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안탄대선생 묘 安坦大先生 墓

경기도기념물 제83호





조선 선조의 외증조인 안탄대安坦大(생몰년 미상)의 묘이다. 안탄대의 본관은 안산安山이고 자호는 명확하지 않다. 중종(1488~1544)의 장인이며, 후궁인 창빈안씨昌嬪安氏(1499~1549)의 아버지이다. 창빈안씨는 영양군永陽君·덕흥군德興君의 자당이며, 덕흥군은 선조의 생부이므로, 안탄대는 선조의 외증조가 된다. 안탄대는 1506년 중종 반정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고, 적순부위迪順副尉에 올랐으며, 사후에 우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안탄대 묘표에 의하면 그의 묘역은 선조 때 석물을 세우고 묘지기를 두어 금벌禁伐을 하였으나 연대가 오래되고 묘역을 보수하지 않자 몰래 묘를 매장하는 투매자偸埋者가 있게 되었다. 이에 능원대군綾原大君과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이 상의하기를 ‘창빈의 후손된 자는 모두 안씨에서 나온 셈인데 그 손자가 되어서 묘를 다스리지 않아 타인으로 하여금 투매하게 하였으니 이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고는 이를 효종께 아뢰자 효종은 투매자를 법으로 다스려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고 안탄대의 묘를 봉축하였다. 또 묘지기 5인을 두었고, 방예로 봉사손이 되었던 사람에게 묘제를 맡도록 명하였다.

안탄대 묘표의 비문은 1656년(효종7) 외손 계열인 신최申最(1619~1658)가 찬撰하고, 신승申昇이 글을 썼다. 따라서 안탄대의 묘는 선조 대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이후 효종 대인 1656년경에 재정비된 것이고 석물도 이때 다시 세운 것이다.


안탄대선생 묘,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안탄대의 묘는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반월지구내에 있으며, 증 정경부인 황씨와의 쌍묘이다. 묘역은 2계階로 나뉘었으며 상계에는 봉분 2기, 묘표, 혼유석을 배치하였고, 중계에는 상석, 향로석과 망주석 2기, 문인석 2기를 배치하였다.

묘표는 쌍분의 가운데에 1기가 배치되어 있다. 비제는 ‘증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우의정겸령 경연사안공지묘 증정경부인황씨 부좌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 經筵事安公之墓 贈貞敬夫人黃氏 祔左’이다. 묘표의 형태는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으로 상단은 폭이 넓고 하단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17세기 중반 이후 크게 유행한 형태이다. 대석의 윗면에는 연판문을 간략하게 음각하였고, 앞뒷면에는 당초문을 새겼다. 비신은 대리석이고 대석은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석은 별도의 고석 없이 지대석으로 받침을 삼고, 중간부분부터 계체석에 걸쳐놓았다. 상석은 마정질을 한 상태이며, 사방을 모줄임하였다. 상석 정면으로는 4각형태의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안탄대선생 묘비, 문인석(좌), 망주석,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망주석은 하계에 2기를 배치하였으며, 원수圓首부터 대석까지 모두 한 돌로 되어 있다. 운두雲頭에는 여의앙련을 조각하였으며 염의簾衣에는 커다란 연주문을 돌리고 하단에 8각의 칸만 구획한 후 당초문을 조각하였다.

문인석은 하계에 2기를 배치하였다. 형태는 금관金冠을 쓰고 조복朝服을 입은 금관조복형이다. 금관과 얼굴, 홀을 매우 크고 두껍게 강조하여 전체 비례의 약 1/3을 차지하고 있다. 금관의 무武부분과 뒷면, 조복의 앞·뒷면에 장식한 폐슬과 후수는 내부 문양없이 선각으로 간략화하였다. 홀을 잡은 손과 옷자락은 완전히 평면화되어 있으며 세부장식이 생략되었다. 17세기의 형식적이고 도식화된 전형적인 양식이다.


안탄대선생 묘, 2017 ©경기문화재연구원


전체적으로 묘제는 17세기 중반기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석물의 종별과 형태, 양식도 17세기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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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시대/ 조선시대

    규모/ 1기

    / 쌍분, 묘비 1기, 상석 1기, 향로석 1기, 망주석 1쌍, 문인석 1쌍

    주소/ 안산시 단원구 성곡동 615-1

    지정일/ 1985.09.20

    소유자/ 사유

    관리자/ 안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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