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옆집에 사는 예술가

연결고리의 집

수원_홍인숙 작가의 작업실



수작사전: 말과 손, 그리고 술잔을 오가며 


절망스러웠다. 작가는 달변이었고, 달필이었다. 내게 남겨진 자리가 없었다.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써야한단 말인가. 작가님, 이건 반칙이에요. 마음의 말이 밖으로 들킬까 내심 초조했다. 허망하게도 작가는 내 속내를 눈치 챈 듯한 눈빛을 보냈다. 편하게 하심 돼요, 편하게. 모든 거 다 내려놓고 우리 하루 정말 편하게 보내 봐요. 새롭게 둥지를 튼 작업실을 세상에 처음 내놓는 날이 전혀 편할 리 없는데, 작가는 오히려 불안해하는 내 어깨를 도닥였다. 신기하게도 쫓기었던 마음과 졸아들었던 시간이 순간 멈춰버린 듯 했다. 작가와 작업실만이 오롯이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n가지의 빛깔로 수놓아진 삶과 공간이 펼쳐졌다. 잠시 실례해도 될까요? 말갛게 닦은 머리를 안고 작가(만)의 영역에 잠시 발을 들였다. 수작. 짧지만 강렬했던 홍인숙 작가와의 만남을 이 안에 포개어본다. 같은 음절 안에 여러 뜻이 담긴 이 단어처럼 독자들이 작가의 여러 빛깔을 만나기를 바라며.





제1장 서로 말을 주고받음


수원 토박이인 작가는 수원에서 나고 자라 줄곧 수원에서 작업을 해왔다. ‘시골’과 다를 바 없었다고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동네에는 미술학원 하나 없었지만, 작가는 ‘학원’이 아닌 ‘사람’을 통해 그만의 미술을 빚어나갔다. 작은 학교와 큰 자연을 벗 삼았던 작가의 유년은 스케치북 한 편에 남아 오늘의 화폭 안으로 소환되기도 하였으니 ‘비’미술의 과거야말로 ‘미술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몇 번의 만남을 거듭하면서도 작가는 쉽사리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청하지 않았다. 대신 작가는 정치와 여행, 그리고 사람과 일상과 관련한 화두를 던졌고, 나 또한 이런 저런 말들을 덧붙였다. 우리의 언어가 던져놓은 그물에 건져질 때쯤, 작가는 넌지시 몇 권의 책을 내밀었다. 저에 대해 조금 더 아실 수 있지 않을까 해서요. 식전주를 마신 후 한껏 식욕이 달아오른 것 마냥 책을 덥석 집어 들었다. <대화(大花)를 만드는 대화(對話)>. 작가가 참여했던 전시의 제목과 같이 그와 나눈 여러 말들 가운데 큰 꽃이 피어있었다.



  


제2장 손으로 만듦


작가는 신풍동 작업실 때부터 지금의 작업실 주변을 기웃거렸다고 한다. 더 조용한 곳으로, 더 넓은 곳으로 작업실을 옮겼으면 하던 작가의 마음이 멈춘 곳이 바로 화성지구였다. 문화재 옆에 산다는 게 보통일은 아니죠. 화성이 훤하게 보이는 얼마나 근사하냐고 감탄하는 와중에 작가는 넌지시 고충을 토해냈다. 안 되는 일투성이에요.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되고. 그래도 그 정도 수고를 치룰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는 듯했다. 정갈하게 정리해놓은 정원과 그 전 주인 때부터 내려져왔다는 감나무를 가꾼 모양새가 백 마디의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이 주변 집들에는 대부분 어르신들이 살고 계세요. 오래 전부터 이 동네 고유의 분위기를 지켜온 분들이죠. 저는 그분들이 늘 해 오셨던 걸 따라하는 것뿐이에요. 식물을 동무삼아 골목을 이웃삼아 그렇게 작업실 안팎 곳곳에 작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었다. 늦가을 밤 마당에서 화성에 걸터앉은 둥근 달을 보면 얼마나 환상적인 줄 아세요? 집을 고친다는 게 이렇게 고된 일인지 절실히 깨달았다고 하면서도 작가는 자랑을 멈출 수 없었나보다. 자랑하고픈 마음이 하늘에 닿았는지 작가의 작업실 문이 열렸던 11월 4일 밤에도 그 달은 어김없이 작업실 마당에 잦아들었다.


 


제3장 우수한 작품


작가에게 있어 작업실은 타인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공간이라고 설명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작업실 안에 들어와 이미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 했다. 그래서 ‘행사’처럼 하고 싶지 않아요. 어떤 식의 오픈 스튜디오를 마음에 품고 있느냐는 질문에 작가는 의미 없는 마주침만이 부유하는 행사가 아니라, 서로의 이름을 불러주고 서로의 존재를 보듬어주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고 답했다. 수원에는 문화행사가 넘쳐나요. 하루가 멀다 하고 행사가 있어요. 제가 보기에 수원사람들은 문화행사라고 하면 피로감을 느낄 정도에요. 작가는 ‘문화행사 과잉의 시대’ 때문에 되려 ‘문화’가 실종되어가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였다. ‘행사’의 대대적인 규모와 과장된 명분에 ‘진짜’의 문화, ‘진짜’의 만남이 가지는 의미가 흐려져 간다고 보았다. 그런 까닭인지 작가는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한 사람 한 사람을 더 깊이 만나고 싶다고 했다. 스쳐지나했다. 빼어난 하나의 작품을 위해 숱한 좌절의 밤을 지새우는 것과 같은 심정으로 말이다.




제4장 작위를 줌


11월 4일 오후 5시, 홍인숙 작가의 오픈스튜디오에는 ‘연결고리’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연결고리의 집’이란 부제를 붙인 당일의 오픈스튜디오는 여느 오픈스튜디오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우선 작가가 자신의 작업의 실마리, 즉 연결고리가 되는 이들을 몇몇 초대하고 그들이 또다시 그들에게 연결고리가 되는 누군가를 초대하는 방식으로 오픈스튜디오의 참여자 명단이 꾸려졌다. (물론 참여 신청을 통한 일반인들의 참여도 있었다.)




오픈스튜디오의 시작과 함께 참여자들은 작가와 함께 작업실 탐방에 나섰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홍인숙 작가의 작업실 1층 공간은 작은 갤러리를 연상시켰다. 탁 트인 공간 사이사이에 자리한 가벽이 공간을 적당히 분리해주었고, 진한 푸른빛의 카펫은 흰 벽과 대조를 이루며 깔끔한 인상을 자아냈다.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걸려있는 그림들은 세심한 조명 아래 설치되어 있었고, 낙서를 해도 무방하게끔 제작한 한 쪽 벽면에는 작가의 어린 조카가 그려놓은 낙서, 그림이 빼꼼히 선을 보이고 있었다.




작업실 지하에는 판화를 배우고자 하는 학생들을 염두 해둔 작업공간을 마련했다. 판화 작업의 단계 별로 별도로 마련된 공간에서 작업을 할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최근까지 습기제거작업에 매진하느라 구체적인 판화 교육 계획은 잡지 못했지만, 학생들이 자유로운 방식으로 판화에 접근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중이다.




작업실 투어가 끝난 후, 홍인숙 작가는 참여자들이 스스로 소개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했다. 우선 작가가 ‘연결고리’로 초대한 이들을 소개하고, 왜 그들을 오픈스튜디오에 초대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덧붙였다. 이어 홍인숙 작가의 ‘연결고리’로 초대된 참여자들은 다시 그들의 삶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연결고리’를 소개하였고, 다른 일반 참여자들 또한 오픈스튜디오에 참여하게 된 배경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 서로의 낯을 익힐 수 있었던 시간 덕분에 저녁식사 자리에서도 친숙한 기운이 자리했다. 거기에 수원 지역의 유명한 통닭을 잔뜩 사들고 방문한 작가의 가족들까지 가세해 한층 가족식사와 같은 분위기가 더해졌다.


저녁식사 후, 작업실 마당에는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었다. 홍인숙 작가의 연결고리 중 3팀이 ‘내가 떠난 이유’라는 주제 하에 각자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산티아고로 떠난 건축학도, 인도로 떠난 화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가 보여준 다채로운 이미지 덕에 듣는 ‘연결고리’들 또한 잠시나마 함께 그 여행지로 떠난 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3팀의 여행 이야기에 이어 홍인숙 작가는 청중이었던 연결고리들에게 ‘내가 떠나지 못한 이유’에 대해 물었다. 일상에 치어서 혹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 그러지 못했노라 답하는 이들에게 홍인숙 작가의 작업실에서의 반나절은 짧지만 달콤한 외유였을 것이다. 상대의 수고로움을 인정하는 징표로 주어지는 것이 작위라고 한다면, 11월 4일의 작위는 홍인숙 작가와 작업실에 모인 수많은 연결고리의 몫이다.






제5장 술잔을 서로 주고받음


오픈스튜디오를 마무리하고 나니 멀리서 수원까지 한 달음에 달려온 작가의 한 연결고리의 손에 따뜻하게 데운 뱅쇼(vin chaud)가 들려있었다. 쌀쌀해진 날씨 속에 야외에서 진행된 오픈 스튜디오에 지쳤을 법도 한데, 열 명 남짓한 이들은 자리를 뜰 줄 몰랐다. 오픈스튜디오를 통해 처음 보이는 이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누군가의 ‘연결고리’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 누구하나 소외되는 이 없이 하나의 대화에 참여했다. 작업실이라는 공간이 일면 작가만의 비밀스러운 공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작가가 불러들이는 수없이 많은 존재들을 위한 열린 공간임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이제 작업이 좀 깊어졌으면 좋겠어요. 인간적으로 더 성숙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고요. 언젠가 작가가 나직이 뱉었던 일상의 고백이 그날 밤 추위를 포근히 감싸 안았다.



글_강보라(독립기획자/미디어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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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이고 비밀스러운 창작공간이자 때로는 도전적이고 개방적인 실험의 장으로서 끊임없이 진화해 온 창조적인 장소, ‘예술가의 작업실’에 가 보신 적이 있나요? 《옆집에 사는 예술가》는 지역사회의 중요한 문화 자산인 ‘예술가의 작업실’에서 예술가의 일상을 공유하는 대중 프로그램을 통해 창작의 현장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활동해 온 경기지역 예술가들을 만나는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