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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모두 자신만의 바둑을 두다

사회 분야 『미생』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생』

윤태호 지음, 위즈덤하우스, 2012






모두 자신만의 바둑을 두다


임지희 - 웹툰PD





‘고양이 손’이었다. 굴지의 대기업 원 인터내셔널 첫 출근 날 장그래의 포지션은 딱 저 정도였다. 해외 바이어와의 미팅에 출석해야 할 오 과장이 도착할 때까지, 바이어가 불쾌하게 자리를 뜨지 않을 어떤 재주라도 부리며 시간을 때우는 일이었다. 아홉 살부터 오직 바둑만 두었다는 사실은 철저히 숨겨져, 후원자의 배려로 인턴으로 입사한 첫날 장그래는 해외 바이어와 마주 앉아 종이에 선을 긋고 동그라미를 그려 바둑을 두었다. 입단에 실패하고 바둑에서 멀어지려 애썼던 지난 몇 년, 난데없이 직면한 위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바둑을 꺼내 들었다. 다시금 새로운 대국을 시작한 것이다. 원 인터내셔널 vs 장그래 아니, 과거의 장그래 vs 내일의 장그래.


2012년 1월 포털사이트 다음 만화 속 세상에서 연재를 시작해 2013년부터 단행본 출간, 2018년 현재 2부 연재가 진행 중인 <미생>은 시작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2014년 동명의 드라마가 방영되자 국민적 인기를 누리는 명작으로 자리 잡았다. 흙수저에 스펙 제로인 청년 장그래가 단 하나 쥐고 있는 장기인 바둑을 통해 세상을 보며 대기업에서 어엿한 사회인으로 성장해나가는 이야기. 잠재력은 있으나 능력치가 짧은 주인공에게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고, 성장을 돕고 경쟁할 동료가 생기며, 시련에 좌절하기도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라 끝내 다시 일어나 최고가 된다는 소년 성장물의 전형적인 단계를 밟아가는 <미생>은 그 판을 판타지 세계에서 지구를 구하는 이야기 대신 한국 서울의 한 대기업 영업 3팀으로 갈아 끼웠다.


판을 바꾸니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종합상사의 영업팀에서 일하기에 자격이 너무 모자랐던 장그래는 많은 독자가 “판타지 같다”고 말했던 최고의 상사 오 과장과 김 대리의 트레이닝을 받으며 성장한다. 바둑을 하면서 얻은 유산인 매사에 진지하고 상대를 살피며 신중한 성격은 작은 업무라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어 다음 단계로 전진하기 위한 자양분이 된다. 치열했던 인턴십 과정과 회사에 남느냐, 떠나느냐를 결정하는 입사 프레젠테이션도 실력 이상으로 잘 치러낸다.


그리고 그는 인턴에서 ‘원 인터내셔널 2년 계약직’으로 입사한다. 프레젠테이션에서 빛을 발했던 다른 인턴 동기들은 정규직으로 채용되었다. 대학 시절 치열하게 공부하고 무너지지 않을 스펙으로 무장한 동기들과 장그래가 받아 든 결과의 차이. 이건 만화지만, 현실의 중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만화라는 신호였다. 현실의 무게감은 1부 총 아홉 권이란 긴 호흡의 이야기 속 곳곳에 포진해 있다.


『미생』을 위해 윤태호 작가는 대기업 직원과 임원을 정기적으로 만나 알고 싶은 모든 것을 취재했다고 한다. 로비의 문을 통과해 사무실로 들어와 어디에 옷을 걸고 가방은 어디에 두는지부터 일상적으로 쓰는 업무 용어나 협력 업체들과의 커뮤니케이션 방법, 하다못해 직급의 고저 차이까지도. 평범하게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출근해 비슷한 업무를 하며 어떤 날은 성공에 기뻐하다가 다음 날에는 사소한 실수로 혼나기도 하고,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닌다며 울화 섞인 푸념을 늘어놓다가도 성과급 지급 소식에 즐거워하는 것이 일상이다. 지켜나가야 할, 목표인 일상. 한 번도 직장생활이란 것을 경험하지 못한 작가는 취재를 통해 겪어야만 알 수 있을 세계를 세밀하게 묘사해냈다. 프레젠테이션 에피소드를 위해서 프레젠테이션 전문가를 찾아 인터뷰하고, 임원의 입장과 태도, 결단이 그려져야 할 때는 임원 코스를 밟고 있는 이를 만나 집요하게 질문을 퍼부었다. 실로 방대한 양의 취재와 정보 수집이 이루어졌다. 탄탄한 취재는 작품에 자신감을 더하고 리얼리티를 부여하지만 ‘하나라도 더 소재로 쓰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소재와 정보를 충실하게 전하는’ 전개로 매몰되기 십상이다.


최초의 기획 단계에서 『미생』은, 바둑의 고수가 사회 초년생 혹은 보통 사람들에게 조언을 하며 일침도 날리는 자기계발 만화의 형태였다고 한다. 그 기획이 3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바둑 입단에 실패한 사회 초년생이 처음부터 사회를 하나씩 배워 나가며 자신만의 새로운 바둑을 두는 이야기로 바뀌었다. 여기에 물리적으로 방대한 양의 취재 자료를 잘 끼워 넣기만 해도 장그래가 ‘한 사람 몫의 불빛을 밝히는’ 구성원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작품은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윤태호 작가는 소재의 욕심 대신 캐릭터 하나하나에 직급과 개성에 맞는 서사를 안겨주고 드라마를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협력 업체의 실수에도 무골호인인 박 대리가 장그래의 한 마디가 계기가 되어 어제까지와 다른 나로 거듭났던 것. 현장의 일만을 중시하며 책상머리 앞에서 서류나 만지고 있는 사무직을 짐짓 무시했던 입사 동기 석율의 마인드를 그래의 멋진 프레젠테이션으로 바꾸어 놓은 것. 자신 있게 제출한 기획서가 채택되지 않자 ‘무엇을 잘못했는지가 아닌 무엇을 만족시키지 못했는가’를 고민하며 일을 찾아내는 안영이의 치열함에 자극받아, 요르단 사업의 비리를 밝혀내고 다시 그 사업을 팀에서 추진하도록 일을 만들어낸 것. 캐릭터들이 드라마를 자아낼 수 있을 만큼의 양 만큼만 정보를 흘려 넣었기에 오히려 “너무 현실적이다” “공감 간다”는 평이 나올 수 있었다.


혹자는 『미생』을 ‘우파의 회사 성공학’ ‘대기업 시스템 안에서만 유효한 감동’이라고도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대기업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미생’인 장그래가 ‘완생’으로 나아가려 애쓰는 이야기를 담았으니까. 장그래는 주어진 일을 거부하거나 회사의 규정을 깨고 독단적으로 일을 추진하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회사에서 부여한 일을 잘 해내기 위해 야근과 철야를 불사하면서도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기다리는 어머니를 애틋하게 대하고, 혼자서 상대와 동시에 바둑을 두는 다면기(多面棋)를 둔다. 그토록 멀어지고 싶고 도망치고 싶었던 바둑이지만 바둑으로 세상과 사람을 본다. 익숙한 것들을 소중하게 끌어안고, 매일 아주 조금씩이라도 전진해 시스템 안에 잘 자리 잡아 남들과 같은 일상을 지켜나가려 할 뿐이다. 주어진 승부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연재 중인 『미생』 2부는 원 인터내셔널을 떠나 스타트업 ‘온길인터내셔널’의 이야기가 진행 중이다. 오 차장이 된 오 과장은 원 인터를 떠나 믿을 수 있는 옛 직장상사와 함께 온길인터내셔널을 세웠고, 2년 계약직 직원이었던 장그래는 온길의 사원이 되었다. 영업 3팀의 든든한 허리였던 김 대리도 고심 끝에 합류한다. 영업 3팀의 의기투합은 숨 막히는 현실에 한 줄기 빛이자, 기다렸던 판타지다. 이제 대기업과 같은 명성과 인프라는 기대할 수 없다. 한갓진 세상에 맨몸으로 싸워서 전보다 더 큰 성취를 이뤄야 하며, 주어진 새로운 일상을 지켜내야 한다. “원 인터에서의 하루하루는 위, 아래, 좌, 우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로 채워졌다면 온길에서의 하루하루는 숫자 끝자리와의 사투와, 사기와의 싸움으로 채워졌다.”


다시금 모두가 자신만의 새로운 바둑을 두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는 모두는 승리를 꿈꾼다. 우리도 그러하다. 미생에서 완생을 향한 우리 모두의 여정을, 『미생』은 함께하고 있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아웃라이어』

말콤 글래드웰 지음, 노정태 옮김, 김영사, 2009


『안티 레이디』

윤지운 지음, 서울문화사, 2011


『대국』 박치문 지음, 위즈덤하우스, 2015





임지희 - 웹툰PD


만화와 음악과 소설과 각종 서브컬쳐에 둘러싸여 살다가 이러다 만화를 그리고 소설을 쓸 수 있게 될 줄 알았지만, 창작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기자 생활을 2007년에 시작했다. 대중문화잡지 〈브뤼트〉 등을 거쳐 현재 누구보다 빠르게 많은 만화를 보는 웹툰 PD 생활 중이다. 저서로 『좀비사전』(공저)가 있다.



information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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