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걷고쓰는사람

낮게 드리운 추모와 계승의 공간

광복80주년,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과 제암교회 일대를 돌아보며


벽안의 사내가 사력을 다해 다다른 조선의 마을에선

따스한 봄날이었다. 그러나 다급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는 그에게 봄날의 여유 따윈 없었다. 그 시절, 조선 땅에선 몹시도 낯선 얼굴이었던 백인 사내는 일본군의 눈을 피해 수원에서 화성으로 자전거를 타고 달렸다.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가 불편했던 그가 사력을 다해 다다른 곳은 화성 제암리(당시 수원군 향남면)였다. 이윽고 그는 형체를 짐작할 수 없이 불타버린 건물 잿더미와 슬픔과 분노에 휩싸인 조선인들을 마주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사흘이 흘렀지만 끔찍한 참상이었다. 제암리3·1운동 순국유적지 동쪽 끝, 그는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있다. 옆엔 타고 온 자전거도 세워져 있다.



제암리와 고주리에서 일어난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리는데 기여한 선교사 프랑크 윌리엄 스코필드의 동상


동상으로 재현된 이 인물은 프랑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1970). 캐나다에서 수의대를 졸업하고 1916년 조선에 입국해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과 위생학을 강의하는 선교사였다. ‘석호필’이라는 한국식 이름으로 조선인들의 3‧1운동을 돕고 만세운동을 해외에 알렸을 뿐만 아니라 제암리 학살 사건을 최초로 세상에 알렸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대한민국 독립유공자가 되었다.


3·1운동 순국유적지에 심은 단풍나무 한 그루의 사연

스코필드가 보고한 이 사건은 1919년 4월 15일 화요일, 제암리의 작은 교회당에서 일어났다. 일본군은 주민들을 교회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에 못질해 탈출을 막고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또 교회에 불을 지르고 주변 민가까지 불태워 무고한 양민 39명을 학살했다. 한 달 앞선 1919년 3월, 화성시 전역에서 일어났던 주민들의 독립운동에 앙심을 품고 일으킨 만행이었다. 그들은 시위 주도자를 기독교인, 천도교인으로 특정해 제암리 대학살을 벌이고 이웃 동네인 고주리에도 찾아가 천교도 교인들을 살해하고 시신에 불을 질렀다. 이때 독립운동가인 김흥렬과 그 일가 6명이 목숨을 잃었다.

스코필드의 사건 보고서에 의해 일본에 대한 해외 여론이 악화하자 일제는 제암리 학살의 주범인 아리타 도시오 중위를 군법회의에 넘겼지만, 형법에 규정된 범죄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죄 선고를 내렸다.



스코필드가 찍은 제암리 학살현장 사진


스코필드 동상 옆엔 기다란 설탕단풍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다. 스코필드의 손녀 리사 게일 스코필드(Lisa Gayle Schofield)가 2015년 우리나라에 방문해 심은 나무로 캐나다 국기의 단풍잎이 바로 이 나무의 것이다. 아름드리로 자라면 땡볕 아래 스코필드에게도 그늘이 생기리라. 그가 세상에 알린 참사 현장은 한 세기가 흘러 제암리3·1운동순국유적지로 명명되었다.


십자가 아래 세운 추모비

스코필드 동상에서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희생자를 추모하는 3·1독립운동순국기념탑 두 기가 세워져 있다. 한 기는 1946년 마을 입구에 세워졌던 최초의 기념비이고 다른 한 기는 1959년 제암교회 현장에 건립된 것으로 탑의 전면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친필로 삼일운동순국기념탑이라 썼다. 순국기념탑을 지나면 야트막한 언덕 위로 3·1운동 당시 학살된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95년 조성한 23개의 크고 작은 돌기둥이 서 있다. 조형물 옆 경사로를 따라 오르면 언덕 가장 높은 자리에서 희생자 23위 합동묘소를 볼 수 있다. 이곳에 모신 유해는 1982년에 발굴했다.



1946년 세워진 3·1독립운동순국기념탑


제암교회는 1969년에 재건했는데 일본 기독교인들이 사죄하는 의미로 건축비를 댔다. 이후 2002년에는 교회를 증축해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을 건립했다. 그로부터 22년이 흐른 지난해, 제암교회 앞에 개관한 화성독립기념관이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의 역할을 확장해 이어받았다. 현재 제암교회는 내부 공사로 한참 분주한 상황이다.



화성독립운동기념관에서 바라본 제암교회


어느 시점마다 교회 부지에는 가시적인 뭔가가 하나씩 세워졌다. 끔찍한 죽음, 숭고한 희생을 대대손손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현재와 미래를 살기 위한 방책일 것이다. 일본군의 학살이 있기 직전에도 제암리는 오늘날과 다르지 않게 예배당에선 찬송가를 부르고 주변에선 농사짓는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아갔을 것이므로.


낮게 드리운 추모와 계승의 공간

제암리 학살이 일어난 지 105년 만인 지난 2024년 4월 15일에 개관한 화성독립운동기념관은 그 건물이 지상에서 볼 땐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건축개요에 따르면 ‘오늘날 일상을 즐길 수 있는 지상의 공원과 과거 독립운동의 역사를 담아놓은 지하의 기념관’을 조성했으며 이는 방문자가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공간을 경험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연의 일부처럼 대지에 낮게 드리운 전시관은 도리어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지 않고 영속적인 관계로 잇는 메타포로 보이기도 한다. 높고 단단한 벽체 사이의 진입로를 따라 지하 전시관으로 향하는 걸음은 일종의 묵념과 같다. 나를 낮추어 낮은 곳으로 들어서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말은 삼키고 마음은 가다듬게 된다.



지하에 낮게 드리운 형태로 건립된 화성독립운동기념관


전시관은 크게 세 공간으로 화성 지역의 독립운동사와 화성 출신 독립운동가를 소개한 상설전시실, 주기적으로 전시가 바뀌는 기획전시실, 화성 독립운동의 가치와 의미를 알기 쉽게 전하는 어린이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현재 기획전시실에서는 화성시 매송면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문기 선생의 일대기를 다룬 <조문기의 시한폭탄은 아직 터지지 않았다> 전이 열리고 있다. 1999년 작고한 선생은 생전에 분단된 나라에서 친일파가 권력을 잡은 현실에 개탄하며 “나의 독립운동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며 “소원은 첫째도 둘째도 친일파 청산”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화성독립운동기념관 내부 전시를 둘러보는 국군장병들 


독립의 길, 정신문화의 요람

화성독립운동기념관에서 동쪽으로 약 12km 떨어진 우정읍 일대에는 화성3·1운동만세길이 조성되어 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조성된 이 길은 만세길 방문자센터(화수동길 163)를 출발지로 차희식 집터, 차병혁 생가, 개죽산 횃불 시위터, 백낙열 집터 등 3·1운동이 일어났던 역사적 장소와 독립운동가의 집터 등 총 15개 장소를 약 31km로 이었다. 도보 여행자들은 장소별로 인증 도장을 찍는 스탬프투어로 이 길을 걸으며 독립운동의 흔적을 더듬고 희생정신을 기리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 이 길은 우정읍과 장안면 안에 있지만 화성의 만세운동은 우정, 장안뿐만 아니라 송산, 사강, 향남, 발안 등 화성 전역에서 일어났다. (이하 일부 생략)


글, 사진 = 유승혜 여행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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