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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 ③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강화 고려 왕릉의 조사성과와 과제


정해득 | 한신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강화 고려 왕릉 조사성과

  Ⅲ. 조사연구 과제

  Ⅳ. 맺음말


Ⅲ. 조사 연구 과제


고려는 원구(圓丘)·태묘(太廟)·사직(社稷)·적전(籍田), 여러 원릉(園陵) 등 나라에서 소중히 여기는 장소에 담당 관원을 정해 관리하고 있었다.1* 충숙왕이 1325년 관(官)에서 선대의 능묘(陵墓)에서 벌목과 방목을 금지하고 함부로 출입하지 못하게 한 것을 통해 왕릉의 관리는 무신정변기와 원 간섭기까지도 이어진 것을 알 수 있다.2* 조선에서도 여러 차례 고려 왕릉에 대한 정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강화의 고려 왕릉도 어느 정도 관리가 이루어져서 현재까지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역사시대 유적의 해석은 역사기록물에 대한 면밀한 분석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고려 왕릉의 공간구성을 밝히고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지만 『고려사』 예지에 실린 「배릉의」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왕이 선대 왕릉을 참배할 때는 담당 관사는 왕릉과 능실(陵室) 내부를 미리 청소한다고 규정하였다.3* 여기서 왕릉은 봉분 주위를 지칭하고, 능실은 봉분 앞에 마련된 제향시설을 의미한다.


이는 능실 건물 앞으로도 넓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로 왕릉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의 하나로 판단된다. 강화의 여러 왕릉도 이와 같은 시설을 갖추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기준에서 앞으로 발견될 수 있는 왕릉유적과 왕릉급으로 조성되었을 묘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세조 창릉(昌陵)과 태조 현릉(顯陵)터


1232년(고종 19) 7월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하고4* 강도(江都)라 명칭한 고려는 창릉과 현릉에 모셨던 세조(世祖)와 태조(太祖)의 재궁(梓宮)을 강도로 옮겨 창릉과 현릉을 조성하였다. 그 터가 강화도 어느 곳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는데 진강산(鎭江山) 일대가 가장 유력한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가 새로운 수도로서 개경에 비해 넓은 면적이 아니라는 점과 개경 주변의 왕릉이 밀집도 높게 조성되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창릉과 현릉이 조성된 곳이 곧 강도의 고려 왕릉 영역으로 지정한 것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릉을 비롯한 가릉, 곤릉이 계속 진강산 일대에 조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앞으로 진강산 일대에서 창릉과 현릉 1차 천장지(遷葬地)가 발견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런데 이곳은 강화 도성에서 20리 이상 떨어진 곳이기 때문에 국왕이 직접 참배하기에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5* 그래서 고종은 1243년(고종 30) 강화부의 남쪽 10리 지점의 개골동(盖骨洞)으로 2차 천장하여 세조와 태조의 왕릉을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6*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1261년 9월 원종이 창릉(昌陵)·현릉(顯陵)·홍릉(弘陵)을 참배하였다는 기록이다.7* 세 왕릉이 강화 궁성 가까운 곳에 있었기 때문에 한꺼번에 참배하는 것이 가능하였다고 보면, 개골동은 고려산(高麗山)과 가까운 곳으로 보이고 고종이 서거한 뒤 그 인근에 홍릉을 조성하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래서 고종의 임종(臨終)을 지키지 못한 원종이 귀국한 뒤 홍릉을 참배하면서 인근에 있던 창릉과 현릉을 함께 참배한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홍릉 인근에서 창릉과 현릉터가 발견될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한편, 원종이 개경으로 환도(還都)하면서 세조와 태조의 재궁도 개경으로 옮겨 갔기 때문에 강화에는 창릉 2기, 현릉 2기의 왕릉터가 그대로 남게 되는 결과가 되었다. 아직까지 그 자리가 밝혀지지 않은 상태인데, 강화도 고려 왕릉 유적이 가진 역사적 의미와 가치 정립을 위해서 앞으로 정밀한 조사를 통해 찾아야할 것이다.


2. 희종 왕비 소릉(紹陵)


1247년(고종 34) 8월 25일 희종(熙宗)의 왕비였던 함평궁주(咸平宮主) 임씨(任氏)가 서거하였다.8* 무신정권에 의해 폐위된 희종이 1237년(고종 24) 서거하였을 때 석릉(碩陵)이 조성되었듯이 함평궁주의 시호(諡號)를 성평왕후(成平王后)라 올리고, 능호를 소릉(紹陵)이라 하여 왕릉이 조성되었다.9* 소릉의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상태인데, 석릉, 곤릉, 가릉이 모두 진강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어서 소릉 역시 진강산 일대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왕릉이 왕과 왕비의 합장으로 조성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소릉이 반드시 석릉 옆에 조성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면 원종비(元宗妃) 가릉(嘉陵) 주변에 위치한 능내리 석실분이 소릉(紹陵)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고 할 수 있다. 태후릉 옆에 자리할 수 있는 무덤은 왕비 이상의 신분이어야 하기 때문에 능내리 석실분의 피장자는 성평왕후 외에 달리 생각하기 어렵다. 따라서 이에 대한 충분한 연구검토가 필요하다.


3. 무신집정자 묘


강도시기 고려의 실권자는 무신집정자들이었다. 그들은 국왕을 폐위시키고 꼭두각시 왕을 즉위시키기도 하였다. 형식상 신하의 자리에 있었으나 실질적으로 국정을 담당하면서 국가의 전례(典禮)를 무너뜨렸다. 고려 국왕은 그들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는 상황이었다. 1231년 7월 최우(崔瑀)의 처 정씨(鄭氏)가 사망하였을 때 보인 왕실의 대응은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준다.


고종은 정씨의 장례를 이자겸의 둘째 딸로 예종(睿宗)의 왕비가 되었던 순덕왕후(順德王后)의 전례에 따르도록 하였다. 즉, 무신정권의 최고실력자 부인을 왕후의 장례와 같은 격식으로 지내게 한 것이다. 이때 조성된 정씨 묘는 석실(石室)로 만들어졌는데 무덤이 기이하고 공교로웠다는 평이 있었다.10* 이 사실은 이듬해 단행된 강화천도 이후에 무신집권자와 그의 부인이 사망하였을 때 조성된 그들의 무덤이 왕릉에 버금가게 꾸며지고 석실로 만들어 졌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강화시기에 죽은 무신집권자는 최이(崔怡)와 최항(崔沆), 최의(崔竩) 등인데, 최이와 최항의 무덤은 정상적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최이 또는 최항의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국보 제133호로 지정된 ‘청자진사연화문표형주자’가 무신정권 권력자의 무덤이 왕릉에 못지않게 조성되었다는 것을 방증하고 있다.


최이(崔怡)는 1249년(고종 36) 11월 5일 죽었는데, 고종이 3일 동안 조회를 정지하였으며 시호를 광렬(匡烈)이라 하였다. 최이의 장례 때 의장과 호위가 성대하였으며, 후에 강종(康宗)의 묘정에 배향하였다.11*


1257년(고종 44) 윤4월 2일 중서령(中書令) 최항(崔沆)이 죽었는데, 거의 5개월이 지난 8월 26일에 진강현(鎭江縣 강화도) 서쪽 창지산(昌支山) 기슭에 장사지냈다.12* 이는 3개월 이내에 진행되었던 고려 국왕의 장례 기일보다 훨씬 길었다는13* 점에서 호화로운 무덤이 조영되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하게 하는데 묘지명에 석실(石室)이 조성되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현재 창지산이 어느 산으로 변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진강산 서쪽에 있는 구릉에 묻혔을 가능성이 있다.


1258년(고종 45) 최충헌의 아들이자 희종과 성평왕후(成平王后)의 소생인 덕창궁주(德昌宮主)의 배필인 영가후(永嘉侯) 최전(崔瑼)이 죽었는데, 무신집정자의 아들이자 희종의 부마 신분이기 때문에 역시 석실무덤이 조성되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무신집정자의 부인들이 강도시기에 죽었다면, 그들의 묘도 석실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여러 기의 석실분이 발견될 수 있을 것인데, 왕릉에 버금가는 규모일 것으로 예상된다.


4. 그 외 예장(禮葬) 대상자의 묘


『고려사』에는 묘지에 대한 규제가 행해진 것으로 나타나는데,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내용은 품계별로 묘지의 면적과 봉토의 높이에 관한 규정이다.14* 976년(경종 1)에 정해진 묘지의 규제는 다음의 <표 1>과 같다.



고려는 고위 관료를 대상으로 예장을 시행하고 있었다. 『고려사』에는 대신의 장사에 부의를 보내고 예장(禮葬)을 하였다는 기록이 몇 차례 있으나15* 예장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확인할 수는 없다. 고려에서 대신을 예장하는 경우 석실 조성을 허용하였다는 것과16* 시호의 하사, 노제(路祭)에 2품 이상자를 다 모이게 하는 의례가17* 확인될 뿐이다. 주영민은 분묘보수(墳墓步數)에서 1∼2품과 3품을 별도로 구별하여 묘지보수를 금제하고 있는 것에 주목하여 1∼2품은 석실, 3품은 석곽(石槨), 4품 이하는 토광(土壙)으로 매장주체부를 조영한 것으로 추정하였는데,18* 2품 이상 관료에게 예장을 시행한 것으로 보면 의미 있는 주장이다.


그들의 묘는 왕릉에 미치지는 못하였으나 강화도에 현존하는 이규보와 허유전의 묘와 같이 넓은 공간에 묘가 조성되었을 것이다. 이규보 묘의 봉분은 조선시대에 다시 개축한 것이지만 허유전의 묘는 고려 말 조성할 당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형태의 봉분은 조선전기까지 계승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초기에 예장한 묘 가운데 지나치게 호화로워서 사회문제가 된 사례가 실록에서 확인된다. 연창위(延昌尉) 안맹담(安孟聃)의 묘에 단청한 제청(祭廳)이 있었으며, 의산위(宜山尉) 남휘(南暉)ㆍ성녕대군ㆍ정소공주(貞昭公主)ㆍ여흥부원군 민제(閔霽)ㆍ익안대군(益安大君)ㆍ정안공주(貞安公主) 등의 묘에 석양과 석호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또한 양렬공(襄烈公) 이지란(李之蘭)의 묘소는 석실로 만들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러한 사례를 종합하면 여말선초 예장대상자의 무덤 공간은 석실로 만들어졌고 봉분 주위에 석수를 설치하였으며, 제청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규보와 허유전 묘와 조선 초기 예장 묘의 형태를 참조하여 강도시기에 예장된 묘의 규모를 추정해 보면, 석실의 규모는 왕릉에 비해 작았을 것이고, 봉분은 장방형 호석에 봉토를 쌓아 올린 형태였을 것이다. 법당방 벽화고분, 서곡리 고려 벽화 묘 등 민통선 일대에서 보고된 고려 석실분은 내부를 화려하게 치장하긴 하였으나 왕릉에 비해 규모가 훨씬 작은 것으로 보고되었다.


또한 2∼3구역으로 공간을 구분하여 봉분 앞에 석인을 세우고 단청을 하지 않은 제청건물을 세웠을 것이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기록된 고위관료들의 사망기사를 토대로 무신집정자를 제외한 예장대상자는 모두 17명으로 보이고 다음의 <표 2>와 같다.



물론 위 인물들의 묘가 강화도에 계속 남아 있는지는 확인되지 않고 있는데, 강도시기 조성된 왕릉이 대부분 그대로 있는 것으로 볼 때 개경환도 이후에 이장(移葬)되었을 가능성은 적다고 하겠다. 그래서 강화도 전역에서 석실묘가 발견될 가능성이 있다.



1. 『高麗史』卷14, 世家 卷第14, 睿宗 11年 4월.

2. 『高麗史』卷35, 世家 卷第35, 忠肅王 12年 10月.

3. 『高麗史』卷61, 志 卷第15, 禮3 吉禮大祀, 諸陵 「拜陵儀」.

4. 『高麗史』卷23, 世家 卷第23, 高宗 19年 6월. 16일 천도하여 17일부터 궁궐을 지어 7월 6일 고종이 개경을 출발하여 다음날 강화객관에

       들어간 것으로 되어 있다.

5. 『新增東國輿地勝覽』卷12, 京畿 「江華都護府」, [陵墓]. 원덕태후릉(元德太后陵) 부의 남쪽 23리에 있는데, 고려 고종의 비로 이름은

       곤릉(坤陵)이다. 고려 희종릉(熙宗陵) 부의 남쪽 21리에 있는데, 이름은 석릉(碩陵)이다. 순경태후릉(順敬太后陵) 부의 남쪽 24리에 있는

       데, 고려 원종비(元宗妃)로 이름은 가릉(嘉陵)이다.

6. 『高麗史』卷23, 世家 卷第23, 高宗 30年 8月 26일 경오.

7. 『高麗史節要』卷18, 元宗 2年 9月.

8. 『高麗史』卷23, 世家 卷第23, 高宗 34년 8월 25일 을사.

9.  高麗史』卷88, 列傳 卷第1, 后妃 熙宗后妃 成平王后 任氏.

10. 『高麗史節要』卷16, 高宗3, 高宗18年 7月.

11. 『高麗史』卷129, 列傳 卷第42, 叛逆 崔忠獻 崔怡諸子.

12. 김용선 역주, 2001, 『역주 고려묘지명집성』상,「崔沆墓誌銘」.

13. 고종이 1259년 6월 30일 서거한 뒤 9월 18일 홍릉에 매장되어 약 80일이 소요되었다. 원종은 1274년 6월 18일 서거하였고, 9월 12일 소릉

       에  매장되어 80여 일이 소요되었다. 또 1297년 5월 21일 서거한 제국대장공주는 8월 29일 고릉에 매장되어 3개월이 약간 넘는 기간이 소요

       되었다. 

14. 『高麗史』志39 刑法 禁令. “景宗元年二月 定文武兩班墓地 一品九十步 二品八十步 墳高竝一丈六尺 三品七十步 高一丈 四品六十

          步 五品五十步 六品以下竝三十步 高不過八尺.”

15. 『高麗史』 卷64, 志18, 禮6, 「凶禮」. 平章事 崔亮, 內史令 徐熙, 侍中 韓彦恭 등의 장사에 부의를 보내고 예장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6. 『太宗實錄』 卷12, 太宗6年 閏7月 乙酉.

17. 『世宗實錄』 卷83, 世宗20年 12月 戊午.

18. 주영민, 2005,「高麗時代 支配層 墳墓硏究」, 『지역과 역사』17, 부경역사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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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과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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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문화유산의 가치 발견, 경기문화재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