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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태조왕건의 고려건국 이야기 (1)

고려 태조 왕건이 활동한 시대상황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노명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1. 고려 태조 왕건이 활동한 시대상황

태조 왕건(王建, 877~943년; 재위 918~943년)은 918년에 고려를 건국하여, 후삼국으로 분열된 혼돈 속의 천하를 통일하고 새로운 시대 질서의 방향을 제시하였으며, 황제국 체제와 ‘해동천하(海東天下)’(후술)의 형성에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후삼국 통일은 많은 연구들로 일찍이 밝혀진 바이나, 황제국 체제와 해동천하는 근래의 연구로 밝혀지게 된 것이다.

  왕건이 활동한 시대는 신라 각 지역에 반란이 일어나 무정부 상태의 약탈과 살육이 광범한 지역을 휩쓸며 구체제의 질서를 무너뜨리던 난세(亂世)의 후반기였다. 극심한 혼란의 한 편에서는 서서히 새로운 질서가 싹트고 있었다.

난세의 혼란은 동아시아 일대에 광범하게 퍼져 있었다. 당(唐) 나라는 망하여 중원(中原)에 반세기 동안 다섯 차례 왕조가 바뀌기를 거듭하고, 중원 외곽은 분열하여 열 왕조가 일어나 경쟁한, 이른바 오대십국(五代十國)의 시대였다. 발해(渤海)도 정치적 혼란에 빠진 후 헤어나지 못하고, 북방족 신흥세력 거란(契丹)에게 망하였다.(925년) 발해가 망한 후 거란의 군사력은 고려를 위협하게 되었다. 거란의 지배력이 잘 미치지 못하는 만주 동부의 생여진(生女眞) 집단들과 발해유민들은 변동성이 큰 자치적인 상태에서 거란 세력의 위협을 받았다. 변화된 사회·경제적 현실과 맞지 않게 된 구체제인 골품제를 고집한 신라는 정치적 현안의 어느 하나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며 점점 더 극심한 정치적 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었다.


2018년 9월 5일에 진행된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강연 모습


왕건이 13살이었던 889년(진성여왕 3)에는 밀린 세금을 독촉하자 생존의 한계선에 내몰린 농민들의 전국적인 지방 반란이 일어나 신라의 통치력은 왕경과 그 주변에 국한되었다. 이후 곳곳에 무정부 상태의 약탈전・살육・납치가 횡행하였다. 최치원이 남긴 금석문에는 곳곳마다 전란과 굶주림으로 죽은 시체가 벌판에 가득 널려 있었다고 한다. 당시의 한 승려는 “사람들이 짐승 같았다.”고 하였다. 해적들에 납치된 신라인들은 바다 건너 중국에서 노예로 팔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과 가족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 보호해줄 실력자들을 찾아 그 아래 모여들고 있었다. 여러 지역에 다양한 출신 배경을 가진 지방호족들이 등장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에게 모여드는 사람들의 신망(信望)을 얻고 그들을 보호하는 능력을 발휘한 만큼 더 많은 사람들을 결집하여 세력을 키워나갈 수 있었다.

전국적 지방 반란이 일어난 지 10년 정도 후에는 대소의 여러 군웅(群雄)들이 각지에 자리 잡고, 그들 중에는 독자적인 나라를 선포한 두 세력도 등장하였다.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와 궁예(弓裔)의 후고구려(後高句麗)가 등장하여, 신라와 대립하는 후삼국시대가 되었다.

상주(尙州) 사람인 견훤은 서남해(西南海)를 지키던 신라의 하급 무관인 비장(裨將) 지위를 발판 삼아 무리를 모아 신라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먼저 신라 왕경 서남방 지역을 공략하여, 이르는 곳마다 호응을 받아 무리가 급증하여 5천 인이 되었다. 이에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를 함락시키고, 왕(王)이라 칭하였다. 이어서 전주(全州)로 나아가 세력을 더 키운 다음 900년에 후백제(後百濟)의 건국을 선포하고, 뒤이어 오월(吳越)과도 외교관계를 열었다.

궁예는 신라 왕실의 서출(庶出)로서 어린 나이에 권력에 희생될 위기를 겪었다. 그는 벽촌에 숨어 성장하여, 세달사(世達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난세를 평정할 뜻을 품고 환속하였다. 그는 북원(北原;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 휘하에 들어가 지휘하게 된 1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공략해 나아가 894년에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이르렀다. 그사이 따르는 무리는 계속 늘어 3,500명이 되었다. 그 후 동북쪽으로 진출하여 철원까지 격파하며 세력을 떨치니, 신라 북서부 지방인 패서(浿西)의 호족들까지 그에게 귀부하였다. 896년에는 철원을 도읍으로 삼아 국가의 모습을 갖추었다. 왕건 집안은 이 무렵 그에게 귀부한 후, 송악으로 도읍을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지금의 경기 지역과 충주・청주까지 판도를 넓히고, 901년(효공왕 5)에 후고구려(後高句麗)를 정식으로 개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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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 2018. 8.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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