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오늘은 맑음

남양주_김병진 작가의 작업실






수원대학교 조소과 및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아트팩포리(2014), 나무 앤 컨템퍼러리 갤러리(2013), 영은미술관(2013) 등지에서 개인전을 개최한 바 있으며, ART Karlsruhe(독일, 2015), Los Angeles Convention Center(미국, LA, 2015), Group Show K-POP!, Cat Street Gallery(홍콩, 2014), New Horizon,7adam gallery(싱가포르, 2013) 등 다양한 기획전 및 단체전에 참여했다. 제1회 포스코 스틸아트, 대한민국 현대미술대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으며, 경기도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포항시립미술관 등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구상 조각에 대해 얘기하기가 쉬울 줄 알았다. 추상 조각 앞에서 그 고도의 압축적인 세계를 말로, 글로 펼쳐야 하는 중압감보다 분명 덜하리라 여겼다. 구상이 전하는 직접적인 세계가 모두에게 더 친절할 것이라 억측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관객과의 짧은 만남에서는 큰 무리 없이 오픈스튜디오가 진행되었다. 물론 사전 지식을 견주어 보는 일반적인 관객의 태도에 대해서는 좀 더 확장된 문제를 던지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작품에 하나씩 이름을 이입해 보는 시간이 짧게 축소되는 반면 작가는 세상에 흩어진 이 대상을 왜 다시 우리에게 환기시키는 것일까. 보이는 것보다 더 담겨 있는 의미를 찾고, 또 보는 것보다 더 한층 느낄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사전에 밝히기도 했다. 지금부터 나누는 얘기는 쉽게 발을 디뎠다가 어렵게 끝난 이야기이기도 하다. 혹은 어려울까 염려했던 시간을 찬찬이 풀어 나간 이야기이기도 하다.




명도에서 채도로


처음 작가 프리뷰를 작성할 때 김병진 작가에 대한 간략한 정리는 다음과 같았다.


김병진 작가의 지난 10여 년의 작품 활동의 궤적을 짚어 보면 흑백의 명도차로 구성되던 세계에서 작품 서로간의 채도차가 드러나는 세계로 변화했음을 알게 된다. 이전에는 구상 조각의 범주에 속하면서도 패턴의 반복이 자아내는 효과나 공간에서의 중첩이 만들어 내는 입체감과 같은, 예상컨대 실험실 조각가의 면모가 있지 않았던가 짐작해 본다. 그러다가 점차 노랑, 파랑, 초록, 분홍 등 달콤한 색색이 도입되고 꽃, 채소, 도자기와 같은 정물의 요소가 등장하다가 최근 몇 년 사이에는 인형이나 인형 가족을 선보이기도 했다.


두터운 포트폴리오와 이전 전시 자료들, 작품 이미지를 훑어보며 압축해 본 내용이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초기작에서 선보인 선(線)이 일궈 가는 조각에 매료되기도 했다. 2008년 전시 작품을 살펴보면 부조(浮彫)에 가까운 작품이 벽면과 만나 드리우는 그림자들과 어우러지며 자아낸 묘한 공간감이 근사했다. 구상을 향해 번져 나가기도 하지만 추상으로 압축된 결기도 느껴지는 작품들이었다. 외양적으로는 2009년 전시 작품부터 현재 작품에서 드러나는 작업의 방식을 볼 수 있다. 따라서 변화의 지점이 저 무렵이구나 짐작하는 정도다.



〈Pottery_Love〉, 76×82×13㎝, Steel, 2014


LOVE.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가 작품에 주되게 기입하는 단어로서, 얽힌 이 단어들은 입체를 이루어 조각이 된다. 그는 작가로서의 이력에서 다양한 크기의 작업들을 면으로 처리하는 방식에서부터 전방위에서 감상할 수 있는 작품까지 한정 없이 펼치고 있다. 명도차의 작업 세계에서 채도차의 작업 세계로의 이행이 어떤 계기로 변화하였는지 그의 이력에서 당연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김병진 작가의 답변은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늘 명쾌하고 경쾌했다. 그는 결혼, 출산, 육아와 같은 생활 세계에서의 삶의 변화가 작업 세계의 변화를 낳았다고 답했다. 이 담백한 답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짧은 만남이지만 김병진 작가는 선택과 집중, 판단과 실행이 선명한 이로 느껴졌다.




충전된 무대 위의 수사(修士)


이번 오픈스튜디오는 작업실을 새로 짓고 옮겨 온 후 첫인사와 같은 의미에서 마련되었다. 바쁜 와중에도 손님맞이에 공을 들이는 김병진 작가에게 송구스러운 마음이 적지 않았다. 세 동으로 나뉘어져 지어진 작업실에서 한 동은 오랜 후배이자 동료인 장세일 작가의 공간으로 채워졌고, 한 동은 본격적인 작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처음 방문에서는 한참 대형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한 동의 채비와 관련해서는 소년처럼 밝히는 포부에 궁금함이 커졌다. 이곳은 전시 공간으로 꾸며질 예정이며 복층의 공간에는 그간 수집해 온 피규어를 중심으로 한 조형적 오브제들이 배치될 것이고, 무엇보다 작업을 구상하는 자기만의 공간이 꾸려질 것이라고 기대를 안고 얘기했다. 아직 그 공간에서 본격적으로 은밀하게, 또 자유롭게 작품 세계 구상을 시작하지는 않았으나 이미 그의 머릿속 한편에는 그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설레어 보였다. 무엇보다 그가 그리고 있는 작업실의 청사진에는 김병진이라는 한 사람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꿈이 그려지는 듯했다.




두 번째로 작업실을 방문한 때는 오픈스튜디오 날이었고 그전에 분주하게 작품 제작 과정으로 가득 찼던 작업실은 말끔하게 정리되어 비어 있었다. 대신 비어 있던 전시 공간은 새롭게 작품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비움과 채움이 진행 중인 새 작업실, 이곳에서 아직 여백인 곳에서는 상상력이 싹텄고 작품으로 채워진 곳에서는 중견 작가로 걸어온 켜를 이해하도록 도왔다. 


수차례 오픈스튜디오를 준비하며 이 자리를 준비하는 많은 작가들을 만났지만 김병진 작가가 오픈스튜디오를 준비하는 태도는 남다른 면이 있었다. 오시는 손님들에 대한 응대의 태도가 단호하면서 다정했다. 물론 모든 작가가 손님맞이에 신경을 쓰고 공간을 쓸고 닦으며 정비하고 약간의 긴장과 다소간의 기대를 갖는 모습을 보아 왔다. 그렇지만 김병진 작가만큼 섬세하게 자리를 준비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오픈스튜디오라는 이것도 일정 정도는 사람이 만나서 벌어지는 일이라 사람 속에서 오는 어느 정도의 가변적인 상황을 그때그때 대처하곤 하는데, 김병진 작가의 경우는 미루어 말해 보자면 수사(修士)와 같은 자세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오시는 분들에게 모시는 이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준이 명확했다.


작가에게 부담을 상쇄하기 위해 최대한 기획진에서 준비해 온 일들이 그에게는 응당 손수 해야 하는 일이라 여기는 면모가 있었다. 차를 대접하기, 따뜻하고 달콤한 과자를 내어놓기 등 혹자는 누구든 하면 되는 일 아닌가 하겠지만 그에게는 아니요, 제가 대접해야 하는 일이예요라는 선명한 입장이 있었다. 무엇보다 작품을 두 점 준비하여 현장에서 두 사람의 관객에게 전하는 마음 씀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세속적인 마음으로는 작품 가격을 들으면 깜짝 놀랄 텐데 그는 그런 얘기가 세어 나오지 못하게 단도리를 했다.





다과와 작품 선물만큼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엇보다 말끔하게 정리된 작업실이었다. 여러 어시스턴트가 분주히 대형 작업을 진행하던 작업실은 마치 앞으로 주어질 다른 과업까지 비어있는 그 상태로 충전을 진행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무슨 대수일까 싶은 이들도 있겠지만 노련하게 연출된 하나의 무대로 보였다. 오직 그 넓은 공간을 관객과 본인의 무대로 만들어서 작가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발언하고 관객은 경청하는 짧은 시간을 꾸리는 모습에서 생활 세계를 꾸려 가는 따뜻한 사람의 면모와 또 그 생활 세계를 채우는 치열한 작가의 지난 삶이 잘 어우러지는 장면이 연출됐다.





‘구성된’ 세계에서 살아가기


명품 로고나 기업 브랜드, LOVE와 같은 기호가 병합된 작품은 친숙한 형상을 구축하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누구에게나 쉽게 다가간다. 초기에는 이 기호나 로고에 알레고리를 혼합하며 의미 가치가 지니는 바를 교란하기 위한 전략도 포함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점차 이 전략을 소거하며 지금의 방식으로 정비되었다. 김병진 작가의 작품은 수작업의 흔적을 철저하게 지우는데 마치 공장 생산품처럼 마감 자국마저 철저히 지우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는 점점 번다함을 지워 가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선택과 집중, 판단과 실행이 선명한 이라고 앞서 밝혔던 이유가 그의 이런 작업의 방식과도 결을 함께한다.


그가 이 행보를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생활 세계에서의 변화는 그도 짚은 부분이다. 설명에서 단편적으로는 작품을 통한 상호 교류의 지점을 밝히기도 했다. 돌이켜 보니 생각보다 많은 단서를 전해 주었는데 그 방식이 작품을 방대한 언어로 다시 풀어내어 설명하는 데 공들이기도 하는 작가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말을 아끼고 주로 사실에 집중했다. 작품은 조형에서 점점 더 대단히 명징한 세계를 구축해 가는데 이 명징함이 과연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과한 명징함은 오히려 불가능한 세계에 대한 역설일까. 문득 최근 미술 장터라는 국가 주도 사업에서 가장 각광을 받고 팔렸던 작업들이 명품 로고가 곁들여진 작품들이었다는 얘기가 떠오른다. 백화점이나 유동 인구가 많은 지역 공간에서 벌어졌던 미술 장터는 적극적 소비의 욕구가 있는 이들이 지나다니는 문턱에서 소비의 터널 혹은 소비의 발구름판과 같은 역할도 수행했다.




많은 이들은 상품 소비가 아니라 기호가 소비된다는 20세기의 일갈에 수긍한다. 현재 미술이 유통되는 구조 또한 시장과 미술 제도의 변방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격적으로 소비의 습속을 읽고 그 욕망을 분석해야 하며 그 시장으로의 편승을 더 이상 저잣거리의 일들로만 한정시킬 수 없다. 예술이 성스러움에 복무하던 시대도 아니지만 그렇기 때문에 속세를 향해 전면 이행했다고 말하는 것도 오류다. 시대 이행은 가치 매김의 무게추가 이동했을 뿐 과거의 가치는 동시대에서도 혼재되어 누군가의 마음을 홀리고 있다. 이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치를 떨 게 아니라 구성된 세계를 보고, 구성된 세계의 찢겨져 있음을 목도하고, 세계에 대한 무수한 단언과 매끄러움이 가당치 않음을 분별해 내야 한다. 이 명민함에서 비롯한 (하나의) 전략이 김병진 작가의 작품이라면 어떨까. 굳이 더 세계의 혼란스러움을 작품의 혼란스러움으로 재현할 필요가 없다. 말끔하게 내어놓은 그의 작품에서 누군가는 자신을 홀린 기호의 매력을 읽을 수 있으며, 여전히 아끼는 대상물의 자취를 보기도 하고 희미해져 가는 삶의 가치를 되살릴 수도 있다. 혹은 소비되는 기호의 얼개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고 조형의 세계에까지 전염된 상품 생산의 자취에 못마땅할지도 모른다. 그 어떤 감상도 가능한데 다만 하나의 입장만을 내세우는 인상 비평도 구성된 세계에서 구성된 인간이 취하는, 이것 또한 하나의 구성물임은 받아들여야 하며 이제 이 받아들임에 대해 생각해야 하는 게 우리의 몫이다.



                                                             〈Toy_Love(131120)〉, 60×53×83㎝, Steel, 2013



내일 예보


종종 몬드리안의 추상 작품에 대해 얘기할 때 그가 그린 나무 작품들을 함께 보여 주곤 한다. 나무 연작에서는 익히 알고 있는 아름드리나무가 줄기 덩굴의 엉김으로, 그 엉김이 가로 세로의 직조로, 그리고 어느새 익숙한 면 분할의 추상 세계로 이행해 간다. 몬드리안은 평생 자기 갱신에 주력했는데 몸에 익힌 화풍은 곧 두고 떠나야 할 세계였다. 크게 이전과 지금으로 김병진 작가의 여정을 파악했지만 그 안에서의 여러 분절에 대해서도 모르는 바 아니다. 명료하고 간명하게 느껴졌던 그의 세계가 어디로 향할지 이제 또 궁금해진다.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세계의 무수한 밑그림은 아이처럼 얘기하던 바로 그 공간, 어제와 오늘의 작품이 전시된 작업실 중에서도 전시동 바로 그 2층, 그 복층에서 한낮의 작업이 어느 정도 정리된 어둔 밤, 혹은 분주한 전시 일정에 맞춰 마무리한 작품이 떠난 날에 이루어지겠지. 천진한 오늘의 작품을 두고 ‘오늘은 맑음’이라고 짚었는데 내일이 흐리거나 비가 내릴 예정이라는 일기 예보가 아닌, 오늘 이 맑음을 이루는 무수한 편린도 헤아린다. 습도, 바람, 체감, 강수량, 기압, 시정 등. 명료함에 섞여 있는 많은 요소들이 있음을 목격했고 명료하게 갈무리되어 있을수록 더 많이 곱씹고 그 층들을 더듬어 보아야 한다는, 나의 다짐을 다른 이들에게도 전하고 싶다.


글_김현주(독립기획, 미술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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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