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우리를 발견하는 시간

용인_김명식 작가의 작업실




김명식 작가는 중앙대학교 회화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수십 년 동안 동아대학교 미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했다. 2004년 롱아일랜드대학 연구교수, 2010년 규슈산업대학 연구교수를 지내면서 미국과 일본 전역에서 전시회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국내외 활동을 이어왔다. 1984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70여 회에 달하는 개인전을 열고 2008 싱가포르 아트페어, 2010 상하이 아트페어, 2015 고베 아트페어 등 수백 회의 단체전에 참여했다. 월간 『미술세계』작가상(2008년)과 장리석 미술상(2014년)을 수상한 김명식 작가의 작품은 서울시립미술관, 부산시립미술관, 리움 등 다수의 전시장과 기관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부산 동아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오랜 교수 생활을 마치고 2년여 전 용인으로 터를 옮긴 김명식 작가는 그 어느 때보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더 이상 강의와 작업 활동을 병행하지 않아도 되는, 오롯이 그림 생각만 할 수 있는 지금의 시간이 좋다는 작가의 말이 그의 만족한 표정에 더해져 듣는 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진다.



 



김명식 작가가 용인에 정착한 후 바뀐 것은 시간의 쓰임새만이 아니다. 그의 작업실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이 주는 생생함이 작업에 있어서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주변에 온통 녹색이니 자연스레 그렇게 되더라고요. 왜 예전의 청녹 산수화에도 초록색을 주요하게 사용하잖아요. 어떻게 보면 한국 특유의 청색이 우리의 정서를 가장 잘 대변해 주는 게 아닐까 싶어요.” 13년째 이어 오고 있는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시리즈의 배경에 이전보다 녹색 계열의 색을 많이 쓰게 된 이유를 들으며 새삼 그의 작업실 밖 풍경을 내다보게 된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매일 아침마다 작가가 마주했을 풍경의 순간이 눈앞에 그대로 펼쳐진 까닭이다.



                                                              〈East Side Story 2006-A2〉, 227.3×181.8㎝, Oil on Canvas, 2006 


김명식 작가의 대표적인 시리즈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작가가 2004년 미국 뉴욕에 체류하는 동안 탄생했다. 뉴욕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작가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차창 밖으로 보이는 집이었다. 서로 다른 형상들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에서 여러 인종들이 한데 어우러진 뉴욕의 얼굴을 발견한 것이다.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작가는 페인팅 나이프를 사용해 절묘한 마티에르를 형성하는데, 수많은 작품 중 그 어느 하나의 집도 같지 않다는 게 놀랍다. 이는 작가가 집의 형상을 통해 인간상을 표현하고자 우리 안에 숨겨져 있는 얼굴을 끊임없이 발견해 낸 결과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그 어디에도 같은 얼굴이 존재하지 않듯이 무심히 보면 엇비슷해 보이는 집들 가운데도 고유한 표정이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탄생한 뉴욕은 김명식 작가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니는 공간이다. 한국에서 교수 생활을 성실히 이어 나가는 도중에도 개인 작업을 향한 열정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찾았고, 뉴욕이 바로 그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1999년, 밀레니엄을 앞두고 뉴욕을 방문했던 작가는 마침 휘트니미술관에서 《The American Age》라는 전시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뿐 아니라 세계 각국에서 세기의 종말을 이야기하던 시점에 미국의 대표 미술관은 ‘미국 미술의 힘’에 대해 설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90년대 말 뉴욕 소호는 뉴욕 전체 갤러리 중 절반에 해당하는 500여 개의 갤러리가 밀집해 있을 정도로 미국 미술의 호황기를 이끄는 중심지였다. 뉴욕 미술계의 역동성과 발전 가능성에 눈뜬 작가는 한국에서의 안정적인 작업 환경에 안주하지 않고, 미국에서 새로운 도전을 감행했다. 그 결과 롱아일랜드 대학 교환 교수로 있던 2004년에만 뉴욕, 마이애미, 밴쿠버에서 5회의 개인전을 여는 등 열정적인 행보를 선보였다.


뉴욕에서의 생활과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가 맞닿아 있는 것처럼 작가가 여러 차례 일본을 방문하면서 느꼈던 감흥은 작가가 직접 집필해 2015년에 발간한 『일본 수채화 여행』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 실제 작가가 처음 일본 땅을 밟았던 것은 단체전에 초청받았던 1976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당시 작가는 한국과 비교해 발달해 있던 일본 사회에 적잖이 충격을 받고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일본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오랜 관심은 그가 2010년 규슈산업대학에서 연구 교수로 재직하던 기간에 빛을 발했다. 후쿠오카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일상과 오사카, 고베, 동경, 그리고 삿포로를 여행했던 순간을 수채화로 옮긴 후 ‘규슈에서 홋카이도까지’라는 타이틀의 순회 전시를 개최하였다.


되돌아보면 김명식 작가는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시리즈 이전에도 〈고데기〉 시리즈를 통해 줄곧 삶의 터전을 향한 따스한 시선을 보여 주었다.(‘고데기’는 작가가 어린 시절 나고 자란 ‘고덕리(高德里)’를 지칭하는데, 당시 동네 어른들이 ‘고덕리’를 발음한 그대로를 따온 것이다.) 작가가 기억하는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 지역인 ‘고데기’는 지금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어린 작가의 시선을 가로막는 고층 빌딩 대신 사방에 논과 밭이 펼쳐져 온통 붉고 푸르렀다. 당시의 강렬한 색채와 자연적 형상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작가의 마음속 깊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오래된 각인은 작가가 머무르는 또 다른 공간과 공명하여 새로운 색을 만들어 냈다.


“왜 용인에 온 다음부터 내가 그린을 더 많이 쓰게 된다고 했었죠? 아마 여기 분위기가 그래서 그런지 이전보다 정열적인 색을 선택하게 되는 것 같아요. 표현도 더 자연스러워지고. 1년간 일본에 머물렀을 때 그림을 보면 상대적으로 차분한 톤이었고, 미국에 있을 때는 화려한 것에 더 끌렸어요.”


작가의 말처럼 머물고 있는 시공간의 무늬가 작품 안에 물들어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작가 스스로 매개가 되어 그가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이 화폭 안에 담긴다. 그렇게 자연의 색을 입히고 사람 냄새를 쫓았던 김명식 작가의 작품 세계를 통해 우리는 그의 고향의 흔적뿐 아니라 타향살이의 생경함과 마주하게 된다. 한적한 시골 풍경이 주는 이름 모를 친근함을 느끼고 서로 다른 크기와 색의 집 모양에서 존재의 다름을 확인하면서 작가의 심상 안으로 침잠한다.


 


누구나 완벽한 사람이 없듯이 나 역시 나의 그림에 만족을 못 한다.항상 어딘가 부족하다. 정말 기분 좋게 딱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다음 날 보면 아니다.그러나 어쩌랴. 그렇게 부족한 대로 살아왔고 나의 능력이 거기까지인 것을…… 다만 그 부족함을 메우기 위해 오늘도 최선을 다할 뿐이다. 혹자는 나의 작품에 대해 “참 쉽게 그린다.”라고 한다. 물론 쉽게 그린다. 한번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거침없이 붓이 나간다. 그렇게 탄력을 받은 그림이 끝났을 때 가장 기분이 좋다.

글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글 쓰다가 막혀 지우고 다시 쓰고 하다 보면 제대로 된 글이 안 나오듯이 말이다. 그러나 쉽게 그린 그림과 편하게 보이는 그림은 다르다. 그들은 편하게 보이기 위해 그동안 버려진 수많은 시간들을 생각하지 않는다.

– 작가 노트 중에서


 


집과 마을이나 자연 풍경과 같이 보는 이에게 편안함을 주는 김명식 작가의 그림은 우연을 가장한 기다림의 산물이다. 붓을 한번 휘둘러 줄기차게 써 내려간다는 뜻의 옛말(‘일필휘지(一筆揮之)’) 뒤에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에 대한 경의가 숨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쉽게 그린 것처럼 보이는’ 자연스러움에 도달하기 위해 작가가 차곡차곡 쌓아 올렸을 반복의 시간에 새삼 고개가 숙여진다.


한국에 근거지를 두면서도 일본과 미국, 중국 등지에서 수십 차례 전시를 하며 현지 관람객과 교류를 마다치 않는 김명식 작가의 내일은 새롭게 계획하고 있는 일들로 가득하다. 정년이라는 업(業)에 있어서 중요한 챕터를 뒤로한 지금, 작가는 화가로서의 일상으로 회귀하려 한다.




“이제 마음의 짐을 벗어버린 듯한 느낌이에요. 그전까지는 안식년이나 방학 때도 항상 ‘뭘 해야겠구나’하고 그 다음 단계를 생각했거든요. 완전하게 자유롭기 어려웠달까. 물론 작업을 계속하긴 했지만 그 시간에도 나를 끊임없이 찾는 사람들이 있어서 완전하게 집중하기가 어려웠던 게 사실이에요. 이젠 실컷 그리고…. 정말 원 없이 그리고 싶네요.”


인자한 표정을 따라 깊게 패인 얼굴 주름 사이로 상기된 빛이 반짝인다.



글_강보라(독립기획자, 영상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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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