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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연구원

임진강 유역 적석총의 재검토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이 글은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임진강 유역 적석총의 재검토


김성태(경기문화재연구원)


Ⅰ. 연천 삼곶리 적석총의 구조 문제

Ⅱ. 남한지역 적석총에 대한 기본적 이해

Ⅲ. 남한지역 적석총의 계통

Ⅳ. 용어의 문제

Ⅴ. 피장자의 종족

Ⅵ. 임진강 유역 정치집단의 비정

Ⅶ. 맺음말



  최근 정선 아우라지와 광주 곤지암에서 적석총이 발굴되었다. 이들 적석총은 모두 집단묘로 기존에 남한지역에서 발굴된 적석총과는 형식을 달리하였다. 그럼에도 구조와 세부 속성에서 연천 학곡리 적석총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그림 1, 2 참조). 어쨌든 적석총 관련 새로운 자료의 등장으로 남한지역 적석총을 새롭게 검토해야 할 필요가 생겨났다. 한편, 발표자는 1993년 연천 삼곶리 적석총을 현장책임자로 발굴을 직접 수행하였고, 2002년 연천 학곡리 적석총 발굴에 책임연구원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발굴성과를 토대로 남한지역 적석총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고찰을 시도하여 보고서 고찰 부분에 실었고, 이에 대한 학술적 비판이 적지 않게 있었다. 이렇듯 기존의 견해에 문제점이 노출되었고 새로운 자료가 최근 발굴되었기에, 발표자의 기존의 견해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재검토할 필요가 생겨났다.


그림1. 정선 아우라지 적석총

그림2. 광주 곤지암 적석총


Ⅰ. 연천 삼곶리 적석총의 구조 문제



그림3. 연천 학곡리 적석총

(○은 묘곽이 설치되지 않은 부분)

그림4. 연천 삼곶리 적석총의 구분도


  연천 삼곶리 적석총은 학술 목적의 발굴이었다. 또 기존의 남한지역 적석총 발굴에 비하여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발굴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매장주체부인 묘곽의 형태가 파악되었고 구조도 밝혀졌다. 그런데 발굴보고서가 발간된 이후 또 다른 묘곽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이 비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이런 의문은 평면상에 묘곽이 자리할 여유 공간이 있기에 충분히 제기될 수 있다고 본다(그림 4). 또한 최근 발굴된 정선 아우라지와 광주 곤지암 적석총에서 적석부 전체에 묘곽이 조성되었기에 누구나 한번쯤은 의심해 볼만한 대목이다.


그런데 연천 삼곶리에 비하여 묘곽의 윤곽이 잘 드러난 연천 학곡리 적석총에서도 상류쪽 부분은 그림 3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묘곽이 조성되지 않았다. 즉 동반부의 절반 가량에서 묘곽이 확인되지 않았다. 현장 조사에서도 이 부분에 연천 삼곶리 적석총의 부가시설과 유사한 시설이 있지 않을까하여 면밀히 조사했지만 그 어떤 유구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이에 조사단은 일단 묘곽을 비롯한 그 어떤 유구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이에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의 경우 적석부의 전면에 걸쳐 묘곽을 설치하지 않았던 사실을 일단 확인할 수 있다.



1 輯安 良民 74號

2. 輯安 良民 168號(無基段式 石槨積石塚)

3. 輯安 通溝 禹山下 JYM 1340(基段式 石槨積石塚)

4. 집안 집석공로간 3296호

그림5. 고구려 적석총의 묘곽 미설치 부분


이런 결론은 임진강 유역 적석총의 모본(模本)인 고구려 적석총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이른 시기의 적석총으로 분류되는 집안(集安) 양민(良民) 168호분과 자강도 초산군 운평리 4지구 8호분 둘 다 전체 적석부에 비하여 묘곽이 설치된 부분은 중심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또 부석시설이 있는 자강도 초산군 운평리 4지구 6호분과 자강도 시중군 심귀리 99호분에서도 전체 적석부 중에서 묘곽은 극히 일부분의 공간에 설치되어 있다. 아울러 쌍분으로 별도의 묘곽을 조성한 자강도 자성군 송암리 2ㆍ3호분에서도 거대한 적석부에서 묘곽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그림 5).


이상의 검토로 연천 삼곶리 적석총이 다곽식일 가능성은 낮으며, 발굴단이 확인하지 못한 또 다른 묘곽이 존재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적석부의 폭을 고려할 때 병렬식 묘곽이 존재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이런 결론에 도달할 때, 왜 필요 이상의 적석부를 쌓았는가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정확한 답은 없다. 다만 연천 학곡리의 경우 묘곽 부분에 비하여 해당 부분의 적석에 사용된 강돌의 크기가 대형인 점, 적석의 두께도 매우 두텁다는 점, 그리고 해당 부분이 급류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는 상류 쪽에 위치한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즙석과 마찬가지로 수해 방지를 위한 목적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1)


그림6.  연천 삼곶리 적석총의 기단부분


한편, 강현숙은 연천 삼곶리의 형식을 기단식으로 규정한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남한지역 적석총에서 기단적석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2) 그런데 부석시설과 연결되는 부분은 명확하게 단이 형성되어 있고, 그림 6에서 볼 수 있듯이 부석시설과 묘곽 적석부 사이를 평탄하게 하고, 그 위에 대형의 석재를 놓은 다음, 그 위로 강돌을 쌓아 올려나간 흔적을 동분의 북변에서 확인하였다. 따라서 전체적으로 뚜렷한 기단의 모습이 확인되지 않았지만, 적석부 전체에 걸쳐 훼손이 심하게 이루어지고 무너져내린 점을 감안할 때3), 원래 기단식으로 조성되 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한편, 연천 삼곶리 적석총의 경우, 경계부를 중심으로 동분과 서분으로 구별되는 양곽식으로 파악했는데, 이와 유사한 경계부가 학곡리 적석총에서도 확인되었다. 즉 적석부 전체를 양분하는 중심축이 확인되었고 이를 경계로 상류쪽으로 1ㆍ2ㆍ3호가 조성되었고, 하류 쪽으로 4호와 기타 멸실된 유구들이 배치되었다. 또 광주 곤지암 적석총에서도 장축 중심축을 따라 무덤들이 양분되어 있었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적석총의 축조 시 1/2 혹은 1/3 등과 같이 구획을 한 다음 묘역을 조성하였다고 판단된다.


참고로 연천 삼곶리 적석총과 연천 학곡리 적석총의 발굴 당시, 하천변에는 적석총의 무덤돌과 동일한 석질과 크기의 강돌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이에 적석총 축조를 위한 무덤돌의 확보는 용이했을 것이라 판단된다. 한편 발굴 이전에 적석부의 훼손이 심했던 이유는 군부대 등에서 공사용 석재를 채취해 간 까닭이라 추측된다.


Ⅱ. 남한지역 적석총에 대한 기본적 이해4)


남한지역 적석총은 크게 임진강 유역권, 북한강 유역권, 남한강 유역권, 한강 하류권으로 대별된다. 이외에도 공주 송산리와 청양 벽천리에서도 적석총이 보고되었으나 주요 분포권에서 벗어나 있다.


임진강 유역권에는 연천 삼곶리 1기, 연천 학곡리 1기, 연천 우정리 2기, 연천 선곡리 1기, 연천 횡산리 1기, 연천 동이리 1기 등이 보고되어 있으며, 특히 북한의 개성시 장풍군 장학리 에서 1기가 보고되었다.5) 이중에서 연천 삼곶리, 연천 학곡리, 연천 횡산리, 개풍 장학리 적석총만이 정식발굴조사를 거쳐 그 조사결과가 발표되었다.


입지에서 가장 주목되는 사실은 하천 유역의 충적대지에 자리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영남지방과 충청지역의 고분군이 대하천 유역뿐만 아니라, 그 지류인 소하천 유역의 구릉상에 집중적으로 입지하는 점과 대조된다. 그리고 군집형태로 밀집분포하는 한강 유역권을 제외하고는 강안의 충적대지상에 전망이 탁월한 곳을 선정하여 독립적으로 입지하는 특징이 있다.6)


현재까지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묘곽의 구조가 정확히 드러난 유적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연천 학곡리 적석총ㆍ연천 삼곶리 적석총ㆍ개성 장학리 적석총 등에서 하천석을 이용하여 묘곽을 조성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특히 벽체를 축조할 때에 중간 중간에 세운돌이 확인되는 점이 특징적이며, 학곡리 적석총의 경우에는 벽체의 하단부에 보강석을 덧대거나 세운 흔적이 확인된다.


한편, 외형구조에서는 즙석과 부석시설이 주목된다. 즙석은 자연사구 전체에 걸쳐 시설되지 않고, 강쪽에만 한두겹으로 천석을 깔아 돌린 점으로 미루어 수해방지용 시설로 파악된다. 부석시설은 연천 삼곶리에서 확인된 것으로 묘곽의 바닥면과 비슷한 레벨에 한두 겹의 돌을 편평하게 깔아서 만든 것으로 특별한 행위가 이루어진 제의공간으로 파악된다.7) 이런 부석시설은 고구려 적석총에서도 다수 확인된 바 있다.8)


그림7.  연천 학곡리 적석총의 평면도와 출토유물(무기단다곽식)


그림8. 연천 삼곶리 적석총의 평면도와 출토유물(기단양곽식)


그림9. 개성 장학리 적석총의 평면도와 출토유물(방단단곽식)


임진강 유역 적석총의 형식은 외형에 따라 무기단식ㆍ기단식ㆍ방단계단식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내부구조에 따라 다곽식ㆍ양곽식ㆍ단곽식으로 구분된다. 외형과 내부구조의 관계는 일반적으로 무기단식은 다곽식, 기단식은 양곽식, 방단계단식은 단곽식일 가능성이 크지만, 아직까지 정식발굴된 자료가 부족하므로 일반화할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정식발굴이 이루어진 연천 학곡리 적석총이 무기단 다곽식, 연천 삼곶리 적석총이 기단 양곽식, 개성 장학리 적석총이 방단 단곽식이여서 크게 3가지 형식이 존재했고, 무기단식 다곽식→기단 양곽식→방단 단곽식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판단은 임진강 적석총의 모본인 고구려 적석총의 형식 발전과 일반적인 묘제의 발전 양상을 고려할 때 어느 정도 합리적이라 생각된다.(그림 7, 8, 9)


연대는 대략 무기단식은 2세기대, 기단식은 3세기대, 방단계단식은 4-5세기대로 설정할 수 있다. 여기서 무기단식과 기단식의 편년은 가평 대성리유적과의 비교를 통하여 설정하겠다. 가평 대성리유적은 원삼국후기의 주거지 43기가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고, 상대편년이 비교적 잘 확립되어 있으며, 과학적 분석에 의한 절대연대도 제시되어 있다. 어쨌든 보고서에서는 장란형토기와 심발형토기를 공반하지 않는 주거지는 3세기 전반, 그렇지 않은 모든 원삼국시기 주거지는 2세기대로 편년하였다. 한편, 가평 대성리유적의 원삼국 주거지에서 출토 되는 철촉은 모두 무경식으로, 후속 형식인 단경유엽형은 한 점도 확인되지 않는 점이 특징적이다.


그림10.  연천 삼곶리 출토 철촉

그림11. 연천 학곡리

1호곽 출토 낙랑토기

그림12.  가평 대성리유적

5호 주거지 출토 낙랑토기


이런 가평 대성리유적의 편년을 참고하여 임진강 유역 적석총의 편년을 대략적으로 설정해 보자. 우선 학곡리 적석총의 편년과 관련해서는 1호묘 출토 호형의 낙랑토기(그림 11)가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 이 호형토기는 동벽 아래 중앙 바닥에서 출토되었다. 구연부와 동체부 일부만 남은 것을 도면 복원하였는데, 동체 외면에는 상위와 중위에 각각 9조와 6조의 횡침선이 돌려져 있으며, 중위 아래에는 세승문이 종방향으로 타날되어 있다. 그런데 이와 흡사한 토기가 대성리 5호 주거지에서 확인되었다(그림 12). 상위에 10조, 중위에 5조 횡침선을 돌리고 하위에 중위와 하위에 종방향과 사방향으로 승문타날을 하였다. 이렇듯 상기 두 토기는 문양 구성이 매우 흡사하므로 제작 연대를 비슷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이에 대성리 5호 주거지의 연대가 2세기 3/3분기로 편년된 사실에 의거할 때, 학곡리 1호묘의 편년은 일단 2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겠다.


기단식의 편년은 삼곶리 적석총에서 출토된 단경유엽형 철촉 2점이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그림 10). 이들 화살촉은 모두 단경(短頸)의 유엽형 철촉으로 촉두가 납작하고 그 단면이 다소 편평하며, 목과 촉두의 구별이 가능하기는 하나 뚜렷하지는 않다. 이런 철촉 형식은 단경유엽형 철촉 중에서도 이른 형식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전형적인 단경유엽형의 철촉은 일반적으로 독사머리형이라 일컫는 형식으로 단면이 이등변 삼각형ㆍ릉형ㆍ블록렌즈형으로 되어 있어 촉두가 두텁고 무게가 상대적으로 납작형에 비하여 무겁다. 또한 목도 촉두와 뚜렷하게 구분되는 좀더 발전한 형태이다. 이런 사실은 연천 삼곶리 적석총에서 확인된 2점의 철촉이 적어도 4세기대의 고분시대 철촉보다는 선행하는 형식임을 분명히 보여주며, 그 제작시기 역시 적어도 3세기 전반 혹은 후반일 가능성을 제시한다. 특히 가평 대성리유적의 2세기대 주거지에서 무경촉만이 출토된 점을 감안하면, 위의 편년 설정은 비교적 안정적이라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계단식은 개성 장학리 적석총의 구조를 통하여 대략적인 편년을 설정해 볼 수 있다. 이 적석총의 축조에 강돌과 함께 막돌을 사용한 점, 평면형태가 4각형으로 비교적 정연한 점, 기단 부분에 판석을 세워둔 점 등으로 미루어 삼곶리 적석총보다는 후대에 조성된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승석문 토기가 출토된 사실은 5세기 후반을 넘지 않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따라서 중심연대는 일단 4세기대로 설정해 둘 수 있다.


이런 분포와 형식 발전에서 주목되는 사실은 임진강의 상류로 가면서 늦은 시기의 형식이 출현하는 점이다. 현재까지 분석대상이 단지 3기에 불과하여 이를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어떤 역사고고학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볼 수 있다. 발표자는 백제의 영역 확대와 연동되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Ⅲ. 남한지역 적석총의 계통9)


한국고대사학계에서는 백제의 건국주체를 고구려계로 보고 있으나, 일부 학자들은 부여계로 규정하고 있다.10) 그런 한편, 남한지역 적석총의 축조집단을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에 자주 등장하는 말갈(靺鞨) 즉 예계(濊系)집단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11)


이런 상반된 주장들에 대하여, 발표자는 남한지역 적석총의 계통을 고구려 적석총으로 파악 하고, 그 축조세력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초기기록을 신뢰하여 고구려유이민 집단으로 파악 하고자 한다 이런 주장의 고고학적 문헌사적 근거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우선, 앞에서 검토한 바와 같이 남한지역 적석총은 유적의 입지에서 대하천의 중상류에 발달한 충적대지에 위치한다는 점이다. 이는 고구려 적석총이 압록강 중하류 및 혼강 본류와 지류에 집중 분포하는 점과 상통한다.12) 그리고 이런 입지적 특성은 동시기의 영남지역과 충청지역의 토광묘의 입지와는 극명히 대조되는 점일 뿐만 아니라, 경기남부지역의 주구토광묘의 입지와도 차이를 보이는 점이다.


둘째로, 무덤의 축조재료로 나무가 아닌 강가의 돌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소위 원삼국시기로 일컬어지는 삼국시대 전기에 돌을 재료로 하여 묘곽과 봉분을 만든 묘제는 고구려적석총이 유일하다. 이런 묘제가 한반도 중부와 남부지역 중에서 중부지역에서만 나타나고, 그것도 한강ㆍ임진강 유역에서만 확인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이 역시 동시기 낙랑의 고분이 귀틀 무덤과 전축분이 기본이고, 부여를 비롯한 신라ㆍ가야, 그리고 마한의 무덤이 목관묘와 목곽묘를 기본으로 하고 있는 사실과 대비할 때, 백제지역에서 적석총의 축조는 특기할 만한 사실이며, 이는 그 계통을 고구려적석총에 둘 수밖에 없는 또 다른 근거가 된다.


셋째로, 매장주체부의 위치이다. 매장주체부를 지상에 두느냐, 지하에 두느냐는 기능적인 배려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축조집단의 신화와 매장풍습과도 연결되는 문제로, 일반적으로 지상식 매장풍습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부여-고구려계의 풍습으로 간주되고 있다. 따라서 남한지역 적석총에 나타나는 지상식 매장주체부는 고구려의 매장풍습을 직접적으로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 축조집단의 종족적 배경이 고구려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사실도 시사해 준다.13)


넷째로, 장법(葬法)에서 집단묘의 한 형태인 연접묘(連接墓)가 확인되는 사실이다.14) 연천 학곡리 적석총에서 적어도 최소한 4기의 묘곽이 연접하고 있는 사실은 우산하 3233호를 비롯한 고구려적석총의 묘제에서 그 아이디어를 구할 수밖에 없다. 특히 기존의 만들어진 묘곽의 벽체 외면에 덧대어 묘곽을 조성하는 속성마저도 고구려적석총의 그것을 충실히 답습하고 있다. 이는 비교적 체계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연천 삼곶리 적석총과 연천 학곡리 적석총의 발굴조사에서 확인된 사실로 백제적석총이 고구려적석총의 아류임을 확실히 입증하는 요소라 할 수 있다.


다섯째로, 후장(厚葬)보다는 박장(薄葬)을 기본으로 하고, 묘곽뿐만 아니라 적석부와 그 주변에 유물을 매납하는 방식도 고구려적석총의 그것과 동일하다. 이는 묘곽 내에만 유물을 집중 매납하고 후장을 기본으로 삼는 부여, 낙랑, 마한 및 신라ㆍ가야의 매납 풍습과는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여섯째로, 무덤양식의 변천과정 또한 동일한 사실이다. 즉 무기단→기단→방단계단식으로 이어지는 외형의 축조방식 역시 양 지역에서 일치한다. 이렇게 동일한 구조형식을 보인다는 사실은 남한지역 적석총이 고구려적석총의 강한 영향을 받아서 축조되었으며, 그 아이디어의 수용 역시 지속적이었다고 판단케 한다.


일곱째로, 제의공간으로 추정되는 부석시설의 존재이다. 부석시설은 연천 삼곶리 적석총에서 확인되었는데, 고구려지역에서는 자강도 초산군 운평리 제4지구 6호분을 비롯하여 송암리 제 1호분, 송암리 1지구 33호, 45호, 56호, 88호, 106호 등의 적석총에서 확인되었다.15) 이런 제의공간의 존재 역시 남한지역 적석총이 고구려적석총의 부대시설까지 충실히 계승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여덟째로, 한 묘곽 내부와 묘역에 깨뜨린 토기나 구슬이 산발적으로 확인되는 사실도16)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북방종족의 습속과 연결될 수 있다.17) 고구려적석총의 경우에도 유물이 묘곽 내보다는 묘역에서 발견되는 예가 일반적이고, 또 유물을 의도적으로 훼손하여 매납하는 풍습이 보고되어 있은 바, 이 역시 남한지역 적석총의 유물부장풍습과도 연결된다.


이상의 검토에서 본 바와 같이 기본적인 형태와 세부적인 속성에서, 남한지역 적석총의 계통이 고구려적석총에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할 수 있다.18) 이와 같은 결론을 유물을 통하여 더욱 보강하면 다음과 같다.


이상으로, 임진강ㆍ한강유역의 적석총이 고구려적석총에 그 계보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런 고고학적 분석은 비류국 송양왕이 주몽과의 투쟁에서 패배한 것과 같은 정치적 갈등을 겪은 온조계집단이 졸본지역에서 남하하였다는 연구결과와 연결될 수 있다.19) 또한 『양서(梁書)』 백제조에 백제의 언어와 법속이 대체적으로 고구려와 같다는20) 문헌기록과, 남한지역 적석총이 분포하는 경기도와 황해도 일대에 홀계지명(忽系地名)이 많고, 이런 ‘홀(忽)’은 고구려 지명의 특징적인 어미(語尾)라는 연구 결과21) 역시 남한지역 적석총의 고구려적석총기원론을 더욱 방증해 준다.


주지하듯이 문화요소에서 가장 보수성이 강하고 종족적 색채가 강한 것이 묘제와 언어이다. 이런 두 가지 요소에서 일치점이 확인되므로 양 지역사이의 문화적ㆍ종족적 동일성을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임진강ㆍ한강 유역에 분포하는 적석총의 피장자는 고구려유이민이라는 견해는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백제건국의 주체가 온조집단으로 대표되는 고구려유이민이라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은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남한지역 적석총의 계보가 고구려 적석총에 있다는 확고한 결론에 도달하였을 때, 이들 적석총의 축조집단이 “말갈”로 표기된 예계(濊系)이고, 그들이 활동영역을 임진강유역과 한강 중상류로 파악하는 견해에22) 대한 비판적 검토가 요구된다.


우선, 무엇보다도 말갈과 예를 연결시킬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삼국지』에는 중국 후한대의 환제(桓帝)와 영제(靈帝) 치하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서 낙랑군이 능히 통제할 수 없다는 기록이 있다.23) 즉 기원후 146년에서 188년까지 한과 예가 낙랑군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강성하였다고 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 이 시기의 말갈은 그 군사활동이 가장 침체한 시기이다.24) 만약 예=말갈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면, 이 시기에 말갈의 군사활동은 가장 활발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독 이 시기에 말갈은 신라와 백제에 대한 침략을 전혀 가하지 않고 있다. 이는 단적으로 말갈은 예와는 다른 실체임을 분명하게 입증한다.25) 오히려 상기 기록은 낙랑 주변의 한과 예가 강성해지니, 바로 말갈의 군사활동이 정지된 사실을 전한다. 따라서 『삼국지』의 예는 말갈과는 적대적인 관계에 있던 정치세력으로 파악되어야 하겠다.


다음으로, 『삼국사기』에 말갈은 기동력을 지닌 군사집단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삼국지』 예조(濊條)에서 그들의 성질은 도둑질을 하지 않고 조심스럽고 진실하며 욕심이 적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또한 보전에 능하다고 기록하고 있다.26) 이는 비호전적이며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전에 능하지 않음을 시사한다. 따라서 기동력을 장기로 하는 말갈이 예일 수는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정치체의 성격에 대한 양 기록 사이의 모순도 지적할 수 있다. 『삼국지』에 예에는 대군장(大君長)이 없다고 하였으며 위(魏)로부터 불내예왕(不耐濊王)으로 책봉 받은 군장이 여전히 백성들 사이에 섞여 살았다고 하는데,27) 과연 예의 군장이 기리영 공격시 주도적인 위치를 지닐 수 있었는지 의문스럽다.28) 이런 사실 역시 예를 말갈로 볼 수 없는 이유이다. 그리고 만약 말갈이 경기북부지역을 그들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하면, 임진강 유역으로 비정되는 칠중하(七重河)를29) 말갈이 공격한다는 일은 도저히 성립될 수 없다. 즉 말갈이 자기영역인 임진강 유역의 칠중하를 공격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그들의 활동영역을 임진강유역과 한강중상류로 볼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우선 예가 경기북부지역을 그들의 영역으로 삼았다고 한다면, 그들의 영역이 서쪽으로는 바다(海)를 경계로 삼았다고 해야 마땅하다는 지적이30) 있는데, 이 역시 임진강 유역을 예의 영역으로 볼 수 없는 근거가 된다. 또 예가 경기북부지역을 차지하였다고 한다면, 『삼국지』에서 한이 대방의 남에 위치한다거나 『후한서』에 북으로 낙랑과 접하고 있다는 기록도 문제가 된다. 결국 예의 영역을 경기북부지역으로 획정하면, 동이전의 기본적 구도를 부정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주목할 만한 기사가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 삭주조에서는 춘천의 위치를 《古今郡國志(고금군국지)》를 인용하여 “고구려의 동남쪽, 동예의 서쪽에 위치하며 옛날의 맥(貊)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31) 여기서 고구려의 동남쪽에 맥(貊)이라는 정치세력이 있었고, 그 영역은 예(濊)의 서쪽이라 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삼국지』에서의 예의 강역은 동해안 일대의 영동지역에 한정됨을 분명히 할 수 있다.


예계를 말갈로 보는 시각은 고고학적 자료에서도 부정된다. 우선, 경기북부지역의 적석총을 예계의 무덤으로 볼 때에, 예의 본거지인 강릉을 중심으로 하는 강원도 동해안지역에서 적석총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중대한 모순이 노출된다. 더욱이 『삼국지』 예전에서 예는 주옥(珠玉)을 보물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는데,32) 적석총에서 유일하게 확인되는 장신구는 구슬이다. 이 사실 역시 경기북부지역의 적석총을 예계의 무덤으로 볼 수 없는 결정적인 근거가 된다.


요컨대, 경기북부지역을 예의 영역으로 보고, 그 예의 구체적인 실체가 말갈이라는 견해는 전면적으로 재고를 요한다. 더욱이 경기북부지역의 적석총을 예계의 무덤양식으로 파악하는 견해는 더 이상 성립될 수 없다.


Ⅳ. 용어의 문제


이쯤에서 잠시 남한지역 적석총의 용어를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현재까지 이 분야연구자들은 서울 석촌동고분군은 적석총이라 부르면서 임진강, 남한강, 북한강 유역에서 발견된 것들에 대해서는 즙석묘, 즙석총, 즙석식 적석묘, 적석묘, 적석분구묘 등이라 하면서 석촌동 고분군과는 구별코자 하는 경향이 짙다.


여기서 즙석(葺石)이란 용어의 부적합성은 발표자가 일찍이 지적하였다. 연천 삼곶리 발굴을 통하여 즙석 자체가 수해방지용일 가능성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최근 발굴된 정선아우라지 적석총과 광주 곤지암 적석총에서 즙석 부분이 확인되지 않아서 ‘즙석식’이란 용어가 남한지역 적석총을 통칭하기에는 부적합하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한편, 분구묘도 적합하지 않다고 본다. 남한지역 적석총의 대부분은 자연사구를 이용하여 그 상면을 정면하고 그 위에 적석하여 무덤주체부를 만들었다.33) 또 한국 고고학에서 분구란 개념에는 인위적으로 조성한 무덤의 봉분이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이런 견지에서 ‘분구묘’로는 남한지역에서 확인된 적석총을 모두 포괄할 수 없다.


아울러 굳이 적석총 대신 적석묘로 불어야 할 당위성도 약하다. 조선시대를 포함한 한국의 묘제에서 ‘묘(墓)’는 피장자가 밝혀진 사대부와 일반인의 무덤을 가르킨다. 이에 비하여 피장자가 불분명할 경우에는 분(墳)이라 일반적으로 부른다. 따라서 적석묘보다는 적석분이 더 적합한 용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언어는 사회적이라는 사실에 기초할 때, 지금까지 줄곧 사용해 온 적석총을 적석분으로 꼭 바꾸어야 할 이유는 없다.


한편, 앞에서 살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동의하듯이 남한지역 적석총은 고구려 적석총에서 파생한 것이다. 그렇다고 고구려계 적석총이라 명명함도 적절하지 않다. 이런 논리라면 낙랑토기의 영향을 받은 한성기의 타날문토기를 낙랑계토기로 불러야 하고, 중국의 벽화석실분에 기원을 둔 고구려벽화고분은 한식계 벽화고분으로 해야 마땅하다. 이런 주장은 용어 정의의 기본적인 원칙을 등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상기 ‘고구려계 적석총’이란 용어가 유용하려면, 계통론을 목적으로 형식 분류가 이루어질 경우에만 가능하다고 본다. 즉 백제계 적석총, 신라계 적석총 등이 있을 때 그나마 형식분류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고고학에서 고구려계 적석총이 확인되는 지역은 남한지역의 임진강ㆍ남한강ㆍ북한강 유역에서만 확인된다. 이에 굳이 고구려계적석총이라는 용어를 고집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백제의 묘제를 논의하면서 적석총이라는 묘제 한 형식을 차지하고, 그 계통이 고구려 적석총에 있다고 서술하는 정도면 충 분하다. 굳이 하나의 형식명칭으로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원칙상 형식은 하나의 분류 체계 내에 포섭되어야 마땅하다. 그런 기본 원칙에 입각할 때 ‘고구려계 적석총’이란 용어는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이상과 같은 입장에서 필자는 임진강ㆍ북한강ㆍ남한강에서 확인된 고구려계 적석총을 ‘백제 적석총’이라 명명한 기존의 견해를 견지하고자 한다. 그 이유는 최성기 한성백제의 영역과 기본적으로 겹치기 때문이다. 또 무엇보다도 고고학적으로 백제문화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런 입장은 백제적석총이 전형적인 백제주거지인 여자형ㆍ철자형 주거지와 함께 확인되는 사실로도 옹호된다. 그리고 상기 주장은 연천 삼곶리 유적과 광주 곤지암 적석총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동일 지역내에서 적석총과 주거지가 확인되었는데 주거지는 백제주거지이고 무덤은 말갈무덤, 예계 무덤, 혹은 고구려계 무덤일 수 없다는 사실로도 뒷받침된다. 더 나아가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이 말갈 무덤이라면 그곳에서 출토된 토기는 말갈토기 혹은 예계토기여야 하는데, 이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백제고고학의 기존 용어와의 충돌을 피하고 통일성을 도모하려면, 남한지역 적석총을 ‘백제적석총’이라 명명(命名)함이 옳다고 본다. 이럴 경우 백제적석총은 우리나라 위로는 ‘한국의 적석총’의 한 형식이 되고, 그 아래 하위형식으로는 예컨대 한강본류형, 임진강유역형, 북한강유역형, 남한강유역형 등을 둘 수 있고, 또 계통이 서기 때문이다. 또 백제고고학의 하위형식으로 백제주거지, 백제토기, 백제가마 등 과 함께 포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여 2세기 후반 이후 임진강 유역의 소국은 한강본류의 백제국과 정치적 연대를 맺거나, 그들 중심의 백제연맹체에 속했고 결국에는 백제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이에 경기북부지역에 자리했던 마한 소국들도 백제 초기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본다. 이런 입장에서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만을 백제 고고학에서 제외시켜 별도로 다루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을 비롯한 남한지역 적석총을 백제적석총이라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Ⅴ. 피장자의 종족


앞에서 언급했듯이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을 비롯하여 남한지역이 적석총의 피장자를 예인(말갈족)으로 본 견해는, 예인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동예 지역에서 현재까지 적석총이 1기도 발굴 보고된 바 없고, 또 3-5세기 대 말갈의 무덤으로 보고된 적도 없는 점으로 부정될 수 있다. 즉 근본적인 전제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고, ‘본질이 없는 파생’인 것이다.


그럼 그 피장자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결론적으로 고구려계의 맥인(貊人)으로 보고자 한다. 이런 결론은 다음의 순차적인 검토로 설명된다.


우선, 남한지역의 적석총의 계통이 고구려 적석총에 기원하고 있는 점이다. 이는 앞에서 살폈듯이 토광묘의 목관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석재로 묘곽을 축조한 점, 매장주체부가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자리하는 점, 무덤의 입지가 구릉이 아니라 충적대지의 자연제방의 최고점에 자리하는 점, 초기형식이 무기단식에서 연접식 다곽식인 점 등으로 쉽게 입증한다. 특히 최근 발굴조사된 정선 아우라지 유적과, 광주 곤지암 유적에서 연접식의 집단묘가 확인되고 이런 형식이 고구려적석총의 조형이라 할 수 있는 강상ㆍ누상의 무덤형식과 유사한 사실로도 방증된다. 따라서 남한지역 적석총의 기원이 고구려적석총임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기원 이후에 편찬된 중국 사서에서 고구려를 일반적으로 ‘맥(貊)’이라 표현한 점이 다. 『한서(漢書)』 왕망전(王莽傳)에서 ‘고구려후 추(高句驪侯 騶)’의 집단을 ‘맥(貊)’혹은 ‘예맥(穢貊)’이라 칭한 이래, 『삼국지』ㆍ『후한서』등에서 기원전 75년 현도군의 퇴축(退逐)을 ‘夷貊(이맥)의 공격에 따른 것’으로 기록하여 句驪(구려)와 貊(맥)을 관련시키고 있다. 또 『삼국지』에는 “대수(大水) 유역에 나라를 세운 구려는 대수맥(大水貊), 서안평으로 흘러드는 小水(소수)에 사는 句麗別種(구려별종)은 소수맥(小水貊)”이라 하여 고구려를 명확하게 맥족(貊族)으로 인식하고 있다. 아울러 중국 북방의 돌궐인도 고구려를 ‘매크리(Mökli)’ 곧 맥구려(貊句麗)라고 불렀다.34)


셋째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춘천지역을 맥국(貊國)으로 비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구체적으로 『삼국사기』 지리지에서는 당나라 사람 가탐(賈耽)이 쓴 『고금군국지(古今郡國志)』를 인용해 “고구려의 남동쪽 예의 서쪽이 옛 맥의 땅인데 지금 신라의 북쪽이 삭주(朔州: 지금의 강원도 춘천)이며, 선덕여왕(善德女王) 6년(637)에 우수주(牛首州)로 삼아 군주(軍主)를 두었다”고 하였다.35)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三國史)』에 이르기를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穢國)이다. 야인(野人)이 밭을 갈다가 예왕(穢王)의 인장을 얻어 나라에 바쳤다.”라고 하였다. 또 이르기를 “춘주(春州)는 옛날의 우수주(牛首州)로 옛적의 맥국(貊國)이다.36)”라고 하였다.


이상을 통하여 현재 춘천 지역에 맥족의 지파(혹은 별종)들이 세운 맥국이 존재하였고,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들이었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춘천을 중심으로 하는 북한강 유역에서 발굴된 유일한 묘제가 적석총뿐이라는 사실과 연결하면 북한강 유역 적석총의 피장자는 자연스럽게 맥인 즉 고구려의 후손으로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남한지역 적석총의 피장자의 출자를 맥인으로 규정할 수 있다. 이는 『삼국유사』 권1 제1 마한 조에서 4이(四夷)는 9이(九夷)와 9한(九韓)과 예(穢)와 맥(貊)이다”라고 적시한 기록으로 뒷받침된다. 여기서 크게 볼 때 4夷가 夷, 韓, 貊, 穢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인식이 녹아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남한지역에 크게 한, 맥, 예의 세 종족이 있었다고 보고 있다. 이런 『삼국 유사』 편자의 시각을 남한지역의 고분 발굴 결과와 연결해 보면, 주구토광묘의 축조자인 한인, 적석총의 축조자인 맥인, 무관곽(無棺槨)의 예인37)으로 볼 수 있다.


이렇듯 맥지의 범위는 남한지역 적석총의 범위와 일치할 수 있을 가능성을 확인했다. 이제 문헌기록들을 통하여 이를 검증해 보자. 우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고구려재요동지동천리), 南與朝鮮濊貊(남여조선예맥) 東與沃沮(동여옥저), 北與夫餘接(북여 부여접)”이란 기록이 주목된다. 여기서 ‘南與朝鮮濊貊’이란 부분을 ‘남쪽으로는 조선, 예, 맥과접하다’라고 해석하면38), 앞에서의 『삼국사기』 지리지와 부합하는데, 과거 고조선의 후예인 조선인과 함께 맥인(貊人)과 예인(濊人)이 『삼국지』 편찬 즈음에 고구려의 남쪽에 존재했던 사실 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2 책계왕(責稽王) 13년의 기사로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薨(13년 가을 9월에 한(漢)이 貊人을 이끌고 와서 침략하였다. 왕이 직접 나가서 방어하다가 적병에게 살해되었다)”라는 기사이다. 여기서 한은 낙랑군과 대방군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맥인은 동예와 낙랑군(혹은 대방군) 사이에 있던 고구려의 후손들로 볼 수 있다. 이에 춘천을 중심으로 맥국의 영역보다는 훨씬 광범위한 貊地 즉 고구려의 지파들인 맥인들이 거주하는 문화권을 상정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 유리니사금 17년 조의 “十七年 秋九月 華麗·不耐二縣人連謀 率騎兵犯北境 貊國渠帥 以兵要曲 河西 敗之 王喜 與貊國結好(17년 가을 9월 화려(華麗), 불내(不耐) 2현(縣) 사람들이 함께 모의해 기병을 이끌고 북쪽 변경을 침범했다. 맥국(貊國)의 거수(渠帥, 우두머리)가 군사들로 하여 금곡하(曲河) 서쪽을 막아 물리치게 했다. 왕이 기뻐하여 맥국과 우호를 맺었다.”라는 기사이 다. 이 기사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동예가 신라의 북변을 공격하자 맥국이 이를 방어했다는 것 이다. 이를 통하여 동예와 구별되는 맥국이 있었고, 그들의 활동 영역이 신라의 북변 즉 소백산 맥 일대까지 미쳤음을 보여준다.


이상을 정리해 보자. (1) 남한지역의 백제적석총은 형식과 속성에서 고구려 적석총을 따르고 있다. (2) 고구려인은 맥족이라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통칭하였다. (3) 그런 맥인이 동예의 서쪽 낙랑의 남쪽에 살았다. (4) 이런 맥인의 거주지와 남한지역 적석총은 서로 겹치고 있다.39) (5) 또 적석총 분포지역에서는 다른 묘제가 집단적, 집중적으로 발견된 바 없다. (6) 따라서 남한지 역은 적석총은 맥인의 무덤이라 할 수 있다.


Ⅵ. 임진강 유역 정치집단의 비정40)


일찍이 김병곤은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을 다루면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였다. 그것은 “임진강 중류역의 적석총 조영 집단은 경기 북부 지역에 위치한 마한 소국으로서, 보수적인 속성의 묘제를 통해 볼 때 그들의 민족적 연원은 고구려에 있었다. 그런데 한사군 설치 이후 남하하여 이곳에 정착한 이들 집단은 남쪽의 마한 제국과 상호 교류 등을 통해 문화적 동질화의 길을 걸었다. 그 결과 임진강 유역의 정치체에 문화 변동이 일어났는데, 보수적인 무덤 양식은 북방의 고구려식 적석총의 모습을, 반면 상대적으로 변동이 심할 수 있는 토기 문화 등은 백제적인 특징을 가지는 일종의 문화 접목 현상이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한군현을 매개로 당시를 바라보던 중국인들에게 임진강 유역의 소국들을 마한 제국의 일원으로 인식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런데 이들은 백제와 같은 민족적 연원을 가진 집단으로 백제와 연맹체적인 모습을 지녔으며, 3세기 초중반에는 대방군의 기리영 공격에 앞장서기도 했다. 그러나 3세기 중반 이후에는 서서히 백제의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고, 그 결과 삼국사기에 백제의 북부로 등장하게 되었다.”이다.


발표자는 김병곤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임진강 유역에 존재했던 마한 소국이 大石索國(대석색국)이라는 견해를 최근 피력한 바 있다.41) 이를 그대로 일부 문장을 다듬어 전재하면 다음과 같다.


육계토성은 풍납토성을 제외하고 대하천 유역에서 확인된 유일한 백제토성이며 문헌기록을 토대로 할 때 『삼국사기』의 북한성(北漢城(북한성))으로 비정되는 유적이다. 따라서 한성(漢城(한성))에 버금가는 제2의 도성으로 볼 수 있다.42) 이럴 경우 육계토성 일대가 396년 광개토대왕의 남정시 정벌한 58성 중에서 포함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런데 58성에는 북한성이 포함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북한성의 또 다른 이름 즉 異名(이명)을 탐색해 봄도 필요할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광개토대왕이 점령한 58개 성 중에서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 한저리성(幹氐利城) 등이 임진강 유역에 있었다고 견해가 주목되는데43), 기본적으로 58성을 기록 함에 있어서 평양에서 가까운 곳부터 시작했다고 가정할 때 설득력이 충분하다. 따라서 육계토성이 위치한 적성 일대는 상기 셋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구모로성과 각모로성이 서술상 2번째와 3번째로 이어지고 있으면서, 모로성(模盧城) 앞에 각각 구(臼)와 각(各)이라는 접두어(接頭語)가 붙어 있는 점이 주목된다. 그리고 이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마한 54개국을 서술하면서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을 4번째와 5번째로 연결하여 배치한 점과 상통한다. 이를 우연의 일치로 보지 않을 때, 모로성과 석색국은 동일한 지역일 가능성이 있다. 이에 석색국에 대한 비정이 이루어지면, 모로성에 대한 비정도 자연 스럽게 가능할 것이다.


그럼 석색국을 비정해 보자. 마한 54국의 서술이 중국 군현에서 가까운 쪽에서부터 이루어졌던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는 8번째에 한강중류의 백제국(伯濟國)이 나오고 14번째에 금강유역의 목지국(目支國)이 나오는 사실로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현대 중국어에서의 외래어 표기와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고유지명을 유사한 중국발음으로 옮겼거나 아니면 특정지역의 특기할 만한 요소를 택하여 그 의미를 한어로 표기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이다.44) 상기 두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신분고국(臣濆沽國, chen/fen/gu)이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 교하(交河)로 비정한 고구려의 천정구현(泉井口縣)의 ‘천정구’와 그 발음이 절묘하게 일치되는 점이 주목된다. 이에 백제국 바로 앞에 나오는 신분고국(臣濆沽國)을 지금의 한강 하류로 볼 수 있고, 그에 앞서 있는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수모탁국(優休牟涿國)을 임진강과 한탄강 유역의 소국으로 비정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임진강 하류부터 올라가면서 우휴모탁국은 파주, 대석색국은 적성, 소석색국은 연천 일대로 비정해 볼 수도 있다. 이런 비정은 임진강 적성과 연천 일대에 현무암 단애가 발달해 있는 지형적 특징으로도 뒷받침될 수 있다. 더 나아가 적성일대의 현무암 단애는 ‘임진강 적벽’으로 불릴 정도로 다른 단애에 비하여 빼어난 절경을 갖추고 있는데, 이런 사실은 적성일대가 소석색국보다는 대석색국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에 지금의 육계토성이 있는 적성일대가 3세기 무렵에는 대석색국으로 불렸다고 일단 볼 수 있다. 이처럼 마한 54개국의 대석색국을 적성일대로 비정할 때, 구모로성과 각모로성 둘 중 하나가 적성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적성일대는 구모로성이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억지스럽지만 ‘구(臼)’가 ‘각(各)’보다는 우리말 ‘큰’과 음이 더 잘 통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진강 유역 적석총이 분포하는 지역의 정치체는 마한소국의 하나로서 대석색국, 소석색국이었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구모로성(臼模盧城), 각모로성(各模盧城)이라 하였고, 백제에서는 북부(北部) 또는 북한성(北漢城)으로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Ⅶ. 맺음말


임진강 유역의 적석총을 비롯하여 남한지역의 적석총은 토광묘의 목관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석재로 묘곽을 축조한 점, 매장주체부가 지하가 아니라 지상에 자리하는 점, 무덤의 입지가 구릉이 아니라 충적대지에 입지하는 점, 연접식의 다곽묘가 확인되는 점, 매장주체부인 묘곽 내부뿐만 아니라 적석부에서도 유물이 확인되는 점, 일부에서 제사공간으로 추정되는 부석시설이 확인되는 점 등이 특징적이다. 이런 남한지역 적석총의 속성은 고구려 적석총의 그것과 상통하는 반면에 한강 이남의 주구토광묘와는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에 남한지역 적석총의 기원은 고구려 적석총에 둘 수 있고, 그 피장자는 고구려유이민이며 종족상으로는 맥인(貊人)으로 볼 수 있다.


이런 맥인은 한강 이남의 주구토광묘를 묘제로 사용했던 한인(韓人), 무덤에 관곽을 설치하지 않았던 예인과는 종족상 달랐던 것으로 파악되는데 이는 남한지역에서 적석총의 분포권과 주구토광묘의 분포권이 겹치지 않는 사실로 입증된다. 또 예국(濊國)으로 비정된 강릉을 중심으로 한 동해안 일대에서 아직까지 적석총은 물론 토광묘도 발굴되지 않는 점으로 뒷받침된다. 그리고 이는 문헌상으로 고구려 이남에 한, 예, 맥이 있었다는 중국 사서에서의 기록과, 춘천에 맥국, 강릉에 예국이 있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방증된다. 아울러 맥(貊)이 예(濊)의 서쪽에 자리했다는 『삼국사기』 지리지의 기록으로도 입증된다.


이들 맥인들은 현재 적석총이 확인되는 임진강, 북한강, 남한강 유역에 산거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들에 대하여 『삼국지』 동이전에서는 한(韓) 조에서 다루었지만, 원양국(爰襄國) 백제국(伯濟國)까지의 8개의 나라 즉 원양국(爰襄國)·모수국(牟水國)·상외국(桑外國)·소석색국(小石索國)·대석색국(大石索國)·우수모탁국(優休牟涿國)·신분고국(臣濆沽國)·백제국(伯濟 國)은 사실상 맥족의 나라였다고 생각되며, 이중에서 대석색국과 소석색국이 임진강 유역에 자리했던 소국으로 판단된다. 한편 광개토대왕 비문의 58성 중에서 2, 3번째의 구모로성(臼模盧 城), 각모로성(各模盧城)이 상기의 대석색국, 소석색국과 짝이 맞는다는 사실에 착안할 때, 400년 경 임진강 유역에 구모로성과 각모로성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백제에서는 이들을 북한성으로 불렀을 것이라 생각된다.



1) 문제는 이런 판단에 도달할 때, 왜 전술한 정선 아우라지와 광주 곤지암에서는 그런 부분이 없냐는 질문이 있

   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지리적 차이 때문이라 답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임진강은 현무암대지를 흐르는

   하천 이다. 그러므로 강폭이 좁아서 폭우 시 일순간에 강물이 불어나 배후습지는 물론 자연제방도 쉽게 침수

   된다. 이런 까닭에 적석총의 일부분을 두텁게 하여 강물에 의한 묘역의 훼손을 방지하고자 하였고, 그 결과

   적석부의 중간 부 분만 묘역으로 사용한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2) 강현숙, 2005, 「서울 지역 적석총에 대하여」, 『향토서울』,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04쪽.

3) 서쪽 부분이 특히 심하게 훼손되었는데, 이 부분은 농로에서 무덤으로 접근하는 진입로에 해당된다. 군부대에

   서 서분의 묘역은 물론 수행방지를 위한 적석부를 훼손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이유로 동분이 서분보다 잘

   보존 되었다고 판단된다.

4) 편년 부분을 제외하고는 아래의 글을 약간 수정하여 옮겼다. 金性泰 2002 「백제적석총의 역사고고학적 성격

    과 그 의미」 『기전고고』 2 기전문화재연구원 

5) 조선유적유물도감편찬위원회, 1996, 「장학리 적석무덤」, 『조선유적유물도감』 20.

6)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 1994, 『연천 삼곶리 백제 적석총』, 53-61쪽.

7) 위의 보고서

8) 이동희, 1995, 「남한에서 발견된 고구려계 적석총에 대한 일고찰」, 성균관대 석사학위논문, 51-52쪽. 

9) 아래의 글을 일부 수정하여 그대로 옮겼다. 金性泰, 2002, 앞의 글.

10) 이도학, 1995, 『백제 고대국가연구』, 일지사.

11) 朴淳發, 2001, 『한성백제의 탄생』, 서경문화사, 137-139쪽. 

12) 이는 고구려의 지명에 주로 등장하는 那가 강가와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집단을 의미한다는 언급과 무관하지 않다. 여호규, 2000, 「고구려 초기 정치체제의 성격과 성립기반」, 『한국고대사연구』17, 서경문화사, 139쪽.

13) 고구려와 동일한 예맥계에 속하는 부여지역의 묘제가 지상식이 아닌 지하식의 목곽묘인 사실은 부여가 정치

    ㆍ문 화적으로 이미 漢문화에 동화되어, 고유의 매장풍습이 변질된 데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된다.

14) 강현숙, 2000, 「고구려고분연구」, 서울대학교대학원 문학박사학위논문, 38-39쪽.

15) 이동희, 1995, 앞의 글, 51-52쪽.

16) 학곡리적석총에서는 묘곽 내에서 출토된 유물이 모두 완형이 아니었고, 묘역주변에서 구연부편들이 다량으

    로 수습되었다. 특히 이들 구연부편들이 갈색마연으로 고구려계 토기의 영향이 인정된다. 그리고 삼곶리적석

    총에서는 적석부와 묘역주변에서 구슬이 산발적으로 수습되었다.

17) 강현숙, 2003, 「고고학에서 본 4ㆍ5세기 고구려와 가양의 성장(토론요지)」, 『가야와 광개토대왕』, 제9회 가

     야사 국제학술회의 토론 요지문, 김해시, 80쪽.

18) 물론, 백제적석총이 고립적으로 분포하는 점, 단구성충적지의 모래언덕 위에 축조된 점, 그 축조재료가 자연

    석인 강돌인 점, 묘곽의 바닥면의 위치가 기단의 상면에 있지 않고 지표면에 있는 점 등은 고구려적석총의 속

    성들과 차이가 인정된다. 그러나 이는 유이민 집단이 갖는 정치사회사적 특수한 상황, 자연환경적인 요인 등

    에 기인한 변형된 속성으로 해석될 수 있다. 따라서 이런 일부 속성에서의 차이가 백제적석총의 고구려적석

    총 기원설을 부정할 수 있는 근거는 될 수 없다.

19) 노중국, 1988, 『백제정치사연구』, 일조각, 61쪽.

20) 『梁書』 卷54 百濟條. “今言語服章略與高驪同”

21) 金芳漢, 1983, 『한국어의 계통』, 민음사, 110-114쪽.

22) 박순발, 2001, 앞의 책, 137-139쪽.

23) 『三國志』卷30 馬韓條. “桓靈之末 韓濊彊盛 郡縣不能制 民多流入韓國”

24) 말갈은 祗摩尼師今 49년(125년)부터 逸聖尼師今 9년(142년)에 신라를 집중적으로 공략한 것을 마지막으로 2

    세 기대에는 백제와 신라에 대한 어떤 침략도 감행하지 않고 있다. 이강래, 1985,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

    의 군사활동」, 『영토문제연구』2.

25) 『삼국유사』 권1 제1 기이 마한 조의 기록에 인용되어 있는 내용 즉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에 이르기를

     ‘9한이 란 것은 1. 일본(日本), 2. 중화(中華), 3. 오월(吳越), 4. 탁라(乇羅), 5. 응유(鷹遊), 6. 말갈(靺鞨), 7. 단국

     (丹國), 8. 여진(女眞), 9. 예맥(濊貊)이다.’’라는 기록을 통해서도 말갈과 예는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다.

26) 『삼국지』 권30 예조. “無門戶之閉而民不爲盜…其人性愿慤 少嗜欲…作矛長三丈, 或數人共持之 能步戰” 

27) 『삼국지』권30, 예조. “無大君長…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28) 김병곤, 2002, 「임진강유역 적석총의 제문제」, 『임진강유역의 고대사회』, 57쪽.

29) 이강래, 1985, 앞의 글. 

30) 김병곤, 2002, 앞의 발표문, 57쪽.

31) 『삼국사기』 지리지 삭주조. "朔州 賈耽 古今郡國志云 句麗之東南 濊之西 古貊地"

32) 『삼국지』 권30 예조. "不以珠玉爲寶."

33) 연천 횡산리 적석총은 발굴 전 적석부가 거의 완전히 이미 훼손된 상태였다. 때문에 제대로 된 유구와 유물

     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자연사구의 상면을 평탄하게 처리하고 그 위에 적석부를 조성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34) 여호규, 2000, 「고구려의 기원」, 『신편 한국사』 5권, 국사편찬위원회. 

35) 『삼국사기』 권35 잡지 제4 지리2 朔州, 賈躭校勘 古今郡國志云. ‘句麗之東南, 濊之西, 古貊地. 盖今新羅北朔

      州.’

36) 『삼국유사』 권1 제1 마한 “三國史云 “溟州古穢國. 野人耕田得穢王印献之.” 又 “春州古牛首州古貊國.”  

37) 『신당서』 북적열전 흑수말갈 조에는 “그들은 죽은 자를 묻을 적에는 관곽(棺椁)이 없다.”라고 하였다. 이런

     기록을 말갈과 예족은 동일한 문화적 기반을 지녔다는 통념과 연결하고, 다시 그런 사실을 현재 강원도 북부

     와 함경도 지역에서 뚜렷한 묘제가 확인된 바 없다는 고고학적 사실과 연결시킬 수 있다. 이에 현재까지의

     자료에 근거 할 때 예인은 장례는 하되 직장(直葬)하였던 것으로 일단 유추할 수 있다.  

38) 윤무병은 『삼국지』와 『후한서』에서 예족을 예맥으로 칭하여 맥족과 혼동하고 있으나 이는 후대 사가의 오

     류이며 예족은 貊이나 濊貊과는 구분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윤무병, 1966, 「예맥고」, 『백산학보』1, 백산학

     회, 22-25쪽.  

39) 이런 결론에 도달할 때 원주 법천리 고분군에서 확인된 토광묘가 문제된다. 그런데 원주 법천리 고분군의 입

     지가 구릉이 아니라 충적대지의 자연제방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입지 선정은 적석총의 그

     것을 따르고 있다. 따라서 주구토광묘 집단과는 다른 계통으로 볼 수 있겠다.  

40) 아래의 글을 일부 다듬어 그대로 옮겼다. 김성태, 2016, 「‘삼국사기’ 북한산성에 대한 역사고고학적 고찰」,

     『북한산성연구논문집』, 경기학연구센터. 

41) 김성태, 2016, 앞의 글, 435〜436쪽. 

42) 이런 견해는 “육계토성의 현치소로부터 7리에 있고 둘레는 7,692척이다. 성내에 礎石이 있는데 그곳 사람들

    은 (그것을 두고) 옛날 궁궐터가 있었던 자리라고 지적하는데 고려의 離宮이 아닌가 생각된다.(『輿地圖書』 補

    遺篇( 京畿道) 積城縣誌目錄 古蹟)라는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어쨌든 육계토성 일대가 임진강유역에서 행

    정적, 군사 적으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점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43) 임기환, 2005, 「廣開土王碑에 보이는 百濟 관련 記事의 檢討」, 『漢城百濟 史料硏究』, 경기문화재단, 148쪽.

44) 전자는 코카콜라를 可口可樂(가구가락)으로 표기한 것이 한 예이며, 후자는 나폴레옹을 法國大將軍(법국대

     장군) 이라 부르는 것이 한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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