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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경기지역 고려시대 발굴조사 성과 ⑦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경기지역 고려시대 발굴조사 성과


김영화 | 경기문화재연구원




|목차|

  Ⅰ. 머리말

   Ⅱ. 주요유적

   Ⅲ. 맺음말


Ⅱ. 주요유적


7. 무덤유적


1947년 개성 법당방 벽화분을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북한지역에서 왕릉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남한에서는 여주 상교리 상방하원석실묘, 강화 허유전 묘가 조사되었다. 1990년대 묘지석이 출토된 파주 서곡리 벽화묘를 비롯하여 고양, 용인에서 석곽묘와 토광묘가 조사가 이루어졌다. 규모에 따라 한 기 또는 수십 기의 무덤이 조사되었다. 고려시대 무덤은 석실묘, 석곽묘, 화장묘로 구분할 수 있으며 석실묘는 지배계층의 묘제로 개성지역과 강화도에 분포한다. 개성지역에서 조사된 고려 왕릉은 묘역과 봉분 매장주체부로 구분할 수 있다. 묘역은 능선의 남쪽 경사면에 석축으로 3∼4단 구분하여 장방형으로 조성하여 제1단에는 매장주체부인 석실과 곡장, 제2단에는 석등과 문인석, 제3단에는 무인석, 제4단에는 정자각과 비가 배치되는 구조이다. 봉분은 원형이며 하단에 12지상을 새긴 병풍석을 설치하고 그 주위 난간석을 돌렸다. 매장 주체부는 방형 또는 장방형으로 지하 또는 반지하식의 횡구식이다. 벽체는 가공한 장대석이나 할석을 수직으로 쌓았고 천장은 평천장으로 3매의 석재로 마감하였다. 입구인 남쪽을 제외한 3벽면과 천장에는 회칠을 하였으며 벽화가 그려진 것도 있다. 바닥에는 관대를 설치하였는데 1매의 대형석재, 2∼3장의 석재를 짜맞춘 것, 가장자리를 할석으로 돌리고 내부를 채운 것, 4매의 가공한 장대석을 돌린 것이 있고 유물받침대를 설치하고 관대와의 공간에 전을 깔기도 하였다. 입구는 남쪽 벽에 문주석을 세우고 문주석 사이에 문지방석을 놓았으며 바깥쪽에 1매의 대형석재로 막았다. 매장 주체부 축조는 후대로 갈수록 벽체와 관대 등 전반적으로 간략화하는 경향을 보인다. 강화도에서는 4개의 석실묘는 4기가 발굴 조사되었는데 규모나 형식면에서 개성지역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다만 석릉과 가릉의 천정부 위에 설치된 팔각구조물과 가릉의 지상식 석실 등은 특징적이다. 여주 상교리에서 조사된 상방하원석실묘는 지금까지 확인된 사례가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석곽묘는 판석조와 할석조로 구분되는데 판석조 석곽묘는 관료 계층의 묘제로 강화지역 지표조사에서 다수 확인되고 있으나 발굴조사된 것은 파주 서곡리 벽화묘와 강화 허유전 묘가 있다. 할석조 석곽묘(이하 석곽묘)와 토광묘는 1980년대 여주 매룡리 용강골 고분 발굴조사 이래 1990년대부터 주로 조사되었으며 발굴조사가 증가하면서 유적 사례를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전역에서 확인된다. 주로 복합유적에서 다른 시기 유구와 함께 확인되는 수가 10여기 이내이며 수십 기씩 집중되는 경우는 드물다. 석곽묘과 토광묘는 특징으로 묘역이 설치되는 것, 석단과 곡장이 설치된 것, 바닥에 요갱이 있는 것, 묘역의 상부에 적석한 것, 내부 관대로 기와를 사용한 것 등 다양하다. 주요유적으로는 2000년대 이전에 조사된 여주 용강골, 고양 중산동유적, 용인 마북리·좌항리 등을 비롯하여 안산 대부도 육곡고분군, 용인 보정리 소실유적·장리·공세동·창리, 평택 수월암리, 파주 운정신도시, 여주 상거동, 이천 증포동, 화성 장지리·삼존리·우음도, 수원 광교지구, 김포 풍무동 등이 있으며, 인화 ∼ 강화간 도로건설구간에서 토광묘 160여기가 조사되었다. 화장묘는 장례방법으로 묘제로 본다면 2차장일 가능성이 많은 옹관묘로 볼 수 있는데 옹관묘는 평택 궁리에서, 석곽에 옹관을 안치한 석곽옹관묘가 안성 매산리 유적에서 확인되었다.


강화도 고려 왕릉(사적 제369호)


강화도에는 왕릉 2기, 왕비릉 2기, 왕릉급 석실분인 능내리 석실분이 알려져 있으며 2001년에 석릉(희종, 1204∼1237), 2004년에 가릉(순정태후, ?∼1244)과 곤릉(원덕태후, 몰년미상), 2006년에 능내리 석실분 등 4기가 발굴 조사되었다. 왕릉의 축조는 가릉을 제외한 3기는 개성지역 고려 왕릉의 일반적인 특징을 따르고 있는데 묘역은 2∼3단으로 조성되어 각 단에 석상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며 지상식인 가릉 외에 3기는 지하식이다. 호석으로 판단되는 개석 상부의 석구조물은 개성지역에서는 12각만 확인되었으나 강화도에서는 8각(가릉, 석릉), 12각(곤릉, 능내리 석실)이 확인되는데 이를 불교적인 요소로 해석하거나 신분상 반영 또는 간략화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벽면은 가공한 장대석(가릉, 능내리 석실)이나 할석(곤릉, 석릉)을 이용하여 축조하고 회칠로 마감하였다. 입구는 남쪽 벽면으로 양 끝단에는 문주석을 세우고 문주석 사이 바닥에 문지방석을 놓았으며 대형 판석 1매로 막았다. 입구 쪽 석실 좌우 벽석 최상단과 최하단에는 목재를 가로로 걸어 나무문을 달았거나 휘장을 드리웠던 추정되는 방형 홈을 만들었다. 관대는 모두 가공한 장대석 돌려 4면을 만들고 내부에 전(곤릉)을 깔았거나, 회칠(가릉), 돌을 깔고 회칠(능내리 석실)을 하였다. 가릉의 구조가 다른 3기와 차이가 있는 것은 말단부의 평지에 조성된 입지의 취약성을 극복하고자 경사면의 최상단에 지하식으로 조성한 곤릉, 석릉, 능내리 석실과 달리 매장 주체부를 지상에 설치하고 할석으로 넓게 봉분을 축조하여 언덕처럼 보이는 효과를 고려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곤릉과 능내리 석실분의 전면에서 건물지가 확인되었는데 곤릉 건물지는 정면 3칸으로 중앙 어칸을 따라 돌출된 부분이 이어지고 있어 '정자각'으로 추정되며 능내리 석실분 건물지는 정면·측면 1칸인 적심식과 답도가 있다.


석릉, 가릉, 곤릉, 능내리 석실분은 모두 몇 차례 도굴되었음에도 금속류, 옥장식품, 청자류, 기와류 등 다양한 유물이 다량 출토되었다. 능내리 석실분에서는 동서남북 4방향에서 도기호 진단구와 건물지 출토 취두와 막새가, 가릉 석실 내부에서는 당송대 동전 100점과 옥장식품이, 곤릉과 석릉에서는 삼족향로와 최상품의 청자가 다량 출토되었다. 또한 강화 곤릉 및 능내리 석실분 건물지에서는 귀목문 수막새 및 취두를 비롯한 다수의 기와류가 수습되었다.


파주 서곡리 벽화고분


서곡리 벽화분은 권준(1280∼1352)의 묘로 묘역은 동서 14.2m, 남북 27m이며, 5개의 장방형 석단을 5단을 조성하고 제2단에 매장 주체부를 지하식으로 길이 285, 너비 118, 높이 128의이며 동벽과 서벽은 2매, 북벽은 3매의 화강암 판석으로 축조하였고 바닥에는 전을 깔았으며 입구인 남벽은 판석 1매로 막았다. 내부의 4벽면에는 모자를 쓴 인물상이 천정에는 성신도가 그려져 있다. 묘역에 곡장과 석단이 조성되어 석실묘의 묘역 구조를 보이고 있다. 유물은 석곽 내부에서 중국 당·송대 동전 43점과 관정이, 외부에서 청자, 토기편, 주인공의 묘지석 3매가 출토되었다.


안산 대부도 육곡고분군


2002년과 2004년에 제2차례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석곽묘 10기, 토광묘 37기 등 모두 47기이다. 석곽묘 4기에서는 묘역시설로 볼 수 있는 석단이, 일부 석곽묘와 토광묘에서는 철기가 부장된 요갱이 확인되었다. 유물은 토기류, 청자류, 청동제, 철제 등 다양하게 춭토되었는데 특히 7호 토광묘에서 청동제인장과 중국 송대의 동전이 출토되어 주목된다. 청동제인장은 문서나 서신 또는 물목을 봉인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이로 보아 피장자 중 일부는 중국과의 교역을 담당하던 상인계층이나 하급관리일 가능성이 있다. 육곡 고분군은 고려시대 서해 도서지역의 장제와 생활상을 밝히고 당시의 문화양상 파악에 중요한 자료이다.


화성 반송리 행장골·장지리·우음도 유적


화성 반송리 행장골 유적에서는 석곽묘 9기, 토광묘 7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청자 대접, 청자 완, 도기를 비롯하여 고려시대 전형적인 동경인 쌍용문운문대경, 팔각능형연주문좌경 등의 청동거울과 철제가위, 동전(개원통보, 원풍통보, 희녕원보) 등이 출토되었다. 장지리 유적에서는 석곽묘 7기, 토광묘 1기가 확인되었다. 분포양상이 이전시기와 구분되며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직교한다. 경사면 유실이 있지만 횡구식으로 추정되며 경사면 아래쪽에 호석이 확인되고 바닥은 생토면을 이용하였다. 유물은 백자 완, 청자 반구병, 청자 대접, 자기소접, 철제 가위, 청동 숟가락, 동곳, 관정 등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로 고려시대 초기인 10 ∼ 11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우음도 송산그린시티 조성부지에서 적석토광묘 11기, 토광묘 17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도기 병, 청자 대접·접시·병, 청동 발, 수저, 동경, 철제 가위 등이 출토되었다.


여주 매룡리 용강골 고분군· 방미기골·상거동 유적


매룡리 용강골 고분군에서는 삼국시대 석곽과 함께 고려 후기로 추정되는 2기의 토광묘(C-1호분, C-2호분)가 인접하여 확인되었다. 2기는 풍화암반토를 파고 만들었으며, C-1호분은 묘역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유물은 C-1호분 내부에서 청동제 수저와 묘역시설에서 상감된 청자접시가, C-2호에서 가위와 구슬이 출토되었다. 방미기골에서는 토광묘 15기, 석곽묘 2기가 보고되었으나 유물은 일부 유구에서만 출토되었다. 상거동 유적에서는 석곽묘 5기, 토광묘 5기가 조사되었다. 석곽묘는 경사면 아래쪽에 유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지만 수혈식이며 목관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고 생토면 바닥에는 지름 30㎝ 내외의 요갱이 있다. 토광묘는 풍화암반토를 수직으로 굴착하여 조성하였으며 석재로 목관과 토광벽 사이 보강한 4호, 3개의 묘갱이 있는 5호가 특징적이다. 유물은 도기, 자기, 동경, 청동 발, 청동 완, 동전, 철제가위 등이 출토되었다.


용인 창리유적


석곽묘 10기, 태호유구 1기가 조사되었고, 1·2·7·8호 석곽묘는 횡구식으로, 10호 석곽묘는 수혈식으로 확인되었다. 개석사이에는 소형 할석으로 틈새 막았으며, 벽석은 할석으로 가로쌓기 하였으나 단벽 또는 횡구부와 연결되는 장벽의 끝부분은 세워서 축조한 특징이 관찰된다. 석곽의 규모는 길이 200㎝ 내외, 너비 80㎝이며, 내부에는 시상 등의 시설은 마련하지 않고 내부에 목관을 안치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횡구부는 경사면 하단부인 서단벽 전면을 사용하였다. 유물은 청자완, 도기호, 보습편·도자·가위·자귀 등 철기류, 동곳이 출토되었다. 석곽묘의 구조와 출토유물로 볼 때 조영 시기는 고려 중기인 11세기경으로 추정되며 용인지역의 매장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는 자료이다.


이천 증포동 유적


석곽묘 10기, 토광묘 5기가 조사되었다. 구조는 4벽이 남아있는 1호 석곽묘는 횡구식이고 나머지는 유실되어 알 수 없다. 3호 석곽묘는 3벽만 벽석을 쌓고 경사면 위쪽 단벽은 굴광면을 그대로 벽으로 사용한 반면, 2호 토광묘는 한쪽 단벽에 벽석을 쌓은 점이 특징이다. 유물은 편병, 고려백자 완, 철제 가위, 동경, 동곳, 나무 빗이 출토되었다.


용인 보정리 소실 유적


소실 유적에서는 석곽묘 5기가 조사되었다. 이중 23호 고려시대 석곽묘에서 청자 잔, 고려백자 완·잔·잔탁·대접·접시, 도기 편병·발·청동 숟가락·철제 관정이 출토되었다. 이것은 음식기명은 자기, 병과 같은 저장기명은 도기, 청동숟가락까지 식생활 용기의 일습이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일괄 유물은 11세기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중앙에 둥근 원통형의 잔받침대와 평평한 전을 가진 잔탁은 용인 서리 백자요지 Ⅲ층 출토 잔탁과 유사하므로 해무리굽 완, 대접, 잔 등 고려백자는 서리 백자요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잔탁은 특수 기종으로 유구에서의 출토예가 매우 드물고 요지에서의 출토량도 극히 적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종이 아니라 소량만이 제작되어 소수계층이 사용한 것으로 23호의 주인공은 이러한 잔탁을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계층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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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글쓴이
경기문화재연구원
자기소개
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