이다. 오고 가는 메시지가 매력적인 상품인지 아닌지는 더미 이미지가 올라오는 속도나 양으로도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장서영, 〈터뷸런스〉, 2024, 3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12:07, 백남준아트센터 커미션


광대역 통신으로 연결된 개인들이 얼마나 표준화되어 있는 개인들인지는 장서영의 <터뷸런스>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플랫폼 기술을 통해 대륙과 대양을 넘어 다양한 문화가 교류될 것을 기대했다. 플랫폼 기술이 가진 포용성(inclusion)은 많은 연결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정보의 과부하를 초래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플랫폼은 다양한 사람들의 차이를 새롭게 재편하고 그들이 가진 선택권을 제한한다. 이는 곧 플랫폼의 지배를 낳는 원인으로 작동한다. 더 많은 자유와 선택을 가능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았던 기술은 기내식으로 닭고기를 선택할 것인지 소고기를 선택할 것인지 정도의 자유만을 제공할 뿐이다. 새로운 멀티미디어 기술환경은 도리어 개인들의 취향을 평평하게 만든다.


장서영의 작업에서 비행기로 재현되는 오늘날의 새로운 디지털 공간은 물리적 공간과 다른 체계 논리, 역사성 등으로 사람들을 연결한다. 이 공간에서 개인의 정체성은 퍼스트클래스, 비즈니스클래스, 이코노미클래스로 규정되고, 이들의 삶과 죽음은 전적으로 비행기라는 구조에 부착된 몇 개의 도구들과 기장을 대표로 하는 승무원들에게 맡겨져 있다. 비행기의 승객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하는 공중(public)이 될 수 없다. 비행기라는 하나의 공간에 탑승한 승객들은 동일한 공간에, 그것도 너무나 밀착되어 자기 신체의 움직임조차 제한받을 정도로 가까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행기 승무원들의 제한 그리고 비좁은 좌석에 의해 구분되고 자신의 앞에 있는 화면을 통해서만 서로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디지털 기술에 기대했던 공론장의 확대나 포용적인 공동체의 가능성이 왜 어려운지를 설명해 준다. 새로운 공동체의 공중은 우리가 기대했던 정치적으로 적극적인 공중이라기보다는 개인주의적이고 파편화된 공중으로서 문화비판적이라기보다는 문화 소비적인 것처럼 보인다.



삼손 영, 〈제단 음악(우유부단한 신자를 위한 예배)〉, 2022, 사운드 설치, 4채널 비디오, 디지털 프린팅 카펫과 유리창, 3d 프린팅 PLA, 재가공된 인쇄물과 조화, 가변크기, 개인 소장 Image courtesy Galerie Gisela Capitain and the artist. Photo: Simon Vogel, Cologne.


삼손 영은 <제단 음악(우유부단한 신자를 위한 예배)>에서 개인들이 연결되는 인터페이스에서 어떤 정보들이 유통되고 소비되는지를 적절하게 보여준다. 현재 기술 환경은 기술 복제 시대를 넘어 기계 생성 시대에 접어들었다. 경전에 깃들어 있는 진리나 글 속에 함축된 의미들은 기계에 의해 스캔 되어 읽히기에 직서적으로 전해질 것이라 여겨진다. 하지만 직서적일 것으로 생각하는 단어들은 인공지능이 만들어 내는 가짜뉴스의 재료이다. 알고리즘에 의해 어떤 것은 공개되거나 삭제되고, 무언가가 강조되거나 은폐된다. 이 과정에는 현재의 권력관계가 내장 되어있다. 그런데 오늘날 개인들은 인공지능을 통해 만들어지는 기사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에 대해서는 그리 궁금해하지 않는다.


이 가짜뉴스들은 제단 옆의 여러 스피커를 통해 확대 재생산되며 주체성을 잃은 수동적이며 우유부단한 개인들에게 전달된다. 정보 제공자에 대한 신뢰도 없고, 제공된 정보에 대한 신뢰도 없지만 믿는 모순적 상황이다. 무엇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보다는 증폭되어 나에게 전달된 정보 가운데 무엇이 더 큰 정동적 흔들림을 주는지가 더 중요하다. 이렇게 불신 문화의 증폭이나 혐오문화가 생성되기도 한다.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은 현대 기술 사회의 회색분자들은 이렇게 창궐하는 것이다.


기계 생성 시대의 정보들이 어떻게 생산되는가는 히토 슈타이얼의 <태양의 공장>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실의 육체노동은 게임이라고 하는 일종의 가상공간을 제작하기 위한 데이터로 전환된다. 춤과 같이 정동적이면서 관계적인 것조차도 자본의 잉여가치와 이익 창출의 수단으로 전유된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기술은 더 많은 연결을 위한 도구가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에 의해 창조된 공간은 현실과 가상이라는 이분법으로 순진하게 규정지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처럼 블록체인은 보편적인 인식과는 다르게 전연 개인들의 자유로운 소통이나 사생활을 보장하지 않는다. 새로운 광대역 통신에서 행해지는 모든 거래와 정보들은 블록체인이라 불리는 분산 원장에 기록되며, 이는 네트워크 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부나 중개자를 매개할 필요가 없지만 수많은 사용자로 구성된 전 지구적 피투피(peer to peer) 네트워크 시스템 자체가 기존의 거래 중개자가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블록체인 자체가 궁극적인 제3의 중재자로 떠오르는 것이다. 블록체인은 모든 것을 기록하고 모든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오늘날 네트워크의 군주이자 빅브라더가 된다. 우리는 새로운 디지털 네트워킹 기술이 해방적 잠재성을 갖추고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전 지구의 사람들이 모여 자유로운 창작활동과 소통들은 실제로 구글이나 페이스북과 같은 사이트들을 통해 이뤄지고 개인들의 활동은 기업들의 수익 창출에 포획되고 있음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프레드릭 제임슨(1991)은 일찍이 백남준의 작업이 포스트모더니즘적 시청자들에게 무작위적인 차이들로 구성된 화면을 동시적으로 보라는 불가능한 요구를 한다고 지적하며, 불연속적이면서도 파편적인 그의 작업은 정신 분열적인 후기 자본주의 사회 문화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례로도 읽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백남준의 작업에서 비판점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포스트모더니즘 예술들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면을 갖추고 있음을 훨씬 더 강하게 부각했다. 백남준에게 있어서 시각인터페이스를 활용한 작업은 단순히 시각으로 다가오는 이미지 차이로 만들어진 콜라주가 아니다. 다양한 문화의 질적 차이를 능숙하게 살려내는 것이자 동시에 이 차이들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는 것이었다.


《빅브라더 블록체인》 역시 블록체인이 촉진하게 될 자유주의적 자본시장이 아름답지 못할 것이라고 고발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는다.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 일반지성 혹은 분산된 지성의 발전으로 인해 생산에 대한 특권적 소수의 지배적 영향력이 소실되고 대중들이 새로운 주체로 전환할 민주적 잠재성을 갖추고 있으니, 그것에 기대해 보자는 소박한 기술결정론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다만 정보통신 기술이 자본 축적의 기반이 된 오늘날 기술 사회에서 기술과 자본의 결합이 어떻게 인간을 소외시키는가를 보여주는 동시에 어떻게 하면 자본을 위한 기술이 자본과 분화될 수 있을까에 대한 단서들을 제시할 뿐이다.


조승호, 〈은신처〉, 2024, 납판, 석고보드, 비닐, 알루미늄, 나무, 케이블, 사운드 설치, 가변크기, 백남준아트센터 커미션


1984년 백남준은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서 기술에서 소외되어 가는 인간들에게 기술을 통해 기술과 인간 모두를 인간화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오늘날 주목해야 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화들을 연결하는 연출가로서의 인간 백남준 그 자체이다. 《빅브라더 블록체인》은 서로 다른 문화들을 어떤 방법으로 연결할 수 있을지까지 보여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기술이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기술결정론에서 벗어나 적극적 실천에 의해서만 디지털 기술 안에 내포된 잠재성이 현실화할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물론 조승호가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날의 빅브라더의 감시는 전방위적이지만, 그 토대는 아직 부실하다. 블록체인이라는 빅브라더는 아직 절반만 맞았다.


상희, 〈원룸바벨〉, 2022-2023, 인터랙티브 VR, 컬러, 사운드, 15:00



HWI(휘), 〈너의 전생〉, 2024, 싱글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6:37, 백남준아트센터 커미션


그렇다고 우리에게 엄청난 기술적 실천을 해야 함을 역설하지도 않는다. 오늘날의 빅브라더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이양희의 <트립 더 라이트 판타스틱>처럼 각자의 환경에서 춤을 추고 자유롭게 편집하며 새로운 가치들을 생산하는 것처럼 아주 가벼운 일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실천이 즐거움이라는 쾌락의 영역에 국한될 필요도 없음도 상기시킨다. 상희의 <원룸바벨>처럼 삶의 터전을 스크린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구경하고 소통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할 수도 있다. 매체와 기술을 통해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은 노동과 화폐가 아니라 매체와 기술을 통해 조우할 서로의 삶과 문화인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기술을 통해 소통되고 공유될 때, 우리는 기술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은 그 용도가 재설정되어 새로운 방향성을 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청계천기술문화연구실 전은기



전시 《빅브라더 블록체인》은 8월 18일까지 백남준아트센터 제2전시실에서 관람할 수 있다.

자세히보기 백남준아트센터 누리집 《빅브라더 블록체인》


세부정보

  • 빅브라더 블록체인

    장소/ 백남준아트센터 제2전시실

    일시/ 2024.3.21.-2024.8.18.

    기획/ 이수영, 임채은

    참여작가/ 권희수, 삼손 영, 상희, 이양희, 장서영, 조승호, HWI(휘), 홍민키, 히토 슈타이얼

    주최주관/ 백남준아트센터, 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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