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문화와 문화정책의 재설계

논단

『문화정책』은 경기문화재단이 국내외 문화정책의 동향을 파악하고,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수렴하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이 추진하는 다양한 문화정책의 방향과 내용을 소개하기 위해 2017년 여름부터 발행하고 있는 계간지입니다. 본문은 『문화정책』2권 논단 내용입니다.

라도삼 / 서울연구원 도시사회연구실 선임연구원 


1. 관성과 타성


문화는 늘 변한다. 사람들의 삶과 생활의 형태, 다양한 관계망, 여러 문화와의 접합, 새로운 체험 등 여러 요소에 의해 변화한다. 그것은 변화무쌍하다. 그것을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어떤 흐름이 있을 뿐이다. 문화정책은 기본적으로 그런 문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정책이다. 따라서 문화만큼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문화정책은 과연 그럴까? 반성컨대 문화정책이 그런 적은 없는 것 같다. 변화의 현실에 맞춰 먼저 변해가고, 시대의 흐름을 주도하기보다는 늘 뒤언저리에서 변화를 따라가거나 심지어 변화와 관계없이 현재 하던 정책을 그래도 추진해오던 관성과 타성의 법칙이 자리 잡은 것 같다. 실례로 우선 시대의 변화와 관계없이 늘 상 해오는 관성의 형태로 예술지원 정책을 펴오고 있으며 심지어는 그것이 모든 정책의 다인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많다. 세상은 변해가는데, 정책은 여전히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사실 이런 현상은 여러 문화기관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다. 지금에 와선 많이 고쳐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문화재단은 예술지원 사업을 주요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것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말하진 않지만, 그래도 명색이 문화재단이라 하면 예술사업이 아닌 ‘문화사업’을 추진해야 한다. 즉, 지역의 문화를 활성화하는 사업을 추진해야 하는데, 마치 예술지원 사업이 전부인 양 거기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적절한 자세가 아니다.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은 엄연히 다르며, 문화와 예술 또한 전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2. 문화와 예술의 경계, 그 차이의 미학


문화와 예술이 다르다? 아마 이 말을 하면 많은 사람들이 반박할지 모른다. 분명 그럴 것이다. 다른 나라에 비해 문화의 개념을 예술과 연접하여 사용하거나 치환하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문화에서 예술을 떼거나 예술에서 문화를 버리는 것은 하나의 불경스러운 행동일지 모른다. 우리에겐 문화는 곧 예술이고, 예술은 곧 문화다.


그러나 문화와 예술이 같은 것일까? 단정적으로 말해 이 두 개념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문화는 특정한 집단이나 지역, 사회가 갖는 고유한 정체성이라면, 예술은 인간의 창조활동으로 표출된 미적 작품이거나 활동행위를 말한다. 때문에 이 두 개념은 절대 혼동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 두 개념을 연접해서 쓰거나 치환해서 사용함으로써 정책적으로 혼란을 일으키게 만든다. 예컨대 우리가 습관적으로 쓰는 ‘문화예술’이라는 개념과 ‘문화향유’나 ‘문화소외’같은 개념이 그런 것이다.


‘문화예술’은 직접적으로 문화를 예술로 치환시키는 효과를 가져온다. 이때 사용되는 문화는 뒤에 오는 예술을 수식하는 용어로, 고유한 자기 정체가 아닌 예술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된다. 그 결과 문화는 곧 예술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대표적인 예술지원기관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문화예술교육진흥재단 등은 왜 문화예술일까? 그리고 이들이 쓰는 ‘문화’라는 개념은 무엇일까? 고유한 자기 영역이 있는 개념일까? 이렇게 치환된 개념은 갖가지 정책용어로 재탄생한다. 그것은 ‘문화향유’와 ‘문화소외’다. ‘문화향유’는 문화를 ‘느낀다’(享) 혹은 ‘누린다’(受)라는 의미인데, 우리가 현실에서 말하는 문화향유란 ‘예술관람’을 의미한다. 정부에서 매3년 단위로 실시하는 <국민문화향수실태조사>를 보면 그 내용은 대부분 예술관람이나 활동과 관련된 것이다. 고유한 문화, 즉 각 집단이나 지역, 사회가 갖고 있는 정체를 느끼고 누리는 개념이 아닌 예술관람의 개념으로 문화를 치환한 것이다.


문화소외는 이를 더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문화소외란 일종의 문화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을 말하는데, 문화로부터 소외된 집단이 있을까? 지적했던 문화란 각 집단이나 지역, 사회가 갖고 있는 고유성인데, 그런 것이 없는 집단이나 지역, 사회가 있을까?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문화소외의 개념을 바탕으로, 예술을 관람하지 못하는 시민이나 경제적·지리적으로 소외된 복지계층을 대상으로 사업하는 용어로 문화소외를 사용한다. 각 집단이나 지역, 사회가 갖는 고유성은 인정하지 않은 채, 예술이라는 보편적인 콘텐츠를 각 집단이나 지역, 사회에 투입(Input)하는 사업에 모든 정열을 쏟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문화와 예술은 다르다. 문화는 그 집단과 지역, 사회의 고유성이라면 예술은 인간의 미학적인 창작활동의 결과이거나 활동 그 자체이다. 따라서 문화향유를 증대하려면 집단이나 지역, 사회에 내재하여 있는 ‘문화’, 곧 ‘정체’를 키우는 작업이어야 되고, 문화소외를 극복하려면 모든 집단과 지역, 사회가 자기를 잘 표출하도록 하는 데 집중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예술의 투입(Input)을 통해 고유를 방출하는 사업이 아니라, 각 집단이나 지역, 사회가 갖는 고유성을 드러내는 표출(Output)사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과 뒤과 전혀 다른 사업, 문화사업과 예술사업은 이렇게 다르다.



3. 그렇다면 문화정책은 무엇을 해야 하나?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문화정책과 예술정책이 일치되거나 대체되어 있다. 여전히 많은 기관에서 예술사업을 통해 그것이 마치 문화사업인양 홍보하거나 치환된 정책으로 사업을 추진한다. 이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문화정책이란 과연 무슨 일을 해야 하는 것일까? 문화정책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문화를 구성하는 기초적 논리를 알아야 한다. 문화가 형성되는 기반을 알아야만, 그 기반을 강화시키거나 활성화시키는 사업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집단과 지역, 사회의 고유한 정체로서 문화는 기본적으로 4가지 요소에 의해 자기를 형성한다. 그것은 역사라는 시간적인 요소와 예술이라는 미학적인 요소, 제도와 관계라는 일상의 힘, 그리고 다른 문화의 교류와 혼합이라는 융합적 요소 등이다.


첫째, 문화는 무엇보다 시간, 즉 오래된 정체(停滯)에서 깊은 영향을 받는다. 시간이 오래 머물러야만 집단이나 지역, 사회 내에는 고유한 패턴, 즉 자기 스타일이 형성된다. 그래야만 외부에 의해 집단이나 지역, 사회는 특징화(기호화)되고 내부적으로는 사람들을 행동과 사고의 범위와 틀을 규정하는 힘을 갖게 된다. 오래 정체(停滯)되고 정체(正體)를 만드는 자기 힘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것이 문화형성의 가장 기본적 요소다.


둘째, 예술의 힘, 즉 한 사회가 표출하는 창의적 활동양식 또한 문화를 결정하는 힘이 된다. 예술은 그 사회의 활동력, 즉 문화력을 대변한다. 그 자체로 새로운 전형을 보여줌으로써 사회적 상상을 가능케 하며, 반성적 사고를 통해 현재를 돌아보고 변화를 준비하도록 만든다. 예술이 없는 한 문화는 단지 일상에 내재하는 정체(正體), 즉 문화성(文化性)일 뿐이다. 그것을 예술을 만남으로써 문화력(文化力)으로 변화한다.


셋째, 일상의 관계 또한 문화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관계의 형태가 얼마나 민주적이고, 각 개인에 주도성을 부여했는가에 따라 문화(활)력을 달라진다. 관계의 형태가 일방적일 경우, 문화성은 강하지만 문화력은 떨어져 문화는 침체되어 보인다.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일반적인 문화, 예컨대 강의실 문화 등이 그렇다. 얼마나 침체되어 보이는가? 반면, 각 개인의 주도성이 강할 경우 문화력은 굉장히 활발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너무 강할 경우, 고유성을 만들지 못해 문화성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 일상의 관계, 즉 각 개인을 둘러싼 집단이나 지역, 사회의 관계는 제도적 틀이나 공간의 구조 등 일상을 형성하는 모든 곳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 법과 제도와의 관계, 이웃 또는 공동체와의 관계, 공간의 형태 등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 집단과 지역, 사회에 형성되는 문화의 양태는 다르기 때문이다.


넷째, 마지막으로 문화는 타 문화와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다. 다른 문화와의 섞임, 그 혼동을 통해 자기 정체를 혁신하며 새로운 모습을 갖춰가는 것이 문화의 형상이다. 때문에 문화정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이 네 가지 자원, 즉 역사와 예술, 일상의 관계, 타문화와의 융합 등 여 러 측면에서 정책을 수행해야 한다. 특히 우리처럼 단절의 역사가 강한 나라이고 자기 스타일의 예술을 갖지 못한 나라일 경우, 더구나 일상의 관계가 규범적이고 제도적이며, 권위적일 경우, 타문화와의 융합도 좌와 우, 세대, 이주노동자와 성소수자 등 우리 내부의 타자에 대한 허용력이 적을 경우, 문화정책은 어렵고 힘든 과제가 된다. 도대체 우리 문화의 정체는 어디에서 찾을 것이며, 예술의 자기 스타일은 어떻게 형성하고, 일상의 관계를 협력적·자기주도적으로 만들고,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고 공존하도록 해야 할 것인가? 이 모두가 문화정책의 과제다. 예술지원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역사, 생활의 기반을 바꾸는 것이 문화정책인 것이다.



4. 혁신을 위한 방향과 전략


따라서 문화정책은 예술정책과 그 궤를 달리한다. 예술정책은 콘텐츠의 개발, 창작활동의 촉진을 위한 것이라면 문화정책은 그 집단과 지역, 사회가 갖는 고유성을 어떻게 변화·발전시켜 그 집단과 지역, 사회에 사는 사람들이 보다 나은 삶을 살도록 하고, 발전하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다. 그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과제다. 많은 문화재단들은 최근 들어 이런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우리나라 문화재단의 선두주자인 <경기문화재단>의 경우, 그 역사만큼 먼저 나서 청년기획자를 양성하거나 예술을 통한 지역혁신 사업을 통해 실제 경기도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혁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그것은 문화정책의 지형이 서서히 변해오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표다. 주마가편(走馬加鞭),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한다고 예술정책을 넘어 문화정책으로 전화하고자 하는 우리나라 문화정책 기관들에게 도움을 준다면, 나는 변화를 위해 우선 4가지를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것은 문화정책의 목표와 방식, 주체, 체계를 바꾸는 것이다.


첫째, 문화정책의 목표를 바꾸라는 말을 가장 먼저 하고 싶다. 분명하고도 명백하게 문화정책의 목표는 ‘국민의 삶’, 경기도로 말하는 ‘도민의 삶’을 보다 나은 삶으로 바꾸는 것이다. 바로 삶의 의제 개발자로서 문화재단이 역할하는 것, 그것이 문화기관으로서 재단이 취해야 할 전략이다. 삶의 의제기관으로서 문화재단이 정책을 편다는 것은 도민의 삶 속에 있는 문제를 직접적 들여다보는 것이다. 청년실업으로부터 고통을 받는 청년과 그들의 가정, 먼 거리를 출퇴근하며 살아야 하는 삶, 낙후된 지역, 홀로 남겨진 노인 등 들여다보면 문제 아닌 것이 없다. 이런 삶의 고리들을 어떻게 하면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재단이 가진 다양한 능력을 활용하여 예술가, 문화기획자 등과 다양한 사람들과 연대하여 이 문제를 풀어야 한다. 그럴려면 문화정책의 방식과 주체를 변화시켜야 한다. 문화정책의 방식은 일방적 지원의 방식이 아닌 공동의 협력적 방식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예술가를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닌 예술가와 더불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로 바뀌어야만 재단의 사업에 예술가가 동원되는 것이 아닌, 예술가와 더불어 하거나 예술가가 하는 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 곧 지원의 관계가 아닌 협력의 관계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셋째, 주체가 당연히 바뀐다. 이제 문화정책의 주체는 경기문화재단이 아니다. 경기문화재단은 판을 깔아주는 주체일 뿐, 정책의 주체는 그 판 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다. 문화기획자, 예술가 등 많은 사람들이 그 판 위에서 놀 것이며, 그에 따라 정책은 매우 다양해질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체계를 바꾸어야 한다. 경기문화재단 등 광역단위에서 직접 사업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기초적이고 세부적인 단위에서 스스로 문화기획이 일어나고, 이를 지원하는 방식으로 정책이 바뀌어야 한다. 경기문화재단 등 문화기관들은 각 집단이나 지역, 사회 등이 문화를 기획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고, 그 문제를 풀어낼 수 있는 역량있는 기획자와 예술인들을 키워내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래서 각 집단과 지역, 사회가 역량있는 기획자와 예술가를 만나 자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문화정책이다. 그런 점에서 향후 문화기관들은 기획자 및 예술가의 육성자이자 각 집단이나 지역, 사회의 문화혁신을 위한 지원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예술가의 지원자가 아니라, 각 집단과 지역, 사회의 지원자가 되어야 하는 게 앞으로 문화재단의 역할이다.






5. 마치며


문화정책과 예술정책, 그 혼동의 끝에서 나는 문화의 개념부터 문화정책 방향까지 논의하였다. 물론 이러한 방향에 대한 논의는 너무 파격적이거나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어서 지금 당장 이행할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고, 정책에 대한 요구 또한 급변하는 상태다. 직접 그 효용을 증명해야만 예산이 배당되고, 효율성이 입증되어야만 정책이 집행되는 현실에서 현재와 같은 관성의 법칙을 그대로 구현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 아니다. 조금은 무리가 되더라도 미래의 변화를 위해 조금씩 아주 조금씩이라도 그 배를 돌려야 한다.


그 배를 돌리기 위해선, 다시 말해 문화정책의 방향을 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지금 하는 행위나 정책에 대해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지금 하는 정책이 문화정책인지 예술정책인지 그 물음을 제기하지 않는 한순간에 혼돈에 빠지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것이 타성이다. 그 타성, 본래의 모습으로 의미없이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는 질문해야 한다. 그 질문은 의외로 간단하다. 문화를 예술로 치환시켜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또 뭔가 대단한 것으로 착각하여 독립적인 용어로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문화향유, 문화복지, 문화시민, 문화도시, 문화경기 등 이런 용어로만 사용하지 않으면 문화정책은 보다 근본을 살펴볼 수 있다.


좀 더 적절한 용어로 문화를 사용하고, 문화정책의 힌트를 얻으려면 문화를 수식당하는 용어로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문화도시가 아닌 도시문화, 문화시민이 아닌 시민문화, 문화경기가 아닌 경기문화를 보면, 드디어 그 집단과 지역, 사회의 문화가 보이고, 무엇이 문제인지 관찰할 수 있다. 미학의 지형이나 우월성이 아니라 집단이 가진 고유성으로서 문화를 보아야만 문화정책 또한 비로소 삶 속에서 자리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앞으로의 문화정책의 변화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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