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역사에 횡포에 맞선 아름답고 슬픈 판타지

문학-고전-산문 분야 『금오신화』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오신화』

김시습 지음, 이지하 옮김, 민음사, 2009







역사에 횡포에 맞선 아름답고 슬픈 판타지


권순긍 -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세조정변에 저항하여 ‘생육신’이라 불리며 평생을 방외인(方外人)의 길을 걸었던 매월당 김시습. 그가 31세 되던 1465년(세조 11) 경주의 금오산(金鰲山·지금의 남산) 용장사(茸長寺) 터에 ‘매월당’을 짓고 7년 동안 틀어박혀 쓴 『금오신화』는 모두 5편으로 구성된 단편소설집이다. 현재 윤춘년이 편찬한 조선판본은 ‘갑집(甲集)’으로 적혀 있어, ‘을집(乙集)’, ‘병집(丙集)’, ‘정집(丁集)’ 등이 더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모델이 됐던 『전등신화』처럼 각 5편씩 모두 20편 정도의 규모로 추정된다.



김시습이 책을 다 지은 뒤에 석실에 감추어 두고 말하길 “후세에 반드시 나를 알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한다. 그래서인지 김시습이 죽은 뒤 『금오신화』는 행방을 알 수 없었고, 424년 뒤인 1927년 육당 최남선이 일본에서 출판한 『금오신화』를 발견해 〈계명〉 19호에 소개함으로써 그 진면목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 뒤 1999년 중국 다롄(大連) 도서관에서 윤춘년이 편집하고 중종~명종대(1506~1567년) 조선에서 목판으로 찍은 조선판본 『금오신화』가 발견되었다. 운명이 기구한 책이다.


이 책은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 만복사의 저포놀이)」 「이생규장전(李生窺墻傳 : 이생이 담 안의 아가씨를 엿본 이야기)」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 취해서 부벽정에서 노닌 이야기)」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 남쪽 지옥에 간 이야기)」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 용궁 잔치에 초대받은 이야기)」의 5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들은 개성, 평양, 남원, 경주 등 국내의 유서 깊은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생규장전」만 고려 말 배경이며, 대부분 작가가 살았던 조선 초로 설정되었다. 이 책의 배경이 되는 곳으로 보아 김시습이 20대에 10년을 떠돌면서 그의 발길이 많이 머물렀던 곳임이 분명하다. 게다가 주인공들은 김시습이 그렇듯이 하나 같이 뛰어난 재주를 지니고 있음에도 현실에서 인정받거나 쓰이지 못했던 불우한 인물들이다. 더욱이 대부분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한다. 김시습은 왜 이런 ‘사람들이 들어보지 못했던 이야기’인 전기소설(傳奇小說)을 지었을까?


그는 7년 동안 금오산에 틀어박혀 세조 정변이라는 ‘세계의 횡포’에 저항하며 글을 썼다. 「만복사저포기」에 나왔던 왜구나 「이생규장전」에서 홍건적의 칼날 앞에 여주인공이 처참하게 살해됐듯이 김시습에게 세조 정변도 그러했으리라.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홀로 폭력적이고 거대한 권력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가능한 방법은 현실적으로 여기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상상의 세계로 들어가 죽은 여주인공을 다시 살려내어 저항하는 것이다. 그래서 남은 생을 끈질기게 이어가야 한다. 세조 정변으로 현실에서는 패배했지만 소설 속에서는 이를 다시 살려내 여기에 맞선다. 너희는 우리를 죽였지만 나는 결코 죽지 않으리라고 마음먹는다. 이처럼 김시습에게 소설을 쓰는 일은 세계의 부당한 횡포에 저항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김시습이 판타지인 전기소설에 주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전기소설의 전범이 되는 명나라 구우(瞿佑)의 『전등신화』를 보고 자신이 하고 싶은 세조 정변의 부당함을 얘기할 수 있다고 여겨 전기소설의 양식을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전등신화』를 읽고 쓴 시 「전등신화 뒤에 쓰다(題剪燈新話後)」에서 “말이 세상 교화에 관계되면 괴이해도 무방하고/ 일이 사람을 감동시키면 허탄해도 기쁘니라”고 했다. 세상을 깨우치고 또한 감동을 줄 수 있다면 그것이 비현실적이고 황당한 판타지라도 좋다는 의미다. 즉 환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풀어내겠다는 뜻이다. 전기소설의 특징은 바로 이런 비현실성과 낭만성에 있다. 부당한 현실의 횡포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김시습은 전기소설의 양식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 시에서 “나의 평생 뭉친 가슴을 쓸어 없애 주리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금오신화』를 지으면서(題金鰲新話)」라는 시에서는 “한가하게 인간들이 못 보던 글 지어내네”라고 하기도 했다. 정감을 드러내는 시와 같은 장르로는 그런 사연을 도저히 담을 수 없기에 새로운 장르인 소설이 필요했다. 바로 우리 문학사에서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는 그렇게 해서 탄생되었다.


작품 속에서 갑작스러운 세계의 횡포에 맞서는 방법으로 우선 왜구나 홍건적에게 희생된 여인을 살려내지만 그다음이 문제였다. 여귀가 되어 돌아온 처녀나 아내를 어찌할 것인가? 하지만 남자 주인공은 그것을 문제 삼지 않는다. 「이생규장전」의 그 장면을 보자.


“이경(二更)쯤 되어 달빛이 희미한 빛을 토하며 지붕과 들보를 비추었다. 그런데 회랑 끝에서 웬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멀리서부터 들려오더니 차츰 가까워졌다. 발소리가 이생 앞에 이르렀을 때 보니 바로 최씨였다. 이생은 그녀가 이미 죽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너무나 사랑하는 나머지 한 치의 의심도 없이 물었다.


‘당신은 어디로 피난하여 목숨을 부지하였소?’”


귀신인 걸 알고 있음에도 오히려 반가워하는 것이다. 죽은 여주인공도 “만약 당신이 아직도 옛 맹세를 잊지 않으셨다면 저는 끝까지 잘해보고 싶어요”라며 “당신도 허락하시는 거지요?”하고 묻자 이생은 “그건 바로 내가 바라던 바요”하고 흔쾌히 받아들인다. 죽음도 뛰어넘는 사랑이라고 할까. 그리고 서로의 사랑을 몇 년 동안 이어간다. 더 놀라운 건 몸은 비록 이승과 저승으로 나뉘었지만 “잠자리의 즐거움은 예전과 같았”으며, “이때부터 인간사에 게을러져서 비록 친척이나 손님들의 길흉사에 하례하고 조문해야 할 일이 있더라도 문을 걸어 잠그고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항상 아내와 더불어 시를 지어 주고받으며 금실 좋게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고한다. 이생에게는 아내가 ‘세상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현실의 공간에서 오랫동안 지속할 수가 없었다. 이승과 저승의 길이 다르기에 몇 년의 동거 뒤 남주인공은 단절된 세계의 저편에서 저승으로 향하는 여주인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자신도 뒤를 따른다. 아내가 없는 이승에서의 삶은 의미가 없기에.


여귀가 되어 돌아온 아내를 받아들여 같이 산 것도 대단하지만 아내가 이승을 떠나자 그리워하는 마음이 깊어져 병을 얻어 몇 달 뒤 세상을 뜬 것이 더 감동적이다. 죽음조차도 뛰어넘는 대단한 사랑인 것이다. 그런데 「이생규장전」에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지 않고 ‘절의(節義)’라고 표현했다. 마지막에서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마다 애처로워하고 탄식하여 그들의 절의를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聞者 莫不傷歎而慕其義焉)”라고 썼다. 절의라는 말은 사회적이고 정치적 언어다. 그렇다면 이 사연은 곧 남녀의 사랑 이야기를 정치적 담론으로 확대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평생 방랑하며 중으로 살았던 김시습은 죽음도 뛰어넘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조선 초에 벌어졌던 세계의 횡포, 곧 세조 정변에 대한 자신의 분명한 입장을 말한 것이다.


그래서 16세기 어숙권이 『패관잡기』에서 지적했듯이 “전등신화를 답습했지만 생각하는 것과 언어 표현이 보다 뛰어나니 어찌 청출어람에 그칠 것인가”라고 할 정도로 독창적이다. 『전등신화』의 대부분 작품은 행복한 결말로 끝나고 비현실적인 설정은 하나의 흥미소로 작용하지만, 『금오신화』는 거의 비극적이며 그것은 세조 정변이라는 부당한 세계의 횡포로 생의 단절을 거부하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세조 정변에 저항하여 7년 동안 김시습이 소설을 써 말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죽음도 갈라놓을 수 없는 사랑의 약속!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군주이거나 자신이 믿고자 했던 당시의 이념이어도 관계없을 것이다. 같은 불자의 길을 걸었던 만해 한용운의 시 「님의 침묵」에서 말한 ‘님’과 같은 존재가 아니겠는가. 그 님은 어쩌면 죽음으로써 완성되리라. 그러기에 더 아름답고 처절하다. 여주인공의 독백처럼 “절의는 중하고 목숨은 가볍다(義重命輕)”라고 했으니. 아, 선생이여! 천년의 선생이여!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유의 미학, 금오신화』

김수연 지음, 소명출판, 2015


『한국 전기소설의 미학』

박희병 지음, 돌베개, 1997


『김시습 평전』

심경호, 돌베개, 2003





권순긍 - 세명대 미디어문화학부 교수


1990년 성균관대학교에서 활자본 고소설을 연구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1993년부터 현재까지 세명대학교 미디어문화학부 한국어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며 연구하고 있다. 2008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엘테 대학교에 한국학과를 창설하고 헝가리 학생들에게 한국문학과 한국문화를 가르친 바 있다. 저서로는 『활자본 고소설의 편폭과 지향』『고전소설의 풍자와 미학』『고전소설의 교육과 매체』『고전, 그 새로운 이야기』 등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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