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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고려시대 경기지역 사원의 성격 ⑦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시대 경기지역 사원의 성격


이승연 | 경기문화재연구원



|목차|

 Ⅰ. 머리말

 Ⅱ. 고려시대 開京과 京畿지역의 변화

 Ⅲ. 고려시대 開京과 京畿지역 사원의 종파와 기능

 Ⅳ. 맺음말


Ⅲ. 고려시대 開京과 京畿지역 사원의 종파와 기능


5. 군대 주둔지ㆍ훈련장소, 정치회합의 장소로 이용된 사원


개경의 방어를 담당한 군사시설은 궁성 안의 회경전을 중심으로 서쪽으로 中房, 동쪽으로 中樞院, 궁성 밖에서 십자가와 맞닿은 官道 남쪽으로 兵部, 選軍 및 북쪽의 金吾衛ㆍ千牛衛ㆍ監門衛 등이 위치하고 있다. 개경의 방위구역은 대체로 四郊의 범위 내지만, 특히 자남산의 안쪽으로 빈번히 이루어지면서 수도방위시설이 집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별도의 방위시설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사원 자체가 수도방위 거점시설로서 역할을 충분히 하였기 때문이다. 즉 왕의 행차가 잦았던 사원은 교통의 요지나 전략적 요충지에 조성되었다는 지리적 요인과 더불어 왕의 안전을 위한 규모와 시설이 확충되면서 개경방어의 거점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이 개경의 방위제도의 특징이다(전경수 2010: 433).


군대 주둔지나 훈련장소로 활용된 사원은 開國寺ㆍ國淸寺ㆍ興王寺 등으로 대부분 開京 나성 밖에 위치하여 넓은 공간을 가지고 있었고, 이 공간이 군대의 수용에 용이하게 이용되었다. 개경성 밖의 사원들은 城이나 망루ㆍ식수원을 가지고 있으면서 개경의 보호시설로서 기능하였다. 또 지방과 연결되는 관문적 시설로서 사용되었는데, 이러한 점은 이들 사원이 개경을 보호하기 위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것과 연관된다. 이렇게 사원이 군사적으로 이용된 것은 수도 근처에 존재했기 때문이지만 국가의 공공기관과 같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다(박윤진 1998: 118).


정치회합의 장소로 이용된 사원은 개경 성내에 위치했다. 興國寺는 왕궁이나 兵部와 가까웠기 때문에 선택되었을 것이다. 충렬왕 때는 원에 대한 모반사건을 사원에서 국문하고 해결하였다. 원의 간섭에서 벗어난 후 우왕 때 국왕 출생의 비밀이라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을 때나 국왕에 대항하는 모임을 가질 경우 사원이 이용되었다. 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으로 정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국왕에 반대하는 모임을 가질 때에도 사원을 이용하였다(박윤진 1998: 118~119).


Ⅳ. 맺음말


본고는 선행연구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開京과 京畿지역의 변화를 살펴본 후, 해당 지역 사원의 종파와 기능을 정리해 봄으로써 고려시대 개경과 경기지역 사원의 성격을 고찰해 보려 하였다.


‘京畿’라는 지명은 1018년(현종 9)에는 개성부를 폐지하고 開城縣令과 長湍縣令을 두어 尙書都省에 예속시켜 ‘京畿’라 하면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문종대와 공양왕대에 관료(공양왕대는 신진관료)의 녹봉제도가 개편되면서 경기의 면적이 확대되었다. 곧, 고려시대 경기는 관료에게 지급하는 토지의 공급처로, 관료체계가 개편됨에 따라 경기의 공간적 범위가 변한 것이다. 이에 고려시대 경기지역 사원은 개경을 중심으로 확장되었으며, 오늘날 한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 경기지역과 차이를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선행연구와 사료를 중심으로 고려시대 개경과 경기지역 사원의 종파와 기능을 살펴보니, 종파는 교종사원이 선종사원보다 더 많이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기능상으로는 願刹과 裨補寺社ㆍ資福寺, 院館寺院 등 국가와 왕실의 안녕과 대민통치의 기능을 수행하는 정치적 목적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고려시대라는 시대적 상황과 개경과 경기라는 지정학적 위치가 결합된 배경 하에 드러난 사원의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이상의 발표문은 필자의 연구가 첫걸음인 상태에서 선행연구를 중심으로 정리한 한계가 있음을 밝히며, 향후 사료와 발굴자료간 검토와 남북한의 학술교류를 통해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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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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