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역사문화유산원

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 ①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


정해득 | 한신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강화 고려 왕릉 조사성과

   Ⅲ. 조사연구 과제

   Ⅳ. 맺음말


Ⅰ. 머리말


고려는 1231년 몽고의 침입에 굴욕적인 강화(講和)를 맺은 후 대몽항쟁을 전개하기 위해 1232년 7월 16일 국왕을 비롯하여 무신집권자 최우(崔瑀) 이하 모든 신하와 개경의 백성들이 강화도로 옮겨가는 천도(遷都)을 단행하였다. 이 시기까지 조성된 고려 왕릉은 개경을 중심으로 한 개풍, 장단 일대에 대부분 위치하고 있다. 개경의 경우 송악산 북쪽과 만수산 남쪽 일대에 20여 기의 왕릉이 모여 있다.


강도 천도 기간에 조성된 고려 왕릉도 이런 전통을 따랐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강도시기에 희종(熙宗)과 고종(高宗)이 서거하여 석릉(碩陵)과 홍릉(洪陵)이 조성되었으며, 원종비 가릉(嘉陵)과 강종비 곤릉(坤陵)을 비롯하여 아직 피장자가 밝혀지지 않은 왕릉급 고분이 위치하고 있다. 이 가운데 홍릉을 제외한 다른 왕릉들이 진강산(鎭江山) 일대에 모여 있는 것은 고려 왕릉 조성의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고려 왕릉은 석실을 미리 만들어 두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이는 태조 이래 산릉을 검약하게 조성함으로써 3개월이 못되는 기간에 능실을 조성하여 호화롭지 않던 전통에 따랐기 때문이다. 공민왕이 환관 김광대(金廣大)의 말에 따라 정릉 옆에 수릉(壽陵)을 조성하자 비난이 일었던 것은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1*


그래서 고려 왕릉이 훼손된 채 예장한 묘와 섞여 있으면 구분하기 곤란할 정도이다. 개경의 고려 왕릉을 종합 정리한 김인철은 석실분(石室墳)의 공간구성에 대해 “묘역은 3~4단으로 구분되며 제1단에는 봉분이, 봉분 둘레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주변에 곡장을 설치한다. 2~3단에는 문·문무인석, 장명등과 상석이 설치된다.”고 하였다.2* 고려 왕릉의 공간구성을 대체적인 잘 정리하였으나 통시기적으로 개념화하였기 때문에 개별 왕릉에 적용할 때 부합하지 않은 경우도 종종 확인된다.


본고는 그동안 진행된 강화 고려 왕릉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 성과를 정리해 보고, 향후의 과제에 대해 검토해 보기 위해 작성되었다.



1.고려사』권120, 열전 권제33 諸臣, 尹紹宗.

2. 김인철, 2002, 「고려무덤에 관한 연구」 『평양일대의 벽돌칸무덤, 고려무덤, 삼국시기 마구에 관한연구』, 사회과학출판사, 117~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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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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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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