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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②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이 글은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천백주년 기념 학술대회’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고려전기 경기의 설치와 그 의미


신은제 | 동아대학교



|목차|

  Ⅰ. 머리말

  Ⅱ. 성종 14년 赤·畿縣의 설치

  Ⅲ. 현종 9년 京畿의 설치

  Ⅳ. 문종대 경기제의 변화

  Ⅴ. 맺음말


Ⅱ. 성종 14년 赤·畿縣의 설치와 그 배경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자신의 근거인 송악을 수도로 삼아 고려를 통치하였다. 『高麗史』 지리지에 의하면 왕경개성부는 본래 고구려의 扶蘇岬이었는데 신라 때 송악군으로 개편되었다가 태조 2년에 송악산의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開州라 칭했다.1* 『세종실록지리지』도 이 내용에 따라 송악군에 도읍을 정하고 개주로 승격시켰음을 기술하고 있다.2* 다만 『新增東國輿地勝覽』 개성부조에 의하면 태조 왕건은 부소갑 즉 송악군과 冬比忽 즉 개성군을 합하여 개주를 설치하였다.3* 따라서 태조는 자신의 世居地였던 송악군과 인근의 개성군을 통합하여 개주를 설치하였다. 이후 광종이 개주를 황도라 칭했다. 하지만 도읍은 정했지만, 고려 전역을 체계적으로 구획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주지하듯이 고려는 지방 호부층들을 통합 혹은 제압하면서 건국되었다. 따라서 고려 건국이후 시급한 과제는 호부층들이 통치하고 있던 지역들의 통치였다. 비록 군사적 우위를 통해 해당 지역을 통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해당 지역에 대한 통치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왕건이 각지를 통치한다는 것은 크게 보면 2가지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하나는 해당 지역에 대해 수취를 행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해당지역의 민들에 대한 직접 사법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호구조사와 양전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후자는 지방관 파견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보다 중요한 사안은 호구조사와 양전을 거쳐 해당지역을 편제 즉 ‘置邑’하고 그에 따라 수취를 단행하는 것이었다. 고려 초 호구조사와 양전에 의한 치읍은 지역적 상황에 따라 시기적 차이를 보인다.4* 상이한 시기에 이루어진 치읍이 완성되는 시기는 대략 성종 14년으로 당나라 제도에 입각한 지방제가 개편된 시기이다.5*


성종 14년 唐制를 채용한 지방제도의 개편과 더불어 황도 개주도 새롭게 당나라 식으로 개편되었는데 당의 京兆府에 해당하는 開城府를 두고 그 예하에 6개의 赤縣과 7개의 畿縣을 두었다. 이른바 경기제의 전범이 완성된 것이다. 13개의 적현과 기현은 구체적으로 명기되어 있지 않아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현종대 개편된 12개현, 즉 개성현, 貞州, 德水縣, 江陰縣, 長湍縣, 松林縣, 臨津縣, 兔山縣, 臨江縣, 積城縣, 坡平縣, 麻田縣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이해된다.6* 문제는 이들 현 가운데 어떤 현이 6개의 적현이고 7개의 기현인가이다.


윤무병은 왕경과의 거리, 왕릉의 소재 등을 근거로 송악, 개성, 덕수, 임진, 정주, 송림을 적현으로 간주한 반면7*, 정학수는 개성 도성내부인 京內, 개주 관할 영현이었던 개성현, 덕수현, 임진현, 송림현, 강음현을 적현으로 이해하고 나머지 정주, 장단현, 토산현, 임강현, 적성현, 파형현, 마전현을 기현으로 이해했다.8*


대동여지도의 경기 12현(정학수, 『고려전기 경기제 연구』, 건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95쪽 재인용)


성종 14년 적·기현 제도 정비가 성종 14년 군현제도 개편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조치라는 데 연구자들의 이견은 없다. 주목되는 바는 이러한 개편의 배경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군현제도의 개편은 치읍의 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므로 기본적으로 성종 14년 군현제의 개편과 적·기현제의 실시는 호구조사와 양전이 이 시기에 와서 완성되었음을 의미한다.9* 물론 성종 14년 군현제 개편을 호구조사와 양전의 결과로 간주할 수만은 없다. 유교적 통치이념의 지향과 같은 국가 통치 이상이 역으로 지방제의 개편을 유도하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지방에 대한 지배는 해당 지역에 대한 상세한 정보 파악을 근거로 한다는 점에서 호구조사와 양전을 기본 전제로 하였을 것이다.


성종 14년 군현제도 개편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사항은 목종원년에 실시된 전시과의 개정이다. 성종은 재위 15년 10월 왕위를 조카인 목종에게 선위한 뒤 사망하였다. 이어 즉위한 목종은 원년 3월에 安逸戶長에게 호장 직전의 반을 내려주었으며, 그해 12월 전시과를 전면적으로 개정하였다. 목종이 개정한 전시과는 부친 경종이 만든 전시과와는 근본적 차이가 있었다. 주지하듯이 목종대의 전시과는 성종대의 관제개편에 기반한 것이다. 성종 14년 처음으로 문무 관계를 나누어 문산계를 도입하였다.10* 이러한 관계의 개편을 기반으로 18과의 전시과가 개정되었을 것이다. 한편 전시과의 개정은 양전을 전제로 한다. 전국적인 양전과 군현의 구획이 정비되지 않으면 관료들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전시과 제도는 시행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성종 14년 군현제도의 정비와 그 일환으로 이루어진 적현과 기현의 설치는 모두 이전까지 호구조사와 양전 그에 따른 치읍의 결과로 이해된다.


한편 성종 14년 적·기현제, 지방제도 개편의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군사적 성격의 강화이다. 절도사제도와 같은 군사적 성격의 강하게 내재되어 있다는 점이다. 적·기현 역시 군사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었는데 왕경은 적현, 기현 그리고 적현과 기현을 둘러싸고 있던 關內道에 의해서 중첩적으로 보호받고 있었다.11* 성종 14년 군현제 개편과 적·기현제도의 개편이 군사적 성격을 가지게 된 원인은 거란과의 긴장이 자리하고 있다. 성종 12년 거란의 1차 침입이후 고려와 거란의 군사적 긴장은 지속되고 있었고 이는 부분적으로 고려 지방제 개편에 군사적 성격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종은 거란의 침입이후 元郁을 송나라에 보내어 군사를 얻어 거란에 보복하려 했으나 송의 반대로 실패하였다.12* 이에 성종은 서희를 보내 여진을 몰아내고 長城鎭과 歸化鎭에 성을 쌓아 국방을 강화했다.13* 따라서 적·기현의 설치와 그를 둘러싼 관내도의 설치는 거란과의 긴장이라는 상황에 대한 반영이었다.



1. 『고려사』권 56 지리지 왕경개성부

2. 『세종실록지리지』권 148, 개성유후사

3. 『신증동국여지승람』권 4 개성부

4 .채웅석, 앞의 책, 69~79쪽.

5. 채웅석, 앞의 책, 78쪽.

6. 변태섭, 앞의 책, 242쪽.

7. 윤무병, 「소위 적현에 대하여」, 『이병도화갑기념논총』, 일조각, 1956. 정은정 역시 이견해를 수용하였다.(정은정, 앞의 책, 111쪽)

8. 정학수, 앞의 논문.

9. 채웅석, 앞의 책.

10. 『고려사』 권77, 백관 문산계.

11. 정은정, 앞의 논문, 84~87쪽.

12. 『고려사절요』권2 성종 13년 6월.

13. 『고려사절요』권2 성종 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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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 천년 및 고려 건국 110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 중세고고학고 고려시대 경기의 위상 변화

    일시/ 2018.06.15.(금) 13:00 ~ 18:30

    장소/ 경기문화재단 3층 다산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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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역사문화유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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