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 페미니즘

사회 분야 『페미니즘의 도전』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교양인, 2013







상대적이고도 절대적인 페미니즘


이하영 - 북칼럼니스트




열두 해 전 일이다. 내가 어떤 매체에 청탁받은 원고를 보냈을 때 담당 편집자가 밝힌 소감이 이랬다. “소녀 취향이네요.” 나는 이 말을 “기대했던 수준에 미달한다, 역시 여자는 어쩔 수 없군”이라고 번역해서 이해했다. 내가 너무 까칠했나. 어쨌건 ‘소녀 취향’이라는 표현이 칭찬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했다. ‘소년 취향’이라고 했다면 덜 불편했으려나, 되짚어 생각해보았지만 이 업계에 ‘소년 취향’이라는 말은 없다.


나는 지방대를 나와서 서른이 넘어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에 왔다. 그 후 내 이름 앞에는 여러 ‘청운의 꿈을 품고 지방에서 상경한’이라는 말이 십 년이 넘도록 수식어처럼 붙어 다녔다. 그렇게 소개될 때마다 나는 말 없이 웃었지만, 여러 번 반복되는 동안 그 말이 단순한 ‘사실’이 아님을 느꼈다. 여성들은 나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건 남성의 언어였다. 여자가 감히 ‘청운의 꿈’을 품은 것도 같잖은데 뒤늦게 지방에서 ‘뭐 먹을 게 있다고 뛰쳐’ 올라온 이유가 뭐냐는 힐난이 그 말속에는 짙게 묻어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말한 사람도 있다.


서울이 고향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들, ‘인서울 대학’ 출신인 게 너무나 당연한 사람들, 마치 그 외의 사람들이 존재하는 세상은 없다는 듯이 느끼는 사람들, 자신의 주류성에 자부심을 느끼는 그들에게 나는 불편함을 주는 존재였다. ‘이 사회에서 내가 너보다 더 쳐주는 레떼르(상표)를 갖고 있는데 왜 너 따위가 감히 나와 동류의 일을 하고, 여기 이 자리에 같이 있는 것이지?’라는 무언의 질문 속에 나는 고독하게 서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내가 속해 있다고 믿는 사회에서 대부분 ‘여성’의 자리를 담당해왔던 것 같다. 최소한 그렇게 느꼈고 때로는 자처했다. 그게 불필요한 혼란과 긴장을 막는다고 생각해서.


언젠가 오래 함께 일한 나의 동료가 누군가에게 나를 평해 말하기를 ‘참 여성스럽다’고 했다는데, 당시에 나는 그 말이 내포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참으로 뼈아프게 정확한 표현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대한민국에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의 첫 자리에 ‘2’를 부여받았으며, 지방대를 나왔고, 경력을 쌓는 내내 비정규직 또는 프리랜서로 일했으며, 현재까지 무주택자다. 뒤늦게 한 결혼도 나의 비주류성을 희석시켜주지는 못했는데 ‘무자녀’라는 비주류성만 하나 더 추가됐다. 다시 말해 내가 이해한 ‘여성스러움’이란 것은 이 사회가 암묵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비주류적’인 성질을 내가 대부분 가지고 있음을 받아들이고 고분고분 스스로를 낮추며 살아가는 태도를 말한다.


우리 사회에서 남자 아닌 여자는 모든 면에서 사회가 정한 평균에서 벗어난 특성을 보이면 사회적 비주류성을 표하는 낙인이 자연스럽게 추가된다. 여자는 또래 여성의 평균보다 키가 커도 작아도, 몸무게가 많이 나가도 적게 나가도 하자가 있다는 듯한 시선을 받는다. 목소리가 크거나 힘이 세면 “남편 찜쪄먹겠다”는 소리를 듣고, 목소리가 작거나 몸이 약하면 “그렇게 약해빠져서 애나 낳겠냐”는 소리를 듣는다. 남편보다 가방끈이 긴 것은 시댁의 근심거리가 되고 남편보다 경제력이 달리는 것은 독박 가사의 근거가 되며 남편이 있는데 자식을 낳지 않은 것은 목소리를 빼앗긴 인어공주의 처지를 평생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는 의미다. 지금 당장 물거품처럼 어디론가 사라져버려도 아무도 나의 거처를 묻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도 어딘가에서는 여성이 아닌 남성의 자리를 차지했다. 거칠게 호출해보자면 나보다 나이 어린 동료 앞에서,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한 어릴 적 친구에게, 나를 낳고 길러내느라 청춘을 바친 어머니에게 그렇다. 이 사람들에게 나라는 사람은 가까이 가기 어렵고 말을 거는 것도 망설여지는 사람이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다. 내가 저지른 수많은 언어적 비언어적 폭력들을 기억하고 있으며, 기억하는 것보다 무책임하게 잊은 것이 더 많다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은 힘의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회가 어떤 기호(성, 계층, 나이, 지역, 학력 등)에 보다 비싼 값, 많은 권리, 더 큰 힘을 부여한 까닭에 서로를 존중하고 약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더불어 살아가야 할 사람들을 물리적, 감정적, 인격적으로 뺏고 빼앗기는 불평등한 관계로 만들고 이 관계를 고착시키고자 불필요한 혐오를 만들어왔다. 매우 비극적인 상황으로 더 이상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심화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


나는 내 안의 의식적, 무의식적인 남성성을 견제하고자 나를 ‘여성’이라는 코드로 엮어 자기 밑으로 내리누르려 하는 모든 억압에 저항한다. 그것이 지금 여기의 내가 아는 페미니즘이다. 때로 밤잠을 설치고, 가슴속에 응어리를 안고 혼자 끙끙대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논리적인 불평불만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던 내가 이 지면을 빌어 이만큼이나마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이 책 덕분이다.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나보다 힘 있는 자를 ‘여성성’으로 감싸고 나보다 약한 자에게 ‘남성성’으로 상처 줬던 나를 돌아보게 했고, 그런 나를 용서하게 했다. 이런 나를 이만큼 키워준 사회와 크고 작은 공동체에 감사하는 마음을 회복하게 했다. 나를 키워준 사회와 공동체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저항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일깨워주었다. 나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규정함으로써 겪게 되는 여러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게 했다. 페미니스트는 어딘가에 완성되어 고착된 이데아 속의 존재가 아니라 한쪽이 다른 한쪽을 ‘다름’이라는 불분명한 기준을 두고 폭력적으로 억압하고 착취하는 힘의 불균형을 해소해야 한다는 데 동의하며 그 방법을 찾는 길에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을 말한다고, 이 책을 읽은 지금 여기의 나는 생각한다. 상대적 약자와 그의 편에 선 자의 목소리에 예민한 영혼의 피아니즘, 그것이 페미니즘이라고 정희진의 책을 읽은 지금 여기의 나는 생각한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멀고도 가까운』

리베카 솔닛 지음, 김현우 옮김, 반비, 2016


『다섯째 아이』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민음사, 1999


『마틸다』

로알드 달 지음, 퀀틴 블레이크 그림, 김난령 옮김, 시공주니어, 2018







이하영 - 북칼럼니스트


방송작가, 북칼럼니스트로 활동하며 영화, 음악, 책에 관한 글을 쓴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에 ‘북 인 시네마’, ‘예술가의 서재’, ‘시네마레터’를 연재했고, 각각 『조제는 언제나 그 책을 읽었다』『예술가의 서재』『영화를 보다 네 생각이 났어』라는 책으로 출판되었다. 현재 ㈜에듀니티에서 편집주간으로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참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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