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그러나 역사는 변주된다

인문 분야 『병자호란』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병자호란』

한명기 지음, 푸른역사, 2013








그러나 역사는 변주된다


김형민 - SBS CNBC PD






어느 나라든 마찬가지겠으나 우리 역사에서도 경쟁하는 강대국 사이에서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눈치를 보거나 중립의 지혜를 발휘하며 등거리 외교를 펼쳐야 했던 예는 적지 않다. 중국의 남북조시대 화북을 통일한 북위와 남쪽의 왕조 송의 구애와 견제를 동시에 받던 장수왕대의 고구려가 그렇고, 송과 거란 그리고 역시 남송과 금 사이에 끼었던 고려가 그러하며 후금과 명의 틈바구니에 숨 막혔던 조선 또한 그렇다.


고구려 장수왕은 남북조의 분열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실리를 찾았다. 화북의 강자로 떠오른 북위에 칭신하는 한편 남쪽의 송나라와도 관계를 유지했다. 유목민족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의 기병대에 주눅들어 있던 송나라에 말 800필을 보내는 전략적 ‘수출’을 감행하기도 했고 북위의 북방에 있던 유목민족 유연까지 끌어들여 북위를 ‘느슨하게’ 압박하기도 한다. 북위는 고구려의 국세를 인정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데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장수왕이 죽었을 때 북위 효문제는 흰 관을 쓰고 베옷을 입고 조의를 표할 정도였다. 고구려의 ‘등거리 외교’는 그렇게 힘과 지혜를 바탕으로 성공했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중원의 송을 상대할 때 고려를 무척 껄끄러워했다. 자기네 사신을 귀양 보내고 선물한 낙타를 굶겨 죽인 고려가 호락호락 고개를 숙이지 않자 결국 침공을 감행한다. 그러나 거란은 고민이 많았다. 주적은 고려가 아니라 송이었던 것이다. 이때 나온 것이 서희의 담판이다. 서희가 그를 막아선다. 서희는 적장 소손녕과의 담판에서 장기전을 꺼리던 거란의 아픈 곳을 찔러 외교적 승리를 얻어낸다. 거란과 통교하겠다는 것을 명분으로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낸 뒤 강동6주를 설치한 것은 이후 서희가 세운 최대의 공이었다. 중원을 차지하려는 거란은 여진족 세력권이던 압록강 유역으로 고려를 자기네 편으로 만든다면 이익이라고 봤고, 고려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이 지역을 차지하고 요새화한다. 강동6주는 이후 거란의 침공을 막아낸 든든한 밑바탕이 된다.


이렇듯 막강하지 않더라도 무시당하지 않을 정도의 힘과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챙기는 지혜는 한반도에 세워진 왕조의 숙명 같은 것이었다. 이 숙명을 거부할 때 대개 강토는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 위기가 우리 역사상 최악으로 발현된 사건이 바로 병자호란이었다. 『병자호란』은 동서고금의 역사와 성현의 말씀을 줄줄 꿰었던 조선의 ‘선비’들이 그리고 그들의 ‘조정’이 얼마나 치명적으로 무능했는지, 어떤 경로로 나라와 백성을 호랑이 아가리로 몰고 갔는지에 대해 생생하게 설명하고 있다. 지혜가 없으면 힘이라도 있어야 했고 힘이 없으면 지혜라도 발휘해야 하는데 그 둘을 골고루 저버리고 앉아서 최악의 국면을 맞이한 불민한 지배층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 덕에 날벼락을 맞아야 했던 불운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말이다.


물론 당대를 사는 사람들의 판단 착오는 흔한 일이다. 후금이 불길같이 일어난다고 해서 명나라가 망하리라는 예상을 쉽게 할 수 없었고, 명나라의 황제가 몽골 오이라트부의 포로가 된 토목보의 변 같은 일이 있었어도 명나라는 끄덕도 없었던바, 후금(청)이 흥성하여 중국 대륙을 차지할 것을 예상하지 못했다 하여 비난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문제는 판단에 따른 행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자신을 왕위에 올린 2등공신 이괄을 서북면에 보내 방비를 강화한 것은 좋았는데 내부 권력 다툼과 역모 논의로 반란을 자초하여 국경 수비 병력의 태반을 내전으로 증발시켰다. 외적보다 더 무서워진 내부 반란을 막기 위해 조정은 군사 훈련마저 차단시키고 군 지휘관들에 대한 기찰(譏察)을 강화했고 결국 전쟁을 맞은 한 장수는 이렇게 부르짖으며 죽어간다. “내가 지휘관이 되어 한 번도 습진(習陣)을 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애통하다.” 자신이 통솔한 군대 훈련도 자유롭지 못한 무장의 절규다.


정묘호란을 겪고도 자신의 약점과 저쪽의 강점을 처절하게 깨닫기는커녕 그야말로 대책이 없이 청 태종 홍타이치의 황제 즉위에 발끈해서 전국에 선전(宣戰) 교서를 내린다. “오랑캐의 욕구는 날로 커져 이제 우리 군신이 차마 들을 수 없는 말로 협박하고 있다. 이에 강약과 존망을 돌아보지 않고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니 모든 사서(士庶)들이 힘을 합쳐 난국을 헤쳐 나가자.” 그러나 이건 명나라 사람도 말리는 일이었다. “이럴 능력이 됩니까?” 절망적이다. 이 선전교서를 평안감사에게 전하러 달려가던 전령이 청나라 사신에게 발각돼 평안감사도 알기 전에 청나라가 먼저 알아버린 건 절망의 하이라이트다.


이런 식으로 ‘맞아들인’ 병자호란에서의 조선 조정의 어리석음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을 것 같다. 조선이 아무리 붓으로 행세하는 나라였다고는 하나 고관대작부터 시골 선비까지 어찌나 말로는 싸움을 잘하고 입으로는 천하의 명장들인지, 동서고금의 고사를 통해 정의는 항상 승리했고 대의를 세우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었고 금수들과 화의하자는 것도 짐승들이니, 목을 쳐야 한다는 결기는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찧을 때까지도 식지 않았다.


『병자호란』은 이 참상의 세월을 너무도 냉정하게, 그만큼 생생하게 그려 보이고 있다. 작가는 병자호란은 역사 속의 일만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있다. 읽다 보면 정말로 병자호란은 수백 년 전의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세 알게 된다. 현실을 읽지 못하고 명분에 사로잡혀 자신의 위기를 망각하고 기회를 상실하는 군상들, 철기 병들의 창날이 코앞에 닥쳐도 우리는 정의로우니 이길 수 있다는 헛소리로 일관한 정부, 한 번 전쟁을 겪고도 또 다른 전쟁을 되레 재촉했던 어리석음은 오늘날에도 결코 웃어넘길 일이 아니니까 말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장수왕과 서희의 유전자가 우성으로 남아 있을까. 아니면 인조와 신하들의 유전자가 주류로 우리들의 혈관에 흐르고 있을까. 결국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병자호란』은 그 본질의 변화를 줄 수 있을 만한 책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아버지를 찾아서』

김창희 지음, 한울, 2018


『여자전』

김서령 지음, 푸른역사, 2017


『테무진 투 더 칸』

홍대선 지음, 생각비행, 2017






김형민 - SBS CNBC PD



1995년 SBS 프로덕션에 입사한 후 교양 PD로 일하며 「리얼코리아」「긴급출동 SOS 24」「SBS 생활경제」 등을 연출했다. 현재 SBS CNBC 편성팀장으로 일하며 역사에 관한 글쓰기를 하고 있다. 『그들이 살았던 오늘』 『한국사를 지켜라』 『양심을 지킨 사람들』 『접속 1990』 『딸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 등을 썼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문의/ 문화사업팀 031-231-0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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