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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쓰는사람

선감도의 악몽이 선감도의 꿈으로

안산 선감역사박물관을 둘러보며


남쪽 대부도에는 선감도가 있다. 시화방조제 건설 이후 대부도와 선감도는 한 몸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대부도 안에 선감도가 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선감도 남쪽의 불도, 탄도도 마찬가지다. 대부도 일대의 섬들이 그렇게 대부도로 뭉뚱그려졌는데 그래도 선감도는 그 이름이 꽤 알려진 편이다. 대부도와 마찬가지로 섬의 정체성은 잃었으나 여전히 선감도仙甘島로 불린다. 지명은 신선이 내려와 맑은 물로 목욕했다는 전설에서 유래했다.



안산의 부속섬들을 육지화시킨 시화방조제


그러나 현대에 와서 선감도는 신선이 머무는 아름다운 섬이 아니었다. 수많은 소년의 생명과 삶을 앗아간 지옥섬이었다. 애석하게도 오늘날 선감도의 인지도는 그 지옥섬이 쌓아 올렸다. 섬으로 끌려왔다가 ‘운 좋게’ 살아남은 소년들은 이제 노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트라우마는 수만 번의 썰물에도 씻기지 않았고 그때 빼앗긴 자유와 기회, 건강과 가족을 영영 돌려받지 못했다. 가해자는 국가다. 선감역사박물관은 2017년에 개관했다.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선감학원의 진실을 기록하고 알리기 위해’ 경기창작캠퍼스 안에 소규모 전시관을 꾸렸다. 정확히는 선감학원 터에 세운 경기창작캠퍼스에 더부살이하듯 교실 한 개 규모로 자리하고 있다. 박물관이라 해서 번듯한 단독 건물을 상상하고 찾으면 실망한다.


과거 선감학원 부지에 세운 경기창작센터


전시관에 들어서서 선감도로 끌려온 흑백사진 속 앳된 얼굴들을 훑고 있을 때, 한 어르신이 내게 다가왔다. 전시관 내 의자에 홀로 앉아 계시기에 관리자인가보다 했던 이였다. 그는 내게 이곳을 어떻게 알고 왔는지, 선감학원에 대해 아는지 물었다.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답하자 그가 잠시 설명해 드려도 되겠냐고 물었다. 해설 의사를 먼저 묻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나로선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선감학원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경기창작캠퍼스 내 선감역사박물관


선감학원은 일제강점기였던 1942년 선감동에 세워진 소년 강제 노동수용소였다. 1930년대 중반 탈농현상이 심화하고 서울로 인구가 집중되자 조선총독부는 빈민들을 외곽으로 강제 이주시키고 길거리 아이들을 감화시설로 위장한 외딴곳에 격리했다. 육지와 떨어진 섬에 지어 고립된 선감학원에선 서울에서 끌려온 빈민가 아이들이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이들은 20만 평에 달하는 농지를 맨손으로 일구었고 일부는 황국신민의 산업전사라는 미명 아래 탄광노동자로 보내지기도 했다.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의 아이들은 도망치다 바다에 빠져 죽거나 아무 풀이나 먹은 탓에 배앓이했다. 잔혹한 체벌은 일상이었다. 당시 선감학원의 적나라한 실체는 선감학원의 부원장 아들 이하라 히로미츠가 훗날 <아! 선감도>라는 자전소설로 밝히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그는 50여 차례 우리나라를 방문해 선감학원의 인권유린을 고발하고 진상규명운동을 했는데 일본인이 나서는 일제의 만행에 정작 우리 정부는 내내 입을 다물어왔다.


놀랍게도 선감학원은 해방 후에도 일제의 방식 그대로 운영되었다. 경기도로 이관된 선감학원은 1982년까지 운영되었고 1955년부터 폐쇄 때까지 작성된 원아대장에는 4,691명의 명단이 담겨 있다. 그 이전 기록은 없고 명단 또한 확실한 집계가 아니어서 이곳에 들어온 아이들은 5,000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정부는 도시를 깨끗이 하고 건전한 사회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수시로 부랑아 일제 단속을 벌였다. 부랑아는 부모 없이 떠돌아다니는 아이를 의미하지만 공무원들은 단속 건수를 올리고자 집과 가족이 있는 아이들마저 붙잡아 선도차에 태웠다. 평균 연령 8~13세의 아이들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가 선감학원에 수용되었다. 이들의 인적사항을 엉터리로 적었기 때문에 가족이 아이들을 찾거나 아이들이 가족을 찾는 일을 불가능했다. 이들은 배에 태워져 선감학원에 들어왔고 매일 강제 노역에 시달렸다. 일은 수만 가지였다. 염전에서 소금을 나르고 밭에 나가 풀을 벴으며 축사에서 똥을 치우고 낮에 딴 뽕잎을 늦은 밤 누에에게 먹이는 일도 했다. 엄청난 노동량이었지만 식사는 꽁보리밥에 김치 한 조각, 상한 젓갈뿐이었다. 아이들은 늘 굶주렸으며 갖가지 이유로 구타와 기합을 당했다. 탈출을 시도했다가 붙잡혀 맞는 아이들도 부지기수였고 간혹 탈출에 성공한 아이들도 있지만 물에 빠져 죽은 아이들도 있었다.



경기창작캠퍼스 앞 너른 잔디밭. 근처에선 아동의 유해 150여 구가 발굴되었다.


“제가 죽은 아이를 직접 땅에 묻기도 했어요.”

내게 선감학원에 관해 설명하던 어르신이 잠시 숨을 골랐다. 그는 13세에 인천에서 선감학원으로 끌려왔던 안영화 씨였다. 71세가 된 그는 선감학원에서 3년을 지냈다. 그 3년이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아들의 행방을 찾던 아버지는 안영화 씨가 선감학원에 붙잡혀 간 지 1년 만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1년 후 선감학원에서 재회한 형에게 들었다. 아버지를 입에 올릴 때 그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어떤 말로도 그를 위로할 수 없었다.

안영화 씨는 부랑아로 사회적 낙인이 찍혔다는 생각에 거의 한평생을 가족에게 얘기도 못 한 채 상처를 안고 지냈다. 그런 그가 선감학원 자리에 세운 선감역사박물관에서 끔찍했던 자신의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중이었다. 다시는 발 딛고 싶지 않았을 지옥섬에 들어와 생면부지의 이방인들에게 과거에 자행된 국가폭력을 알리고 있었다. 나는 피해생존자에게 직접 피해 실상을 듣는 이 시간이 피해자에게는 너무나 잔인한 시간이 아닐까 염려되는 한편,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 또한 헤아려야 했다.



과거 선감학원이었던 곳은 현재 경기창작센터로 지역민들과 예술가들의 창작, 문화예술 복합공간이 되었다. 


그러니까 대한민국 정부는 이제껏 선감학원 사태의 진상 규명과 피해자에 대한 사과를 한 적이 없으며 피해자의 잃어버린 삶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 선감학원의 실태가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건 2010년대 들어서다. 전술한 이하라 히로미츠에 의해 9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알려지다가 피해자들이 연대하고 민간에서 관심을 가지면서 2015년에서야 국회와 경기도의회에서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경기도는 도지사가 나서서 사과했지만 위로금과 생활지원금 지원을 경기도 내 거주자로 한정해 형평성 논란이 불거졌다. 현행법상 재정 운용 범위를 관할구역과 주민으로 한정하기 때문이라는 변이다. 정부 차원에서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만 2022년 국가를 상대로 한 피해자들의 소송에도 정부는 아무런 답변을 하지 않고 있다.


글·사진 여행작가 유승혜


※ 본 글은 '경기그레이트북스' 시리즈 중 제45권 『너머의 도시들- 경기 중부로 떠나는 시간여행』, <안산시 : 노동과 여가에 대하여>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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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석구석을 걷고 기록하는 일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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