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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능묘에 담긴 고려인의 삶과 죽음 (1)

고려시대 사후의 공간

이 글은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유산 교육프로그램 <2018 경기문화유산학교>의 강의 내용을 정리한 글 입니다.

이희인(인천광역시립박물관 유물관리부장)



Ⅰ. 고려시대 사후의 공간

1. 과거를 보는 또 하나의 창(窓), 무덤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개성 출신 호족의 아들이었던 왕건이 고려를 열었다. 당시는 명운이 다한 천년 왕조 신라와 궁예와 견훤 등이 세운 나라가 서로의 운명을 다투던 혼돈의 시기였다. 본래 왕건은 궁예의 휘하에 있다가 42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 뒤 나라의 이름을 고려로 바꾸었다. 고려는 935년(태조 18)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듬 해 후백제를 무너뜨리면서 ‘반란 세력’에서 정통 왕조가 되었다.

 당시 고려의 등장은 한반도를 통치하던 왕조가 교체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한국사 시대 구분에서 고대에서 중세의 이행기로 인식되기도 하는 나말여초(羅末麗初)기 정치·사회·문화의 변동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변화는 새 왕조가 등장하기 오래전부터 시작된 것이지만 고려의 건국은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처음으로 지방 세력이 주도해 건설한 왕조 고려의 등장은 한반도의 중심이 이동하는 계기가 되었다. 건국 이듬해인 919년(태조 2) 지금의 개성에 도읍을 정하면서 사회·경제·문화의 주도권이 동남부 경주에서 중부 지역으로 옮겨졌다. 500여년 뒤 조선왕조가 들어서면서 한양으로 도읍이 옮겨졌고 오늘날에는 행정수도 건설 등 변화의 움직임이 있지만, 10세기 전반부터 1,000여 년 동안 한반도의 중심이 경기만(인천만) 일대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나말여초 전환기에 사람들의 생각과 생활방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이는 곧 사람들의 삶의 흔적인 유적과 유물에 드러나는데 여기에는 삶의 한 축을 이루는 죽음과 관련된 물질 자료도 예외가 아니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죽음의 의미와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을 체득하면서 죽음을 대하는 나름의 방식을 만들었다. 시대와 지역 그리고 문화마다 죽은 자를 처리하는 방식은 다르지만 오늘날 우리가 물질 자료로 확인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인 형태는 매장이다. 보통 사자(死者)를 안치하는 공간을 무덤이라 부르는데 그것의 형태나 규모, 묻힌 이의 신분 등 여러 기준에 따라 고분(古墳), 능(陵), 분묘(墳墓), 분(墳) 등으로 다양하게 불린다.

 지금도 그렇듯이 세상을 떠난 가족과 친지 등을 매장하는 방식이나 절차는 집안마다 또 지역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죽은 이를 떠나보내는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 경제적 사정 등 다양한 요소가 개입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덤이 단순히 시신을 안치하는 공간 이상의 의미, 다시 말해 무덤을 조성했던 시기의 사회·경제·문화적 상황이 담겨 있음을 알려준다. 그래서 무덤의 구조와 형태, 규모, 부장품 등을 통해 우리는 과거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무덤을 만드는 제도를 묘제(墓制)라 하고 이를 포함해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제반 절차를 장제(葬制)라 했을 때 이러한 묘·장제는 쉽사리 변화하지 않는다. 지금은 화장(火葬)이 점차 보편화되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매장 중심의 복잡한 장례 절차가 유지되었던 사실을 떠 올려 보면 이해가 쉽다. 보수적인 묘·장제가 변화한다는 것은 곧 당대의 사회 전반에 크고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2. 무덤의 변화

고려시대 이전 한반도에는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역사시대로 한정해서 보면 삼국시대 고구려와 백제는 적석총, 신라는 천마총으로 대표되는 적석목곽분이 최상위 계층의 묘제로 적용되었다. 이밖에 묘광을 파고 벽체를 돌로 쌓은 석곽묘(石槨墓)와 흙을 파고 목관 또는 시신을 안치하는 토광묘(土壙墓), 대형 토기[甕]에 시신을 안치하는 옹관묘(甕棺墓) 등 다양한 형태의 무덤이 조성되었다. 삼국시대 후반부터 각 나라의 상위 묘제는 저마다 구조의 차이는 있지만 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로 통일되고 이와 함께 석곽묘가 보편적인 묘제로 자리 잡는다.

통일신라시대 성행한 횡혈식석실분은 왕실과 상위 계층의 무덤으로 사용되었다. 굴식돌방무덤이라고도 불리는 이 묘제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지하 또는 반 지하에 돌로 무덤방을 조성하고 여기에 묘도(墓道)와 연도(羨道)로 이루어진 널길을 연결해 외부와 통하는 구조다. 무덤방 천정은 위로 갈수록 줄어드는 궁륭상(穹窿狀)이다. 석실 바닥에는 시신을 직접 안치하는 시상대 또는 목관을 놓는 관대가 설치되며 그 위에는 시신의 머리와 발을 받치는 머리베개[頭枕]와 발받침[足座]이 놓여 지기도 한다. 널길을 통해 무덤방으로 출입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시신을 안치한 뒤에 또 다른 망자(亡子)를 추가로 안치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나의 무덤방에 여러 명이 안치된 유적이 확인되어 실제로 추가장(追加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석곽묘는 청동기시대부터 사용된 무덤으로 삼국~통일신라시대에 널리 사용된다. 시신을 널길을 통해 수평 방향으로 무덤방에 안치하는 횡혈식석실분과 달리 석곽묘는 위에서 아래로 안치하는 수혈식 구조가 많다. 석곽의 하단에 간단한 묘도를 설치해 시신을 안치하는 횡구식 석곽묘(橫口式石槨墓)도 존재하는데 통일신라시대에는 수혈식 석곽묘가 보다 보편적으로 확인된다. 석곽묘에도 횡혈식석실분처럼 바닥에 시신 또는 목관을 안치하는 대(臺)가 설치되었는데 점차 별다른 시설 없이 흙바닥을 그대로 활용하는 사례가 증가한다.

고려시대 묘제로는 석실분과 판석재(板石材) 석곽묘, 할석재(割石材) 석곽묘, 토광묘가 주로 사용되었고 화장묘(火葬墓)도 성행하였다. 이상의 묘제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전통적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기본적으로는 이전시기 묘제의 흐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횡혈식석실분이 사라지고 석곽묘 보다 토광묘가 가장 보편적인 무덤의 형태로 자리 잡는 변화가 나타난다.(이희인, 2017)

 지금까지의 자료로 보면 삼국시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던 횡혈식석실분은 고려시대 들어와 소멸한다. 고려시대 석실분은 돌로 무덤방을 만든다는 점에서는 횡혈식석실분과 기본적인 구조는 같지만 널길이 사라지고 천정도 궁륭상이 아닌 평천장으로 변화한다. 게다가 왕과 왕비의 무덤, 즉 왕릉(王陵)으로만 사용되는 차이가 있다. 한편 상위 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판석재 석곽묘라는 새로운 무덤의 형태가 등장한다. 판석재 석곽묘는 다듬어진 판석(板石)을 이용해 벽면과 덮개를 구성하며 내부에 벽화가 그려지기도 한다. 석실분이 축소된 형태로 인해 판석재 석곽묘는 소형 석실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고려시대 판석재 석곽묘(거창 둔마리 벽화묘) / 한국학중앙연구원

 고려시대 묘제의 변화 가운데 주목할 만 한 것은 토광묘가 널리 조성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석곽묘처럼 선사시대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토광묘는 삼국~통일신라시대에도 축조되었지만 고려시대에 가장 일반적인 무덤의 유형으로 자리 잡게 된다. 토광묘는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편적인 무덤 형태라는 점을 감안하면 토광묘가 확산되었던 고려시대는 한반도 묘제의 흐름이 석축묘에서 토축묘로 변화하는 분기점이 된다고 하겠다. (이희인, 2017)

고려시대 석곽묘와 토광묘 / 이희인

모든 시대에서 그러했듯이 고려인들은 위계에 따라 다른 무덤을 만들었다. 왕과 왕비는 그들의 무덤으로 석실을 조성했고 상류층은 판석재 석곽묘, 그 이하는 석곽묘와 토광묘를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매장 이외에 화장(火葬)도 성행했다. 화장묘는 지금까지 고고학적 자료로서 확인된 예는 많지 않은데 유골을 안치하는 용기에 따라 조립식석관묘(組立式石棺墓), 화장 옹관묘 등이 알려져 있다. 이중 조립식석관묘는 각 면을 판석으로 조립해 1m내외 크기의 상자 형태로 만든 것으로 석관 외면에 사신도와 별자리 등을 새겨 놓았다. 석실분을 크게 축소한 모습으로 상위 계층에서 화장을 한 인골을 담았던 용기로 여겨진다. (정길자, 1985)

조립식 석관묘 / 성균과대학교 박물관 소장

무덤에는 자기와 도기, 금속기 등을 부장품으로 넣었다. 무덤의 위계에 따라 부장품의 질과 양, 조합은 차이가 있으나 기본적인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다. 자기는 10세기 초기 청자가 한반도에서 제작되기 시작하면서 무덤에 부장되기 시작했다. 기종은 완과 발을 중심으로 접시, 대접이 가장 일반적이며 잔, 잔탁, 편병 등의 특수 기종도 확인된다. 이전 시기부터 주요 부장품이었던 도기류는 편병, 반구병, 항아리 등 다양한 기종이 있다. 금속기로는 청동 합, 발, 잔, 접시 등의 기명(器皿)과 동곳, 거울, 숟가락과 젓가락 그리고 동전과 철제가위 등이 주된 품목이다. 고려시대 부장품은 대게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일용품들로 구성되는데 이 가운데 자기 발과 접시, 숟가락은 고려시대 무덤에서 가장 기본적인 부장품으로 세트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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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8경기문화유산학교

    발행일/ 2018.8.13

    기획/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경기문화재단 경기문화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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