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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쓰는사람

단원구의 김홍도, 상록구의 최용신

김홍도미술관과 최용신기념관을 둘러보며


안산시는 시흥과 접한 동쪽의 단원구와 서쪽의 상록구로 나뉜다. 단원과 상록, 나는 그 이름들을 좋아한다. 일제강점기 때 이 동네 저 동네 이름을 합쳐 만든 짜깁기식 지명도 아니고, 자연환경이나 지형지물을 반영해 지은 흔한 한자식 이름도 아니어서다. 두 지명은 각각 국민에게 익숙한 고유명사이고 안산시가 가진 유·무형의 유산이기도 해서 참 잘 지은 지명이라고 생각한다.


단원구의 단원은 불세출의 조선 화가 김홍도의 호다. 그가 안산 태생이라는 기록은 전해진 바가 없다. 그런데 조선 후기 문인이자 서화가 표암 강세황이 남긴 시문집 『표암유고』에는 예닐곱 살의 김홍도가 안산에 30여 년을 살았던 강세황에게 그림을 배웠다는 사실이 적혀 있다. “단원은 젖니를 갈 때부터 내 집에 드나들었다”와 같은 기록이다. 김홍도는 강세황에게 기본기를 배웠고 또한 그의 추천으로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김홍도가 그림을 배우기 위해 스승의 집으로 매일 먼 거리를 오갔을 리는 없고 지척에 집이 있어 한 가족처럼 지냈을 것이다. 하여 기록은 없어도 김홍도가 안산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을 가능성이 있다는 추측이 나온 것이다.



김홍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씨름>,《단원 풍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오늘날 다수의 사학자들은 김홍도 화첩에 김홍도가 직접 쓴 ‘김홍도 낙성 하량인 자호 단원(金弘道 落城 河梁人 自號 檀園)’이란 표기를 들어 낙성은 한양, 하량은 청계천 다리를 가리키므로 김홍도가 서울 출신이라고 주장한다. 스승 강세황의 집은 서울과 안산 두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화첩의 문구는 출신지가 아니라 거주지를 쓴 것일 수도 있으며 단원 이전의 김홍도 호인 ‘서호(西湖)’가 한강 서쪽을 가리키므로 안산일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이 주장이 확실하다면 단원 김홍도를 내세운 안산시의 모든 활동은 행정오류가 되는 셈이다. 그렇다고 후술할 일련의 ‘단원 행정’을 다 무를 수도 없는 일이다.



단원구가 아닌 상록구에 위치한 김홍도미술관 (사진=안산시 제공)


1991년, 안산시는 문화관광부가 지정한 ‘단원의 도시’로 명명되었고 2002년에 이르러 안산시는 새 행정구로 상록구와 함께 단원구를 설치했다. 1999년부터 안산시가 주관한 ‘단원미술제’는 전국 규모의 미술 공모전으로 매년 역량 있는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고 전시를 개최해 단원의 정신을 현대로 계승하고 있다. 2013년에는 노적봉 푸른 기슭 아래 김홍도미술관이 개관했다. 개관 당시에는 단원미술관이었는데 2022년 개명했다. 미술관은 <사슴과 동자>, <팔가조도>, <임수간운도> 등 김홍도의 작품 7점을 비롯해 <송하인물도>, <어하도>, <난석도> 등 강세황의 작품 24점, 그 밖에 김홍도의 아들 김양기, 심사정, 최북, 허필 등 조선 후기 화가들의 작품 여러 점을 소장하고 있다.


대중에게 익숙한 김홍도의 <씨름>, <서당> 등의 풍속화를 모아놓은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조선 후기 서민의 일상을 사실적이고 익살스럽게 담은 김홍도의 풍속화는 오늘날 현대인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김홍도미술관에는 풍속도 화첩 속 그림만큼 잘 알려진 작품은 없지만 김홍도의 화풍을 감상하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약초 캐는 동자가 산속에서 사슴을 마주친 상황을 묘사한 <사슴과 동자>나 바다 위 바위에서 초탈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신선 여동빈을 표현한 <여동빈도>, 과거 시험장의 풍경을 묘사한 <공원춘효도> 등은 작품을 보는 관람자가 연속적인 어떤 상황과 이야기를 상상하게 만든다. 그림 속 얼굴들은 또 어떤가. 드라마의 한 장면을 캡쳐한 것처럼 당장 대사를 뱉을 것 같은 표정이다. 그림 속 사람과 그들이 사는 세상이 조선시대라고는 하나 우리가 김홍도의 작품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림에 공감할 수 있어서다. 배우고, 일하고, 먹고, 쉬고, 그러면서 관계를 맺는 평범한 일상 속 희로애락이 화폭에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홍도미술관은 이름에 걸맞지 않게(?) 단원구가 아니라 상록구 관할이다. 상록구의 상록常綠은 1935년 발표된 심훈의 소설 『상록수』에서 왔다. 언제나 푸르다는 이름의 뜻 자체도 좋지만 소설 제목에서 행정구역명을 따온 점이 인상적이다. 소설 상록수는 농촌계몽운동, 즉 브나로드 운동이 일어났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다. 농촌 계몽대의 귀환 보고 대회에서 만난 수원고등농림학생 박동혁과 신학교 여학생 채영신이 주인공으로 이들은 각각 낙후된 시골로 내려가 아이들을 가르치고 부녀회를 결성하는 등 활발한 농촌 계몽 활동에 전념한다. 그러나 농민을 수탈하는 악덕 고리대금업자와 친일 지주에 의해 이들의 헌신적인 계몽 활동은 위기를 맞고 급기야 채영신은 죽음을 맞이한다. 소설 속 채영신은 소설가 심훈이 실존인물인 최용신을 모델로 창조한 캐릭터다.



상록수역에서 가까운 최용신기념관


농촌계몽운동이 절정에 다다를 무렵 협성여자신학교 하계기독교청년회 대표였던 최용신은 한국 YWCA와 인연을 맺고 1931년 10월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 지금의 안산시 본오동에 농촌지도원 자격으로 파견되었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천곡은 원래 샘골이라 불리던 작은 농촌 마을이었다. 이곳에서 최용신은 어렵사리 땅과 재정 지원을 받아 샘골 강습소를 세우고 한글, 산수, 재봉, 수예, 성서 등을 가르쳤다. 또 부녀회를 중심으로 위생 생활, 전축 장려, 농가 부업 증대를 위한 뽕나무 심기와 누에치기 등을 권장했다. 교육 환경이 조성되지 않았던 마을에서, 최용신은 주민들이 스스로 세상에 발맞춰 나갈 힘을 만들어줬다. 안타깝게도 최용신은 1934년 일본에서 유학하다가 각기병 악화로 6개월 만에 귀국했고 이듬해 25세의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최용신은 현재의 안산시 본오동에 샘골 강습소를 세우고 교육 활동을 했다.


『상록수』 속 채영신의 이야기는 최용신의 전기처럼 보일 정도로 비슷하다. 다만 소설의 파급력이 더 커서 오히려 실존인물 최용신이 채영신에게 가려 잘 드러나지 않았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 신상옥 감독의 영화 <상록수>가 나온 후로는 ‘연애나 하던 소설 속 인물’로 깎아내리는 왜곡도 있었다고 한다. 실존인물 최용신은 그의 업적과 사상을 알리고자 노력한 사람들 덕분에 199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상록구'는 심훈의 작품명을 따온 것으로 지하철역 또한 상록수역이라 이름 지어졌다. 


상록수역 3번 출구를 나와 10분만 걸으면 2007년 개관한 최용신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최용신 선생의 일생과 업적, 애국심을 알리고 기념하는 작은 기념관이다. 기념관 자리는 최용신이 세운 샘골강습소가 있던 곳이다. 주변은 공원으로 꾸며졌고 최용신의 묘소가 있다. 강습소 건물의 주춧돌과 최용신이 심은 향나무도 남아 보존되고 있다. 최용신이 주민에게 가르쳤던 것은 구체적인 이론과 실기가 아니라 배움 그 자체였다. 배우는 이유를 깨닫게 하고 배워서 얻는 힘을 체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이 그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 힘이 인생을 시들지 않게, 사는 내내 상록수처럼 푸르게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배우고 있는가? 아니, 배우려 하는가. 타성에 젖어 일하고 스마트폰에 빠진 여가를 보내진 않는지. 안산을 돌아보는 내내 생각이 많아졌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안산시 : 노동과 여가에 대하여 >에서 발췌했습니다.


세부정보

  • 김홍도미술관

    주소/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충장로 422

    운영시간/ 10:00~18:00, 월 휴관

    문의/ 031-481-0505

    최용신기념관

    주소/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샘골서길 64 상록수공원 내 최용신기념관

    운영시간/ 9:00~18:00

    문의/ 031-481-3040

글쓴이
걷고쓰는사람
자기소개
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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