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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 張晩先生 影幀 및 功臣錄券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42호





<장만선생 영정 및 공신록권>은 장만張晩(1566~1629)이 1624년(인조2) 이괄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에 녹훈되어 옥성부원군玉城府院君에 봉해질 때 그려진 것이다. 장만은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호고好古, 호는 낙서洛西이다. 이조판서를 지낸 장철견張哲堅의 증손이며, 1591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전라도와 함경도의 관찰사, 형조판서 등의 벼슬을 지냈다.



장만선생 추모제, 2015 ©김포시


초상화는 2점이며, 관복본官服本과 유복본儒服本 각 1점이 전한다. 오사모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장만의 관복본 초상은 진무공신에 녹훈될 때 충훈부에서 그려준 공신도상으로 추정되며 오른쪽 상단에 ‘玉城府院君 贈諡忠定張公晩畵像’이라는 글씨는 사후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은 뒤에 써넣은 것이다. 장만의 행장에는 이괄의 난 때 병든 몸을 수레에 싣고 야전에서 지내다 한쪽 눈을 잃었다고 한다. 왼쪽 눈에 안대를 댄 모습으로 그려진 이유이다. 수두 자국이 두드러진 얼굴의 눈동자는 정면, 코는 측면, 입은 좌우대칭이다. 17세기 공신도상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흉배에는 쌍공작과 모란문이 곁들여져 있고, 1품이 매는 서대犀帶를 착용했다.



장만선생 영정(관복본), 2013 ©경기도박물관



장만선생 영정(유복본), 2013 ©경기도박물관


유복본 초상은 당건唐巾에 심의를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좌상이며, 한 손은 무릎 위에 놓고 다른 한 손엔 부채를 들었다. 이 초상처럼 심의深衣를 입고 지물持物을 든 모습은 유사 사례를 찾기 어려운 형식이다. 유복본은 안대를 하지 않아 괸복본 보다 앞서 그려졌을 수 있지만, 그림의 크기와 화법이 유사하여 공신도상을 그릴 때 함께 그린 것으로 추측된다. 장만은 조선중기의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국방과 정권 수호에 크게 기여하였다. 관복본은 그의 충직하고 엄정한 관료적인 삶의 모습을, 유복본은 관직을 떠나 재야에 머물기를 바라는 은사隱士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장만선생 공신록권, 촬영일미상 ©문화재청


장만이 받은 진무공신교서振武功臣敎書는 장만을 진무공신 1등에 봉한다는 내용이며, 1625년에 내려졌다. 여기에는 모두 32명의 공신이 기록되었는데, 1등에 장만 등 3인, 2등에 이수일 등 9인, 3등에 남이웅 등 20인을 녹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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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시대/ 조선시대(1625년)

    규모/ 3점(영정 2, 록권 1)

    / 관복본 240×113cm, 유복본 253×113cm

    / 공신록권 198×375cm

    재질/ 비단, 종이

    주소/ 영정 : 용인시 기흥구 상갈로 6

    / 공신록권 : 김포시 소재(추정)

    지정일/ 1991.10.19

    소유자/ 인동장씨 태상경공파 충정공 종친회

    관리자/ 경기도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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