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도심 속에서 만난 보물 법당, 꿈과 현실 흐리는 부처님 낙토

성남 봉국사를 찾아서




태평동 일대와 영장산 자락의 봉국사 전경. 사진=봉국사


영화 <인셉션> 한 장면 연상케 하는 절 진입로

성남 가천대역에서 태평로를 따라 봉국사(奉國寺)로 향하는 길은 굉장히 가파르다. 현재는 도심 속 사찰이지만 경사도만큼은 여느 산사 진입로 못지않다. 물론 시내버스를 비롯한 차량 통행은 자유롭다. 그런데 좀 특이하다. 비탈을 한참 올랐더니 바로 내리막길이 등장하고 곧바로 또 오르막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파도를 탄 듯하다. 거듭 직면한 급경사 길은 눈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문득 중력 없이 도로가 솟아오른 비현실적인 모습을 표현한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인셉션>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다들 비슷하게 느끼는지 봉국사가 위치한 태평동 일대는 ‘성남 인셉션’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한동안 태평동 급경사 도로 사진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인셉션> 속 인물들은 꿈과 현실을 드나들며 상호작용을 한다. 꿈을 통제한다는 설정이지만 무엇이 꿈이고 현실인지는 등장인물도 관객도 헷갈린다.

『금강경』 종장(終章)인 사구게(四句揭)에는 ‘일체유위법(一切有爲法) 여몽환포영(如夢幻泡影) 여로역여전(如露亦如電)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이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있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이슬, 번개와 같으니 마땅히 이와 같이 보라는 것이다. 꿈과 현실은 구분될 수 있는가? 나를 덮쳐 올 것 같은 저 언덕길을 꿈이 아니라 현실이라 말할 수 있을까? 현실이라면 언제까지 항상(恒常)할 수 있을까. 존재의 무상(無常)함을 이제야 온전히 이해하게 된 것일까? 그럴 리 없다. 불볕더위 속에 급경사를 오르느라 눈앞 풍경이 흐릿해졌을 뿐이다.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기 직전에 자리하고 있는 ‘도심 산사’, 봉국사 산문으로 들어섰다. 절 만큼 물 인심이 좋은 곳도 없다. 스님이 내어준 냉수를 약사부처님이 내어준 약수라 여기며 벌컥벌컥 들이켰다.



봉국사 전경


영장산 자락, 성남시 대표하는 천년고찰

봉국사는 해발 193m의 영장산(靈長山)에 자리 잡은 산사가 맞다. 산자락을 타고 촘촘하게 주택과 아파트, 학교가 들어서 있어 산이라는 인식보다는 번잡한 도심의 인상이 짙을 뿐이다. 태평동 일대는 성남의 원도심으로 1970년대 서울에서 이주한 이들이 산 위에 집을 짓고 살면서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형성되었다. 절은 영장산 해발 100m쯤에 자리했으니 산 중턱쯤 되는 셈이다. 옛날에는 영장산 줄기를 따라 가장 상단부에 망경암이, 그 아래 현재의 봉국사가, 그 밑으로 법륜사가 있었다고 한다. 법륜사 자리에는 현재 금빛초등학교가 있다. 사실 성남에는 율동과 야탑동 경계에 태평동 영장산과 동명의 영장산(해발 413m)이 있어 가끔 혼용되기도 한다. 옛 이름은 별이 떠오른 산이란 뜻의 성부산(星浮山)이었다는 데 대한제국 시기 황실과 나라의 번영을 영장산 신령에 기원하는 중수비를 망경암(望京庵)에 세우면서 영장산이 되었다고 한다. 일명 칠성대라고 불리는 망경암은 이름처럼 서울을 조망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작은 암자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조선 후기 조성된 성남 유일의 마애불, 망경암 마애여래좌상을 볼 수 있다. 사찰 안내를 해준 봉국사 총무 홍인스님이 밤에 망경암에서 바라보는 서울 야경이 매우 아름답다고 귀띔한다. 봉국사에서 망경암까지는 산길을 따라 도보 15분쯤 걸린다.

망경암의 전망이 그리 좋은 들 봉국사를 대강 훑어볼 수는 없다. 봉국사는 영장산뿐 아니라 성남을 대표하는 불교 사찰로 역사적, 대중적 위상이 높은 천년고찰이기 때문이다.



도심 사찰 유일의 국가지정 보물 법당인 봉국사 대광명전


전국 도심 사찰 내 유일한 ‘보물 법당’

봉국사는 지난해 12월 국가 보물로 지정된 봉국사 대광명전 덕에 방문자가 부쩍 늘었다. 도심 사찰 최초로 보물이 된 법당으로 지은 지 350년이 다 되어간다. 고찰에서 이따금 만나는 노거수도 100살이 넘으면 감탄이 나오는 데 하물며 도심 한복판에 300살 넘은 목조건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깝다. 그간의 전쟁과 재해, 급속한 개발 속에서 살아남았다니, 우주의 시간으로는 찰나겠으나 지금 여기의 인간에겐 그저 부처님의 가피 덕인가 싶게 유구하다.



대광명전 앞 기단 양끝에 세워진 서수상


건물의 역사는 조선 현종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1673년(현종 14), 현종의 두 딸인 명선과 명혜가 천연두에 걸려 잇따라 요절했다. 각각 13세, 9세의 어린 나이로 혼인을 앞둔 채였다. 공주들을 매우 아꼈다고 전해지는 현종과 명성왕후는 숭유억불 정책을 시행하는 와중에도 딸들의 명복을 빌기 위해 이듬해 봉국사를 공주들의 원찰로 세웠다. 하지만 현종은 그 자신도 1674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 사찰의 완공 소식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주를 기리는 원찰은 드물기에 봉국사의 역사적 가치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는데, 대광명전을 이루는 목재를 측정해 보니 부녀가 세상을 떠난 1673년에서 1674년 사이 벌채한 소나무를 썼음이 밝혀졌다. 오랫동안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이었던 대광명전이 보물로 승격된 데에는 건물의 나이를 구체적으로 추측할 수 있는 목재의 연륜연대 측정 결과가 큰 영향을 미쳤다.

대광명전은 몸체에 비해 지붕이 커서 매우 장중한 인상을 풍긴다. 새 날개처럼 날렵하게 다듬어진 익공(翼工)이 무거운 맞배지붕을 단단히 받치고 있다. 17세기 목조건축 양식을 확인할 수 있는 부재 중 하나다. 공포의 배열과 형태로 볼 때 원래 지붕은 팔작지붕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 앞쪽 기단 양 귀퉁이에 앉아 있는 작은 돌짐승상도 눈에 띈다. 상상 속 신비로운 동물을 나타낸 조각상이라 해서 서수상(瑞獸像)이라 불리는 데 사자를 닮았다. 불교에서 사자는 두려움 없는 용맹함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상징이다. 그런데 외람되게도 쓰다듬고 싶게 귀여운 모양새다.



대광명전의 화려한 닫집과 불단 위에 모신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협시불인 관음보살상, 지장보살상.


보물 속의 보물

대광명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불단 상부의 닫집(불좌 위에 만든 집 모형)에 시선이 쏠린다. 건물과 불단 규모에 비해 닫집이 상당히 크고 정교하며 화려하기 때문이다. 불단 위에는 아미타불이 주불로, 좌우에는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이상하다. 대광명전(大光明殿)은 지혜의 빛으로 삼라만상을 비추는 비로자나불을 봉안한 곳이 아닌가.

현재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지금은 사라진 아랫녘의 법륜사에서 1939년쯤 모셔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전에는 이름에 걸맞게 비로자나불이 모셔졌는데 이 비로자나불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보물로 지정된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함께 봉안되었던 석가모니불은 현재 서울 삼청동 칠보사 목조석가여래좌상으로 있다. 역시 보물이다. 두 불상이 그대로 봉국사에 남아 있었다면 ‘보물 속의 보물들’이었겠구나 싶다. 하지만 고요하게 가부좌를 틀고 앉은 부처님도 인연 따라 움직이는 법, 옮겨진 지금의 자리가 편안한 자리이겠거니 한다.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인 봉국사 대광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대광명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역시 보물급 가치를 가진 소중한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이다. 네모난 얼굴에 가늘게 뜬 눈, 살짝 미소 짓는 듯한 입, 완만한 곡선의 삼도(三道), 두 어깨가 다 덮인 통견의 등의 표현이 돋보인다. 17세기 전반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당시 활동한 조각승 수연 스님이나 그를 잇는 조각승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불상 뒤편의 후불화로 걸린 봉국사 아미타불회도 역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경기도 유형문화유산이다. 1873년(고종 10)에 북한산 흥천사에서 그려져 봉국사로 모셔졌다는 글이 그림 하단에 쓰여 있다.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의 수인을 한 아미타불이 중앙에 앉았고 좌우에 지장보살 등 6보살이, 광배 뒤로 10대 제자가 있으며 아래위로는 사천왕, 호법신장들이 그려졌다. 안정적인 구도와 세부 묘사가 돋보이는, 19세기 경기 지역의 불화 특징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현재 봉국사 아미타불회도는 보존 처리를 위해 자리를 비워 모사본이 걸려 있다.



봉국사가 자리한 영장산 등산로


봉국사는 청춘이다

봉국사는 고려 현종 때 창건되고 조선 태조 때 중수했으며 조선 현종 때 대광명전을 지으면서 중창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강점기 때에도 봉국사 주지스님들의 취임자료가 남아 있어 폐사 없이 꾸준하게 중수·중창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36년, 본래 절 가까이에 있던 명선, 명혜공주의 묘가 고양시 서삼릉으로 천장 되었다. 그러나 두 공주의 위령천도재는 현재까지도 봉국사에서 매년 봉행되고 있다.



1967년 지은 삼성각


현재의 가람은 1960년대 후반 삼성각과 요사채가 지어지고 1977년 삼층석탑과 석등을 세우면서 조금씩 갖춰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규모가 된 때는 2017년 당시 주지였던 혜일스님(현 회주스님)이 대규모 불사를 추진해 휴휴당, 미타전, 안양루, 종각 등을 세우면서다. 봉국사 마당 가운데를 남북으로 가르면 북쪽은 옛 전각들이, 남쪽은 새 전각들이 들어차 있다. 현재 주지는 혜원스님으로, 사찰의 규모가 커진 만큼 무형의 가치를 확장하기 위해 다양한 포교 활동을 하고 있다. 2015년부터 운영한 불교대학은 고등학생부터 80대 어르신까지 폭넓은 연령대가 수강해 왔고 다가올 10월에 14기 수강생을 모집한다. 또한 2015년부터 ‘도심 속 보물 봉국사를 만나다’라는 이름으로 진행해 온 전통산사문화재 활용사업은 어린이 체험교육, 산사음악회, 효사랑 문화제 등으로 대중과 만나고 있다. 인근 대학인 가천대, 신구대의 불교동아리 ‘들이붓다’, ‘불똥별’의 소관 사찰도 봉국사다. 올 9월에 문을 여는 성남의료원 불교실 운영 역시 봉국사가 맡았다. 덕분에 절을 오가는 불자는 계속 느는 추세란다.

봉국사는 끝없이 변화하고 나날이 새로워지는 중이다. 해서 뿌리 깊은 천년고찰이지만 고목이 아닌 새 가지를 뻗어내는 청춘이다. 무상한 사찰을 뒤로 하고 다시 파도와 같은 길로 발을 내디뎠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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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봉국사

    주소/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로 79

    문의/ 031-755-0329

    누리집/ www.bongguksa.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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