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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태조왕건의 고려건국 이야기 (2)

시대적 당면과제와 후삼국의 통일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노명호(서울대학교 명예교수)



2. 시대적 당면과제와 후삼국의 통일


1) 궁예와 견훤의 실패


후삼국 시대의 가장 시급한 시대적 당면과제는 신라의 지배력의 붕괴를 초래한 두 가지 사안의 해결이었다. 하나는 신라 사회 전체를 순식간에 붕괴시킨 농민반란의 원인이 된 민생파탄을 수습하고 그렇게 만든 수취체제의 모순을 극복해 나갈 새로운 방향을 찾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수취체제를 수립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농민반란 후 각지에 등장한 새로운 지배층인 호족세력들을 통합하고 그들이 참여하는 새로운 정치체제를 형성하는 것이었다. 두 현안의 해결 방향을 찾지 못하면, 어떠한 정권이 등장하여도 사회적 정치적 안정을 확보하기 어렵고, 분란과 패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견훤과 궁예는 혼란기에 대세력을 형성하여 나라를 세우고 신라의 구체제를 무너뜨렸으나, 이러한 시대적 당면과제를 해결할 새로운 질서와 체제 모색에는 실패함으로써 점차 내부 정치적 문제와 갈등이 증폭되며 약화・도퇴 되는 길에 들어섰다. 궁예는 초기에 사졸과 고락(苦樂)을 함께 하고 공정무사(公正無私)하게 통솔력을 발휘하여, 휘하의 신망을 얻었다. 승려 생활의 불교 경험을 가진 그는 미륵신앙(彌勒信仰)을 전파하며 이상향(理想鄕)의 도래를 설파함으로써 난세에 불안에 떨며 고통 받는 하층 대중의 큰 호응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능력으로 왕이 되기에 이르렀지만, 시대가 당면한 현실의 큰 문제들에 직면해서는 국왕으로서의 경륜(經綸)과 통치능력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그는 현실 문제의 사실들을 파악하여 해법을 찾기보다는 종교적인 권위를 이용하려 하였다. 그는 자신을 미륵불이라고 함으로써 절대적 권위를 세워 정치적 한계를 돌파하려 하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그가 쌓아 온 통치력의 기반을 무너뜨렸다. 당시 여론의 향배에 큰 영향력을 가진 불교계가 그에게 등을 돌렸고, 목숨이 위험해 직언(直言)을 못하고 거짓을 아뢰게 된 조정 신료들은 그의 통치를 도울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직언을 하는 그의 왕비와 아들들까지 잔혹하게 살해하였다. 그는 이렇게 스스로 고립되어 가장 가까운 사람들조차 불신하며 역모를 의심하다가, 왕건을 추대한 정변에 의해 힘없이 무너져 타도되었다.



"이로써 918년 6월 병진(丙辰; 음력 15)일 고려 태조가 즉위하여 고려 왕조가 세워졌다."



견훤은 신라 정규군의 조직을 경험한 현실의 형세파악에 뛰어난 지략가였다. 그는 현실적 지략가로서 국내에서 세력을 키우는 데는 물론 대외적 외교활동에도 기민하게 공략할 틈을 찾아 재빠르게 움직인 능력자였다. 그러한 능력자인 견훤은 후백제를 건국할 수 있었으나, 그 발전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후백제와 고려의 군사적 충돌은 925년부터 시작되는데, 초기에는 후백제가 우세하였으나, 929년 고창(古昌) 전투 이후에 점차 형세가 역전되어 갔고, 934년 운주(運州; 지금의 홍성) 전투에서 후백제는 결정적인 패배를 하였다. 견훤이 군사적 지략이나 병력에서 열세인 것은 아니었다. 견훤은 “병력은 북군(北軍;고려군)의 갑절이나 되는데도 오히려 불리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도와주는 것 같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2 후백제 견훤. 민현구는 견훤의 이 말이 운주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였을 것으로 보았다.(1992 「한국사에 있어서 고려의 후삼국 통일」 『역사상의 분열과 재통일』 上 일조각) 고려의 군사력은 남쪽의 후백제와 대결하는 동시에 북방의 거란이나 여진족 등에 대비하기 위해 북변 쪽에도 크게 나누어져 있었으므로, 병력 수에 대한 견훤의 말은 사실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군과의 대결에서 외형은 열세가 아니었으나, 견훤의 군대는 점차 처음 같은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다. 설득과 타협보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견훤의 정치 방식에 후백제는 설립자 당대에 이미 내부의 불만과 갈등이 커지며 결속력이 약화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935년 끝내 견훤은 장자 신검(神劍)에 의해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였고, 태조 19년(936년) 신검의 후백제도 견훤이 앞장선 고려의 원정군에 망하고 말았다.



2) 호족연합체제・용현(用賢)・취민유도(取民有度)


왕건의 정치는 시대적 현안에 대한 정책 방향 제시・설득・타협에 비중을 둔 점에서 견훤이나 궁예와 다른 면이 나타난다. 그의 정치는 시대의 현안들에 대한 문제의 핵심을 잘 파악하고, 현실 문제의 핵심과 밀착된 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는 새로운 지배층으로 부각된 각 지역의 호족들을 정치적으로 통합하기 위해 세력만에 의존하지 않고 설득과 타협의 노력을 기우렸다. 그리고 단순한 현실 타협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질서로 발전해 갈 정책 실행의 기준 및 방향을 분명히 제시하고 있었다. 그 기준 내지 방향 설정에 그가 많이 의거하였던 것은 당시 동아시아의 선진정치문화의 중심요소인 유교정치이념이었다.


왕건은 918년 6월 즉위 초부터 학사(學士)들과 국정을 의논하는 것이 기록에 나타나며 『고려사』 권127 반역 환선길전. 같은 책, 권1 세가 태조 원년 6월 경신일. 경신일은 즉위 후 4일 째되는 때이다. 수도를 철원에서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으로 옮긴 919년 정월 경에는 새로운 성격의 관부인 내의성(內議省)을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 종래의 연구들에서 내의성은 대체로 태조 초부터 재위 13년 사이에 설치된 것으로 보았다. 신수정은 개경 천도에 결합된 기사내용의 새로운 해석과 장관인 내의령 임명 사례가 태조대에 있었음을 밝히며 내의성 설치 시점을 태조 2년경으로 보았다.(2015 「고려 초기 내의성의 성립과 운영」 『사학연구』 117) 내의성은 왕에게 정치적 고문 역할을 하고, 간쟁(諫諍)을 담당하여, 유교이념의 정치를 실현하는 기구였다. 태조 재위기간을 통해 내의성의 기능은 계속 커지게 되는 바, 태조 왕건이 세운 고려가 그 전의 왕조들과 다른 새로운 정치를 지속적으로 추구한 결과였다.


왕건의 고려가 추구한 새로운 정치의 구체적인 것들이 호족연합체제와 용현 그리고 취민유도이었다. 그것은 호족들이 통치하는 지방들로 분열된 천하를 새로운 질서의 통합된 국가체제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호족연합체제는 태조 왕건이 각지의 호족들을 새로운 국가의 지배층으로 인정하고 참여하게 설득하고 포섭한 결과로 성립하였다. 그는 즉위하자 각지의 호족들에게 사신을 보내 예물과 겸손한 말로 포섭하려 하였는 바, 귀부(歸附)하는 자가 과연 많았다고 한다. 그의 후비(后妃)는 29명에 달하였는데, 고려 건국 이후에 정략적 목적으로 납비(納妃)된 유력 호족들의 딸들이 많았다. 왕건은 후백제의 군사적 압박에 시달리던 신라에 대해서도 유화책으로 포섭하는 정책을 폈다.


귀부나 혼인관계를 통해 포섭된 호족들은 고려국왕에 대해 충성하는 대신 그들의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이러한 호혜적(互惠的) 관계의 충성과 지배권 인정의 실제 내용은 초기에는 고려 중앙정부의 힘이 지리적 원근 등에 의해 호족들의 지역에 미치는 차이가 컸던 만큼 일률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고려가 후백제와의 세력 대결에서 열세에서 우세로 바뀌고, 다시 후삼국을 통일한 단계에 이르면서, 호족들의 충성과 지배권 인정의 내용은 확고한 군신관계를 바탕으로 조정되어 왕건이 제시한 방향과 기준에 따라 점차 정형화되고 제도화되어 갔다.


지방관의 파견이 사실상 전무(全無)한 상태에서 지방의 호족들의 기존 통치권은 그들이 고려 국가의 지배층의 일원으로서 권리와 의무를 갖는 형태로 조정되어 인정되었다. 그들의 기존 통치권은 중앙정부의 통솔을 받는 자치권으로 인정되었고, 그에 따라 호족들의 기존 행정조직이나 군사조직 등도 대부분 존속되었다. 그들은 중앙정부의 관리로 진출할 수 있는 자격과 기회가 인정되었다.


단, 지방과 중앙의 지배층 중에서도 중앙정부의 관리의 발탁이나 임명에는 인품・경륜・학식을 갖춘 유능한 인물인 현인(賢人)을 등용한다는 용현(用賢)의 기준이 있었다. 왕건이 즉위 후 공포한 첫 번째 인사발령 조서(詔書)의 서두에 발표된 것이 “용현이 급한 일이다”였다. 용현이라는 관리임용의 기준은 왕건이 중요시하여 계속 추구한 원칙이었고, 후대의 왕들에게도 계승되어 과거제의 도입 등으로 보다 구체화되어 갔다. 통합된 국가의 지배층이 형성되고 정부 운영의 성패를 가르는 새로운 관리인사 원칙이 수립됨으로써 왕건은 정치적 질서와 힘을 점차 강화할 수 있었다.


왕건은 지방 호족을 포함한 고려의 지배층에게 백성에 대한 수취(收取)는 법도(法度)에 따라야 한다는 새로운 준칙을 지켜야 한다고 제시하였다. 그는 즉위 조서에서부터 백성들의 요역의 빈번함과 부세의 과중함을 개혁해야 할 것을 지적하였다. 수취율 자체가 과중할 뿐만 아니라 그것도 지키지 않고 초과하는 수탈이 민생을 파탄시키고 있었다. 그는 그 후 정치적인 중요한 계기에 내린 조서에서도 계속 취민유도를 강조하였다. 그 법도는 유교이념의 이상적인 세율인 10분의 1세였다. “고제(古制)”나 “구제(舊制)”의 해석을 신라 고제로 돌아가는 것으로 본 이견도 있으나, 그 용어의 용례로 보아 1/10세인 유교경전에서 말하는 이상적 제도를 지칭한다는 해석이 타당하다.


지배층의 일원이 된 지방의 호족들이나 중앙의 관리들은 취민유도의 기준을 지키도록 점차 통제가 강화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역시 후대의 왕들에 의해 전시과제도(田柴科制度)의 수취율로 자리잡게 되었다.


취민유도를 주축으로 한 민생안정책은 후삼국 통일 전쟁 기간에도 부단히 추구되고 있었다. 그 민생안정책에 의해 서서히 사회가 안정되어 감으로써 정치적 질서의 회복과 함께 군사적으로도 정예화된 힘을 키워, 후삼국 통일의 대업의 기틀을 만들 수 있었다.




"신라중앙귀족의 눈으로 보면, 왕건은 변방출신에 불과했다. 그러한 왕건이 시대적 현안의 핵심을 파악하고, 유교정치이념의 이상적인 제도를 참고하며 먼 후대까지도 남을 정책 방향을 제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 배경에는 그를 돕고 뜻을 모은 경륜 있는 훌륭한 신료들의 도움이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 해도 왕건 자신이 당대의 유능한 현사(賢士)들을 알아보고 최종적으로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소양과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


왕건은 송악군(松嶽郡; 지금의 개성)에 뿌리를 둔 호족 출신이었다. 그는 지방을 이끈 호족가문에서 성장하여 호족과 지방민의 실태를 가깝게 접하며 깊이 인식하였다. 그리고 지방학교의 보급이나 불교 사원의 승려 등을 통한 한학교육에 의해 지방에도 유교경전을 중심으로 한 한학적 소양을 갖는 이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특히 송악군은 광대한 황해연안 항로의 요지이자, 한반도 전역과 대륙을 오가는 육상교통로의 중심지이기도 하였다. 각종 물자・서적・인물・국내외 정세에 대한 정보가 오가는 곳이었다. 『고려사』의 왕건 선대 전설에 의하면, 그의 선대는 송악의 지리적 입지를 활용한 해상(海商) 활동을 통해 부(富)를 쌓은 지방 호족세력이기도 하였다. 교역을 통해 대외적인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그의 집안은 그곳을 오간 국제적인 선진 문물, 국내외의 정세와 동향에 대한 각종 정보・인물에 개방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환경은 지방출신이었던 왕건이 유교정치문화 등 당나라 선진문물과 함께 국제정세를 포함한 시대 상황에 대해 넓은 안목과 지식을 갖추는 배경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018년 9월 5일에 진행된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강연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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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기획/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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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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