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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정조 르네상스의 실체

인문 분야 『정조의 화성행차』 리뷰




경기도와 경기문화재단은 경기천년을 기념하여 ‘새로운 경기’로 나아가기 위해 도민의 생각의 틀을 확장하고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분야별 우수 도서 100선을 선정하였습니다. 전문가들로 구성된 선정위원회의 추천과 심의로 경영경제, 과학, 문학, 문화, 사회, 아동, 인문의 7개 분야에서 200선이 엄선되었고, 10대부터 50대 이상의 경기도민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온라인 설문조사를 통해 최종 100선이 선정되었습니다. 선정된 책들은 도민 누구나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는 것들로, 읽을거리를 찾는 도민에게 실질적 가이드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최종 선정된 경기그레이트북스 100선은 경기문화재단 홈페이지(www.ggcf.kr), 경기천년 홈페이지(ggma.ggcf.kr) 및 경기문화콘텐츠플랫폼 GGC(ggc.ggcf.kr)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정조의 화성행차』  

한영우 지음, 효형출판, 2007








정조 르네상스의 실체


김태익 - 조선일보 100년사 책임편찬위원



 


직장에서 가까운 탓에 청계천 길을 자주 걷는 편이다. 광교에서 동대문 오간수문 쪽을 향해 가다 보면 삼일빌딩 근처에서 발걸음이 늦어진다.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고, 벽을 따라 조선 22대 임금 정조의 장대한 행렬 그림이 100미터 넘게 펼쳐진다. 수많은 등장인물이 살아 있는 듯 생생하고 복식은 화려하다. 이 벽화가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 오른 조선시대 의궤(儀軌)의 한 장면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눈이 한 번 더 간다. 그러나 아쉽게도 거기까지다.


안내문에는 “1795년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수원의 아버지 무덤을 다녀와 그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의궤의 그림”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런 설명으로는 이 벽화에 담긴 의미의 100분의 1도 알 수 없다. 200년도 더 된 옛날에 1779명의 수행원과 779필이나 되는 말을 동원하는 어마어마한 행렬이 왜 필요했는지, ‘자궁(慈宮)’ ‘어보마 (御寶馬)’ ‘인기(認旗)’ ‘금군(禁軍)’ ‘총융사(摠戎使)’ ‘정가교(正駕轎)’ 등 그림에 나오는 호칭과 용어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 헤아릴 길 없다. 심지어 행렬 가운데 국왕 정조가 어디에 있는지 찾다가 포기하는 산책객들도 많다.


대체로 학문이란 게 이렇고, 특히 한국학이라는 게 이렇다. 우리는 전통과 역사, 문화유산의 귀중함을 자주 얘기하지만 그것들은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에 너무 먼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역사와 대중을 잇는 매개인 학문이 제 역할을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영우 교수의 『정조의 화성행차』를 읽고 청계천 벽화를 보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이 책은 정조의 화성 행차 직후 조선왕조가 발간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토대로 행차의 전 과정과 배경, 그 의미 등을 알기 쉽게 풀어쓴 책이다. 역사학자인 한 교수는 서울대 규장각 관장을 지내며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수천 권의 조선시대 의궤를 접하고 그 자료적 가치를 주목했다. 의궤는 국가의 중요 행사가 있을 때마다 행사의 전말을 글과 그림으로 낱낱이 기록한 조선시대의 독특한 제도다. 그러나 워낙 분량이 방대한 데다 모두 한문으로 돼 있어 대중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한 교수가 『원행을묘정리의궤』를 중심으로 의궤의 실상을 세상에 알리고, 정조 화성 행차의 역사적 의미를 조명하려 낸 책이 바로 『정조의 화성행차』다.


한 교수에 따르면 정조 치세 24년은 조선왕조의 절정기이자 5000년 한국 문화의 정점이기도 했다. 1776년 미국이 독립선언을 했던 같은 해, 왕위에 오른 정조는 부국강병과 조선의 근대화를 지향한 위대한 개혁군주였다. 그러나 그에겐 아버지 사도세자가 당쟁의 와중에 뒤주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한 아픈 가족사가 있었다. 정조는 화성의 아버지 묘소를 해마다 참배했다. 그의 행차는 효심의 표현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국왕인 정조가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듣는 기회이기도 했고, 왕실의 권위를 높여 개혁 에너지를 결집시키려는 거대한 정치 드라마이기도 했다. 정조가 회갑 맞은 홀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시고 화성에 가 아버지 묘소를 참배하고 어머니 회갑 잔치를 베푼 ‘8일간의 행차’는 이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였다. 


한 교수가 정조의 위대함을 말하는 가장 강력한 근거는 그 시대의 철저한 기록 정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나타난 기록 정신을 한마디로 “무섭다”며 “나는 이렇게 상세하고 철저한 국정보고서를 본 일이 없다”고 표현했다.


정조의 화성행차는 1년 준비 기간에 10만 냥의 예산, 공식 수행원 1779명, 말 779 필이 동원된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웅장한 행사였다. 『원행을묘정리의궤』는 이 행차를 전율이 일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행사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을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기록하고 들어간 비용을 일일이 무슨 물품이 몇 개요 그 단가가 몇 냥 몇 전이라고 기록했다. 미천한 신분 노동자의 이름과 주소, 복무일수, 실제 한 일, 품삯까지 낱낱이 적어 넣었다.


예컨대 정조가 타고 갈 가마(길이 5척 6촌, 너비 3척 5촌) 제작에는 2785냥이 들었고, 29개 분야 장인 120명이 참여했다. 가마를 끌고 가는 말에게 먹인 여물의 종류와 수량, 여물을 끓이는 데 들어간 땔감과 먹이를 담은 그릇의 종류와 수량까지 적었다. 정조가 시흥행궁에서 첫 밤을 자고 받은 아침 수라상에는 밥과 국 등 여덟 그릇이 나왔는데 젓갈 그릇에는 전복젓 석화젓 조개젓 게젓 등이 담겨 있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먹은 국수는 메밀가루, 녹말, 꿩, 쇠고기, 계란, 간장, 후춧가루 등을 넣어 만든 것이었다. 정조는 화성에서 이 지역 60세 이상 노인들을 위해 양로잔치를 베풀었는데, 여기 참석한 노인 389명의 연령별 분포를 ‘99세 3명, 97세 1명’ 식으로 밝혀놓았다.  혜경궁 홍씨 회갑 잔치에서 춤을 춘 3명의 기생은 19세부터 60세까지 다양했다. 그들의 이름이 무엇이고 어디서 차출됐는지까지 나온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백미가 바로 청계천에 걸린 반차도다. 그림에 나오는 1779명이 가상 인물이 아니라 하나하나 이름을 가진 구체적 실존 인물들이었다는 사실은 말할 것도 없다.


기록이란 무엇인가. 투명성과 책임성을 보증하는 수단이다. 기록을 철저히 남겼다는 것은 정조시대의 정치가 그만큼 정당하고 자신 있다는 뜻이다. 한 교수는 『원행을묘정리의궤』를 통해 현대인과 위정자들에게 그걸 깨우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누구나 정조를 얘기한다. 그를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도 나왔다. 수원과 사도세자릉은 정조의 화성 행차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에 힘입어 관광 명소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1998년 『정조의 화성 행차 그 8일』이라는 이름으로 초판이 나왔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책은 ‘정조 르네상스’를 가장 실증적이며, 가장 효과적으로, 가장 알기 쉽게 대중에게 알린 책 가운데 하나다.  역사와 대중을 만나게 하려는 학자적 사명감과 한 교수의 학문적 깊이, 두 가지가 어우러진 수작이다. ‘길거리 인문학’이란 말이 유행이다. 그러나 진짜 인문학의 대중화는 길거리에서 생기는 게 아니다. 연구실의 고민과 열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정조 평전』

한영우 지음, 지식산업사, 2017


『조선왕조 의궤』

한영우 지음, 일지사, 2005  


『영원한 제국』

이인화 지음, 세계사, 2006







김태익 - 조선일보 100년사 책임편찬위원



1983년 조선일보에 입사, 줄곧 문화부 기자로 출판·학술·미술·문화재 등을 담당했으며 문화부장, 편집부국장, 논설위원을 지냈다. 지금은 조선일보 100년사 책임편찬위원으로 있다. 대통령 도서관정보정책위원회 위원, 국립중앙도서관 자문위원, 문화예술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우리말의 예절』 『아듀 20 세기』 『바람의 고향, 초원의 말발굽』(이상 공저) 등이 있다.





세부정보

  • 주최/ 경기도

    주관/ 경기문화재단

    선정위원/ 한기호 위원장(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김종락(대안연구공동체 대표), 장은수(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강양구(코리아메디케어 콘텐츠본부장),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진행/ 김세나(콘텐츠큐레이터), 윤가혜(경기문화재단), 김민경(경기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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