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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유역 교통로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이 글은 ‘2018 경기문화재연구원·중부고고학회 학술대회 - 임진강 유역, 분단과 평화의 고고학' 자료집에 수록된 발표주제문입니다. |
임진강 유역 교통로
서영일(한백문화재연구원)
Ⅰ. 머리말
Ⅱ. 지리적 범위와 관계적 위치
Ⅲ. 교통로 형성의 지리적 배경
Ⅳ. 시대별 활용과 변화
Ⅴ. 맺는말
Ⅰ. 머리말
현대의 임진강은 남북 분단을 상징하는 하천으로 인식되고 있다. 임진강 유역은 대부분 남북 경계지대나 북한 지역에 속하고 있다. 그 때문에 남한지역의 정치와 경제의 중심에 해당되는 한강 유역과는 구분해서 보는 것이 일반적 인식이다. 그러나 조선시대 문헌에는 대체로 한강의 지류로 인식하고 있었다. 현재 대부분 사전에서도 한강의 제 1지류로 기록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한강이 서해와 합류하는 곳은 김포반도와 강화도 북쪽 해안에 연접한 조강일대 이다. 임진강은 그 이전에 한강에 합류하기 때문에 임진강을 한강의 지류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임진강은 강원도 법동군 용포리 두류산 남쪽에서 발원한다고 알려져 있다. 함경남도 안변군 마식령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서 하류에서 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로 들어간다. 임진강의 대지류인 한탄강은 강원도 철원군 대성산에서 발원하여 남서쪽으로 흘러서 연천군 전곡면도 감포에서 한탄강과 합류하고 있다. 임진강의 전체 길이는 약 254㎞로 추산되고 있는데 그 중 작은배라도 다닐 수 있는 가항구간은 하구에서 약 125㎞ 정도 떨어진 강원도 안협까지였다. 전체 길이의 약 절반이상이 가항구간에 속하지만, 실제로 큰배는 고량포까지만 갈 수 있고 동절기 결빙되는 점을 고려하면 내륙수로로서의 활용 가치는 크지 않다.
임진강 유역이 교통로로서 가치를 가지는 것은 수로 보다는 육로의 발달과 활용과정에서였다. 임진강과 그 지류들은 대체로 한반도의 중북부를 남서-북동으로 가로지르는 추가령 구조곡을 따라서 흐르고 있다.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구분한다면 바로 추가령구조곡이 그 기준이 된다. 추가령구조곡은 차별침식에 의하여 형성된 선형의 저지대이다. 이것이 일종의 회랑지대를 이루며 교통로로 활용되기에 유리한 조건이다. 전근대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원산 방향의 교통로가 추가령구조곡을 따라서 이어졌다.
지리적인 조건을 고려하면 임진강 유역 교통로는 서울-원산 방향으로 발달하기 유리하고 그 활용도 편리하다. 하지만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적 중심지는 한강 하류와 대동강 하류 지역 등 모두 한반도 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강 유역은 그 사이에 위치하게 되는데, 그 덕분에 한강 유역과 대동강 유역을 서로 등양 이어주는 교량적 위치에 해당된다. 따라서 역사와 인문 환경을 고려한 교통로의 개척과 활용은 임진강 유역을 유로 방향과 직교하여 가로지르는 방향이 더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임진강 유역의 고개나 도강처는 교통거점으로서 역할이 중요하게 인식되었다.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에 대해서 고고학이나 역사지리 분야에서 크게 주목되어 연구된 적이 거의 없었다. 다만 임진강 유역 고구려보루의 입지 및 형성 배경과 관련하여 주요 도강처나 교통로 노선 등이 단편적으로 언급된 적은 있었다. 그것도 대부분 고대 관방 유역과 관련 등 제한적 범위에서 이루어져 임진강 유역 교통로의 역사적인 변화를 설명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이 글은 바로 임진강 유역 교통로의 형성과 변화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조건부터 인문적 환경 및 역사적 변화까지 임진강 유역 교통로를 포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자료의 제한과 실제 답사가 불가능해서 연구의 한계도 분명하지만 향후 연구를 촉진시키고 방향을 살펴본다는 데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Ⅱ. 지리적 범위와 관계적 위치
조선후기 신경준이 저술한 『산경표』는 한국의 산줄기에 대한 전통적 지리인식을 집대성한 것으로 주목된다. 한국인들은 전통적으로 백두산에서 산줄기가 뻗어 나와 전 국토의 산줄기를 이루었다고 생각하였다. 통일신라시대 말기부터 유행한 풍수지리에서도 백두산을 신성하게 여기고 백두산에서 시작한 생기가 각 지역으로 뻗어 나간다고 보았다. 그러한 인식은 조선 후기를 거쳐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근대이후 한국에서 주로 사용했던 산맥은 땅속의 지질구조선를 바탕으로 설정되어 있다. 일본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가 1900년 및 1902년 두 차례 조사를 거쳐 작성한 「조선의 산악론」으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이를 일본 정치지리학자 야스 쇼에이(失洋昌永)가 차용하여 한국의 산맥을 정리한 것이다. 고토의 지질도는 불과 14개월 만에 작성된 것이다. 그 목적도 한반도의 지하자원을 수탈하는데 있었다. 이것이 엉뚱하게 지리학의 산맥 개념으로 변화된 것이다.
산맥이 형성된 기초는 지질 구조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은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질 구조선에 의하여 분류된 산맥 체계는 실제 우리가 보고 느끼는 산줄기와는 차이가 있다. 대표적으로 일본 학자의 산맥 체계는 하천의 흐름에 의하여 산줄기가 침식되어 끊어지는 경우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광주산맥의 경우 한강에 의하여 산맥이 절단되었으며 차령산맥도 곳곳이 침식에 의해서 산줄기가 끊어졌다. 이 같이 침식 활동에 의하여 지질 구조선과 다르게 형성된 산줄기를 산맥 체계에서는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사람들의 생활권은 물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선사시대 이후 마을과 도시는 물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다. 식수의 확보와 이용뿐만 아니라 농경지 역시 물줄기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또한 물줄기는 그 자체는 물론 물줄기에 의하여 침식되거나 퇴적된 주변의 평탄지를 통해서 외부세계와 연결되는 통로가 되어왔다. 하나의 수계는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상호교류하면서 문화적으로도 동질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산맥 체계는 지역과 지역의 구분에 혼란을 주고 물줄기를 매개로 형성된 생활권 및 경제권, 문화 양상 등을 파악하는 데에도 어려움도 있다.
그림1. 산경표의 임진강 유역 |
나의 수계는 상류에서 하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상호교류하면서 문화적으로도 동질성을 공유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산맥 체계는 지역과 지역의 구분에 혼란을 주고 물줄기를 매개로 형성된 생활권 및 경제권, 문화 양상 등을 파악하는 데에도 어려움도 있다. 『산경표』에서는 한반도 산줄기를 백두대간과 장백정간을 골격으로 하고 여기에서 발생하여 뻗어나간 13개의 정맥을 포함하여 총 15개로 구분하고 있다.
『산경표』에서 산줄기를 구분하는 기준은 분수계이다. 분수계에 의하여 물길이 갈리고 각각의 물길은 다시 산줄기에 의하여 서로 구분된다. 따라서 하천과 하천이 서로 뚜렷하게 구분되며 각 하천의 수계와 유역이 분명해진다. 체감상 느끼는 지표상에 산줄기의 모습도 잘 반영하고 있다. 그 덕분에 수계를 중심으로 생 활권을 구분하고 그 생활권 또는 지역의 문화적 양상과 그 변화를 살펴보는데 유리하다.
이렇게 『산경표』에 구분된 산줄기를 기준으로 임진강 유역의 범위를 설정하면 그 지역적 특성을 파악하는데 편리하다. 또한 임진강 유역과 주변 지역과의 관계 파악에도 유리하다. 『산경표』에 표현된 산줄기를 통해서 임진강 유역의 범위를 살펴보면, 한북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의 사이가 된다. 이 두 산줄기는 모두 백두대간에서 분리되어 남쪽방향으로 타원형의 형상을 이루며 한강 하구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은 사방이 백두대간, 해서정맥, 임진북예 성남정맥, 한북정맥 등에 의하여 둘러싸인 커다란 분지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그 중 남서쪽 한강 하구 일대만 한강 및 서해 바다에 접하여 개방된 형태이다.
임진강 유역의 동쪽과 남쪽을 이루는 한북정맥은 백두대간의 추가령에서 갈라져 나와 한강 하구에 이르는 산줄기이다. 한강 유역과 임진강 유역을 가르는 분수계이다. 추가령에서 포천 일대에 이르기까지 해발 1000m에 달하는 고봉들이 연이어 이어지면서 험준한 산줄기를 형성하고 있다. 포천을 지나면서 산줄기의 높이는 낮아지기는 하지만 죽엽산, 북한산 등 해발 600m이상의 봉우리가 여전히 곳곳에 솟아 있다. 대체로 둘러싼 산줄기는 상당히 높고 험한 산이 연속되어 있다.
그림2. 임진강 유역의 범위 |
임진북예성남정맥은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부터 갈라져 나와서 장산곶까지 이어지는 해서정맥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다. 해서정맥에 속하는 강원도 이천의 개련산(화개산)에서 갈라져 나와 개성 진봉산 부근에서 한강하구와 접한다. 두류산에서 개련산까지는 대동강의 지류인 남강 유역과 분수계를 형성한다. 개련산에서 진봉산까지에서는 예성강 유역과 분수계를 이룬다. 두류산에서 개련산까지는 해발 1000m 내외 높은 산봉우리가 이어지나 개련산을 지나면 점차 낮아져서 신계와 이천 사이에서는 해발 700m 내외로 낮아진다. 이후 토산 일대에서는 해발 고도가 200m 이하로 낮아지고 산세도 약화되어 구릉성 산지로 바뀐다.1) 토산을 지나서는 다시 수룡산, 대둔산, 천마산 등 개성 북쪽에서 해발 700m 이상 높은 봉우리를 이루는데, 송악산을 지나면서 점차 구릉으로 변하면서 사라진다.
이 같이 임진강 유역은 사방을 둘러싼 산줄기에 의하여 주변 지역과 구별되며 그 내부는 하나의 커다란 분지를 이루고 있기도 하다. 임진강은 한국에서 7번째로 큰 하천이며 유역면적도 상당하다. 주변 지역과 연결되는 교통도 편리하며 더구나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다. 임진강 유역이 하나로 통합된 독립적인 경제생활권으로 묶일 수도 있다. 역사상 그러한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바로 그 주인공은 철원을 도읍으로 정하고 삼한의 통일을 꿈꾸었던 궁예였다.
그런데 임진강 유역은 전반적으로 하류 지역을 제외하면 가용 가능한 토지가 많지 않다. 사실 철원과 평강 일대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어서 이러한 주장이 의심되기도 할 것이다. 철원과 평강 일대의 평원은 용암대지이다. 평강 오리산에서 분화한 용암이 서서히 식으면서 흘러 연천군 전곡읍 일대까지 용암대지를 형성한 것이다. 이 용암대지 상면에는 점토층이 퇴적된 상태로 넓은 평원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기반암이 물이 투과되는 기공질의 현무암으로 구성되어 지하수를 간직할 수 없다. 그 때문에 용암대지 상면에서는 식수나 농업용수의 확보가 어려워 마을이나 농경지로 활용되기 어려웠다. 전곡읍 일대의 용암대지는 가사평으로 불렸는데, 거의 황무지와 다름없어서 조선시대에는 강무장으로 활용되었다. 철원평야는 현대에는 임진강 유역에서 대표적인 곡창지대가 되었다. 하지만 이곳이 곡창지대로 변하게 된 것은 근대 이후였다. 농업용수를 확보하기 위해서 큰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수로가 설치되면서부터였다. 그 이전에는 역시 대부분 황무지에 가까운 땅이었다.2)
임진강 중상류 지역은 가용 농지가 적어 인구부양력이 크지 않기에 큰 마을이나 도시가 들어서기가 어렵다.3) 당연히 경제나 문화 측면에서 거점 지역으로 성장하기가 어려웠다. 임진강유역이 단일한 경제 및 문화적 공동체나 그 중심지로 성장하기 어려웠다. 궁예가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지만 오래가기 어려웠던 것도 이 같은 경제지리적 약점을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임진강 유역에서 가장 경제지리적 여건이 좋은 지역은 개성, 파주, 장단 등 하류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임진강 중상류지역에 비하여 넓은 농지가 있고 한강 유역 및 예성강 유역과 연결이 편리하다. 따라서 한강 유역이나 예성강 유역과 생활권이 연결되었지만 임진강 상류 지역과는 구분되었다.
이같이 경제지리적인 측면에서 임진강 유역은 주변 지역에 비하여 전반적으로 생산력이 아주 열악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역사적으로 경제와 문화면에서 독립성 보다는 종속성이 부각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지역의 관계적 위치는 나름대로 특성이나 장점을 가지고 있었다.
임진강 유역 동쪽과 남쪽은 한강 유역이다. 한강 유역은 한반도에서 가장 유역 면적이 넓으며 한반도 중부 지방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 임진강 유역 북쪽은 관북지방으로 함흥, 원산 등 한반도 동해안 북부의 해안평야지대이다. 원산만 등을 비롯하여 동해안에서 가장 항구로서의 자연적인 조건이 탁월한 지역이다. 함흥에서 원산에 이르는 지역은 해안평야와 양항이 입지할 수 있는 조건이 합쳐져 농경과 해양 활동 여건이 모두 우수한 곳이다. 이 지역은 대외적인 교통조건도 탁월하다. 북으로 육로와 해로로 동해안을 따라서 두만강 유역과 연해주 일대로 연결이 된다. 서북쪽으로는 부전강과 장진강 등의 유로를 지나고 개마고원을 거쳐서 만주 내륙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북방계 문화가 남하하면서 경제와 문화의 거점을 형성할 수 있는 최적지라고 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 북서쪽은 높은 산과 그 사이의 협곡으로 이루어진 산악지대로 대동강의 대지류인 남강 상류의 신평, 양덕, 곡산 등과 접하고 있다. 이 일대는 평지가 거의 없어 농경 조건이 나쁘고 사람이 거주하기에도 불리하다. 그 중 곡산 일대는 임진강 유역에서 예성강 유역을 거치지 않고 대동강 유역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로서 기능이 주목된다. 또한 관서지방과 관북지방을 연결하는 교통로가 지나가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4)
임진강 유역 서쪽 대부분은 예성강 유역과 접하여 있다. 예성강 유역은 평산 일대를 경계로 예성강 상류와 하류 지역으로 구분할 수 있다. 예성강 상류에 위치한 신계, 수안 일대는 산악지대이지만 곡산에서 신계에 이르기까지 용암분지가 형성되어 비교적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수안에 위치한 방원령은 임진강 중상류에서 대동강 유역으로 나가는 교통로가 지나가는 고개이다. 따라서 신계-수안 등은 이 교통로의 중간 거점지역으로 활용되어 왔다. 예성강 하류지역은 평산, 봉천, 금천, 배천, 개풍 등지이다. 예성강 하류의 비교적 넓은 평야지대로 농업 생산에 유리하다. 황해도 남부의 연안, 해주 등 해안지대 및 한강 하구와 연결되어 해양 활동에 유리한 환경도 가지고 있다.
이 같이 임진강 유역은 한강유역, 대동강 유역, 예성강 유역, 관북 지방 등에 둘러싸여 있다. 다시 말해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하여 남과 북, 동과 서를 서로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가 된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대동강 유역, 관북지방, 한강 유역 등 한국사와 한국 문화 전개의 중심지였다. 임진강 유역은 이 두 지역을 서로 연결하는 매개지로서 역할이 주목되는 곳이다. 임진강 유역의 지역사나 고고학적 환경을 살펴볼 때 이러한 점을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신석기시대부터 원삼국시대까지 한강이남 지역으로 들어왔던 문화 유입 통로는 크게 서해안 방면과 동해안 방면이 주목되고 있다. 전자는 요동일대로부터 압록강과 대동강 하류를 지나서 한강 및 금강유역으로 이어지는 통로이다. 서해안 해로와 함께 임진강 유역을 거치는 육로 역시 주목되고 있다. 후자는 연해주 일대에서 동해안을 따라서 이어지는 통로이다. 동해안에서 한강 유역이나 금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문화 유입로는 당연히 원산만 일대에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임진강 유역을 거쳐서 한강 유역으로 이어지는 통로가 주목된다. 이 통로는 연해주 일대는 물론이고 만주에서 서북한 지역을 우회하여 한반도 중부와 남부 지역으로 유입되는 문화의 통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구체적인 통로와 각 시기별 양상이나 특성 등에 대해서는 아직 자료가 충분하지 않고 규명할 것도 많이 남아 있다.
삼국시대 이후에는 정치나 군사 측면에서 임진강 유역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와 백제, 고구려와 신라의 경계 지대로 군사 요충지였다. 4세기부터 7세기까지 임진강 유역 일대는 치열한 전장터가 되었다. 그 때문에 이 지역은 인구의 밀집도도 낮고 경제나 문화의 개발도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이 지역에는 전쟁의 산물로 다수의 관방시설이 밀집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중 상당수는 현재까지도 정확한 파악이 곤란하다. 남한 지역을 대상으로 일부 관방시설이 파악되고 그에 대한 연구도 점차 활성화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임진강 유역의 대부분이 현재 북한 지역에 속하여 있다. 남한 지역도 군사 지역에 속한 것이 많아 자유로운 연구가 어렵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개경과 한양이 도성이 되면서 임진강 유역의 대부분은 그 외곽지대에 속하게 되었다. 도성을 중심으로 방사선형태로 뻗어나가는 교통로가 임진강 유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면서 관방시설 및 교통시설이 정비되기도 하였다. 특히 북방민족의 침입과 관련해서 임진강 유역은 도성을 호위하는 최후의 보루였다. 특히 고려시대 이후 임진강 하류지역은 도성의 근교로서 크게 개발되었고 조선시대까지도 그 성격은 대체로 유지되었다. 다만 임진강 중상류 지역은 여전히 군사적으로 주목 받았을 뿐, 경제나 문화의 거점으로 성장하지는 못했다.
마지막으로 임진강 유역의 관계적 위치를 살펴보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남북분단으로 고고학적 자료를 확보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현재 임진강 유역 일대가 대부분 군사지역으로 조사가 불가능하다. 그 대안으로 대동강 유역이나 원산 함흥 등지의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한강 유역과 연결하여 파악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중간 매개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임진강 유역의 문화 양상이 파악되지 않는다면 충분한 결과를 도출하기가 어렵다.
Ⅲ. 교통로 형성의 지리적 배경
임진강 유역의 수계망을 살펴보면, 크게
임진강 본류와 그 지류인 한탄강 유역으로
구분된다. 임진강 본류는 대체로 남북방향으로 흐른다. 상류지역의 지류는 대체로 동서방향이 주방향이 되고 있다. 반면에 하류지역은 임진강이 동서 방향에 가깝게 흐르면서 남북 방향의 지류가 발달하였다.
한탄강은 주 방향이 동서 방향에 가까우며 지류는 대부분 남북방향이 주방향에 가깝다. 한탄강의 지류를 포함한 대부분의 하천의 흐름은 남북 방향이 우세한 편이다. 임진강 유역은 전반적으로 남북방향으로 지질단층선이 발달하였는데 그 단층선을 따라서 하천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탄강 유역은 추가령구조곡의 영향으로 남북 방향의 유로가 절대적으로 우위를 보이고 있다.
하천의 방향은 교통로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친다. 수로는 물론이고 육로도 대체로 하천에 의해서 침식된 저지대를 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임진강 유역의 하계망의 발달과 추가령 구조곡 등 지질단층선의 영향 등을 고려하면, 교통로는 남북 방향이 발달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림3. 한탄강 하계망 |
임진강 유역의 남북방향 교통축은 크게 두 개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임진강 상류지역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함흥 방향의 축이다. 추가령구조곡 및 그와 같은 방향으로 형성된 하천 유로를 활용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임진강 하류 지역을 관통하는 의주 방향의 축이다. 이 두 교통축은 한반도의 대표적인 교통축이며, 현재 서울 지역에서 결절되게 된다.
함흥축 교통로는 다시 크게 두 노선으로 대표된다. 동쪽은 서울-포천-철원 등을 거치는 길 이다. 서쪽은 서울-양주-동두천-연천-철원을 지나는 노선이다. 연천을 거치는 서쪽 길은 추가령구조곡을 따라 이어져 거의 직선에 가깝다. 전자에 비하여 거리가 가까운 지름길이다. 다만, 이 노선이 통과하는 동두천, 전곡 등지는 포천 지역에 비하여 인구밀집도가 떨어진다. 따라서 교통거점이나 교통시설이 들어설 수 있는 여건이 불리하였다. 조선시대 이전의 상황은 짐작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두 노선이 모두 활용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초기부터 포천 노선이 함흥 방향 간선로로 더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연천 노선이 다시 각광을 받게 된 것은 조선 후기였다. 원산에서 한양으로 명태를 운송하던 상인들이 포천을 경유하는 노선 보다 연천을 경유하는 노선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연천 노선이 포천 노선에 비하여 가깝고 더 빠른 길이었다. 이후 근대 경원선 철도가 포천 유림의 반대로 연천로를 경유하면서 현대 대표적인 교통로가 된 것이다.
연천을 경유하는 노선이나 포천을 경유하는 노선은 철원에서 합류되어 추가령구조곡을 따라서 평강까지 이어진다. 평강에서 백두대간을 넘어서 안변으로 가는 길은 다시 철령과 추가령을 경유하는 길로 나누어진다. 철령을 넘는 길은 평강에서 동쪽으로 회양을 지나간다. 이 길은 조선시대 공식적인 교통로였다. 추가령을 넘는 길은 세포를 지나서 추가령을 넘어 고산에 이른다. 세포와 고산 사이는 긴 협곡지대이다. 이곳을 지나는 길을 조선시대에는 삼방로라고 불렀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이 길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5)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철령로가 역로로 사용되었고, 삼방로는 국방상 이유로 통행이 차단되었다. 이를 조선 후기에 상업과 장시의 발달에 따라 상인들이 다시 개척하여 활용하게 되었다. 당시 고갯길에 세군데 방수처를 설치하여 삼방이라고 한 것이다.
의주축의 노선은 임진강을 도강하는 지점 및 임진강 양안의 교통거점의 통과 여부에 따라 다양한 노선이 나타날 수 있다. 임진강은 강안 지대에 주상절리가 발달하여 도강에 불편한 곳이 많다. 비교적 도강이 편리한 곳은 임진강의 지류가 합류하면서 강안 절벽을 침식한 곳과 여울이 발달한 곳이다. 또한 임진강은 연천군 장남면 고량포를 중심으로 도강하는 방법도 차이가 난다. 고량포 상류는 수심이 낮은 여울이 곳곳에 발달하여 배가 없이도 건널 수 있는 곳이 많다. 하지만 고량포 하류는 강폭도 넓고 수심도 깊은 편이어서 배가 없으면 도강이 어렵다.
고량포 하류에서 배로 건널 수 있는 대표적인 도강 지점은 임진나루이다.6) 임진나루 양쪽의 교통 거점은 파주7)와 장단8)이다. 파주는 고양을 거쳐 서울로, 장단은 개성으로 서로 연결되어, 임진나루는 개성과 서울 사이 가장 지름길을 연결하는 나루가 된다. 하지만 이 노선이 간선로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중기 남경이 건설된 이후부터이다. 그 이전 시기에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9) 서울-개성 방향의 보조 노선적인 성격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시대 중기 이전에는 고량포 동쪽의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와 파주시 적성면 주월리 일대가 임진강의 대표적인 도강처였다. 이 지역은 『삼국사기』에 의하면 백제초기부터 호로하라고 불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주월리에는 삼국시대 육계토성이 있고 그 내부에서 백제마을이 발견된 적이 있다. 또한 그 북쪽 대안인 원당리에는 호로고루가 있다. 육계토성에서 호로고루에 이르는 지역은 사미천 등 크고 작은 하천이 임진강으로 유입되면서 강안의 단애를 침식하여 임진강으로 접근이 편리하다. 또한 강에는 여울이 발달하여 배가 없이도 걸어서 도강할 수 있는 구간도 있다. 임진강 하류에서부터 장비 없이 도강이 편리한 첫 지점이 이 일대가 된다. 따라서 삼국시대 이전부터 임진강의 대표적인 도강처로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까지 장단의 중심지는 원당리와 그 인근의 자작리 일대였다.10) 적성도 조선시대까지 현으로 독립되어 있었으며 파주와 구분되었다.
적성과 장남 일대는 바로 이 도강처의 강 언덕에 위치하며 도강처의 교통 거점이 된다. 적성에는 삼국시대 격전지였던 칠중성이 있으며 남쪽으로 설마치를 통해서 양주분지와 연결된다. 장남에서 북쪽에서 흘러온 사미천의 유로를 따라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옛 임강현11)의 치지가 있었던 강상면 일대를 지나고 여기에서 임진북예성남정맥의 대표적인 고개 백치로 연결된다.12) 백치는 장단과 금천 및 토산13)으로 연결되는 고개이다. 백치를 넘어서 서쪽으로 가면 금천에 이르고 북쪽으로 가면 토산에 이른다.14) 이 고갯길은 연결하는 개성을 거쳐 평산으로 가는 통로와 함께 임진강 유역에서 평양 방면으로 가는 대표적인 교통로가 된다.
당포성이 있는 연천군 마전리 부근도 임진강의 대표적인 도강처의 하나로 추정된다. 마전리는 조선시대 마전현의 중심지였다. 양주에서 감악산 동쪽의 간파천 협곡을 따라 내려오면 어유지리를 거쳐서 삼화리에 이른다. 삼화리에서 당포성 전면의 여울을 건너면 마전이다. 간파천 협곡의 서쪽에는 아미성과 동쪽에는 수철성이 있다. 아미성에서는 고구려 유물이, 수철성에서는 신라 유물이 주로 출토되었다. 이 산성으로 보아 이 길이 삼국시대에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마전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마전현의 중심지였다. 마전리에는 북서쪽의 연천군 백학면소재지를 지나서 장단으로 연결된다. 또한 장단에서 토산으로 가는 백치로와도 연결된다. 동북쪽으로는 군남 일대 징파도15)에서 임진강을 건너면 연천으로 연결된다.
임진강은 하류에서 연천군 전곡읍 도감포까지는 유로가 동서방향에 가깝다. 하지만 도감포에서부터 상류로는 유로가 남북방향이 된다. 연천에서부터 북쪽 삭령과 조선시대 토산, 안협, 이천 등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바로 북쪽으로 형성된 임진강 유로를 따라서 이어진다. 연천 북쪽으로 임진강 상류는 강 주변에 평지가 거의 없는 협곡지대에 가깝다. 하지만 삭령은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펼쳐져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이 교통의 거점 마을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북쪽으로 이천, 남쪽으로 연천, 동쪽으로 철원, 서쪽으로 개성 등 사방으로 연결되는 교통의 결절지이다. 임진강 내륙수로는 작은배가 하류에서 안협까지 통행하였다. 조선시대 토산과 안협 일대는 주변의 조곡을 모아 수로로 연천 왕징의 징파도로 내려보내고 여기에서 한양으로 운송되었다. 삭녕은 그 수로의 중요기항지이기도 하다.
토산-삭령-연천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는 서울에서 평양 방면으로 가는 노선으로 주목된다.16) 안협과 토산 일대는 임진북예성남정맥에서 해발고도 200m 이하로 가장 낮고 산세도 비교적 둔화된 곳이다. 여기에서 예성강 중상류의 신계, 평산 등지로 가는데 통행의 장애가 되는 지형적 장애는 다른 곳에 비하여 아주 적은 편이다. 안협은 평안천이 합류하면서 임진강 상류에서는 비교적 넓은 충적지가 형성되어 있다. 토산과 함께 임진강 상류의 수륙교통의 결절지였다. 그 북쪽의 이천도 고미탄천이 합류하면서 넓은 분지를 이루고 있다. 이천에서 북쪽으로 판교를 지나 마식령을 관통하면 함흥으로 갈 수 있다. 또한 서쪽으로 곡산, 동쪽으로 평강 등지로 연결된다. 이들 모두 임진강 상류지역의 교통 거점으로 기능했던 곳이다.
한편, 임진강 유역에서 남북방향의 교통로가 우세하나 동서방향의 교통로가 발달하기 유리한 지역도 있다. 동서 방향으로 흐르는 임진강의 상류의 평안천과 고미탄천, 한탄강 등의 지형을 활용한 노선이다. 철원과 평강을 중심으로 토산-안협-평강, 또는 토산-철원-김화 등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의 교통로이다. 전자는 평강에서는 회양으로 연결되며 토산에서는 앞에서 살펴본 신계 방면으로 연결된다. 현재의 토산은 예성강 중류 서쪽에 위치한 교통의 요지로 개성, 장단, 금천, 평산, 신계 등 사방으로 교통로가 분기되는 결절지이다. 후자의 교통로는 김화에서 대성산 동쪽의 고개인 마현을 지나서 화천과 연결된다. 마현은 임진강 유역과 북한강 유역을 연결하는 대표적인 고개이다.17) 이 길은 남쪽으로는 화천-춘천-원주 등지로 연결되며 철원에서 서쪽으로 토산-신계-수안-평양, 철원-평강-원산길 등과 연결된다. 한반도 중부 내륙 지역을 관통하는 길로,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한강 하류지역을 거치지 않고 남부지역으로 갈 수 있는 대표적 교통로이다. 개성이나 한양이 도읍이었던 고려와 조선시대 보다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에 더 활발하게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한탄강이 동서로 흐르는 김화와 철원, 포천과 연천 일대도 지형적으로 동서 방향 교통로가 발달하기에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임진강의 북안을 따라서 개성-장단-연천-철원으로 이어지고 영평천을 따라서 연천-포천(영평)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전자는 고려시대 개경이 도읍으로 되면서 개경에서 원산 방면의 간선로가 되었다. 후자의 교통로는 포천에서는 청평 현리를 거쳐서 가평과 춘천이나 양평과 여주 등으로 연결된다. 임진강 북쪽에서 서울 지역을 우회하여 남한강 유역으로 향하는 교통로로 주목된다.
그림4. 임진강 유역 (추정)교통로 |
이 같이 임진강 유역의 하계망과 도강처, 지질 단층선 등을 종합하면 대략적인 교통축이 짐작된다. 그 중 남북과 동서의 교통축이 서로 교차하는 교통 거점이 있다. 임진강 하류의 장단18), 중류의 연천과 포천, 상류의 철원 지역 등이다. 철원 지역은 김화-철원-안협 방향의 동서 교통축과 서울-양주-포천(연천)-철원-평강-추가령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가 결절되는 위 치이다. 연천 지역은 포천-연천-장단(파주)-개성 등으로 이어지는 동서 방향의 교통로가 서울-원산축과 결절되는 위치이다. 장단은 서울-개성, 서울-토산 방향의 교통로와 개성-연천 방향의 교통로가 결절되며 고려시대 중기까지 임진강의 대표적이 도강처였다. 이 지역들이 임진강 유역의 대표적인 교통의 결절지라 하기에 무리가 없다.
Ⅳ. 시대별 활용과 변화
임진강 유역 여러 교통로는 선사시대부터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사시대에는 주로 남북 방향의 교통로가 주민이동 및 문화전달 경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주목된다. 하지만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가 본격적인 교통로로서 기능을 하게 된 것은 역사시대에 들어와서 였다고 추정된다.
원삼국시대 및 삼국시대 초기 임진강 유역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뚜렷하지 않다. 대체로 군현세력의 경계 및 그 외곽 지대에 위치하여 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하기 어려웠고, 그들의 영향도 많이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군현세력의 확장 과정에서 임진강 유역은 그들의 세력 확장과 관련하여 활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초기 낙랑이나 말갈과 충돌이 빈번하게 있었다. 전투지역의 이름이 여러 곳이 등장하나 그 지역의 지명을 비정하기가 매우 어렵다. 하지만 백제의 발전 과정과 영역의 변화를 고려하면 대부분이 임진강 유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는 백제 초기 군현세력과 군사적 충돌 과정이나 교역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중 몇 개 노선에 대해서는 대략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먼저 호로하이다. 호로하는 현재 적성 지역의 임진강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개성-장단-적성-양주 등으로 이어지는 길이 낙랑과 교통로로 등장하여 활용되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기기록의 말갈이 임진강 유역에 거주하던 종족으로 낙랑에 부용되었던 세력으로 본다면, 이밖에도 연천, 철원 등지에서 추가령구조곡을 따라서 한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도 이 당시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고고학 자료를 보면,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와 관련되는 대표적인 유물이 낙랑계토기이다. 북한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낙랑계토기의 유입로는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를 거쳤을 것으로 추정 된다. 낙랑계토기는 삼척 등 영동지역에서도 일부 출토가 되고 있는데 그 유입경로 역시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와 관련되어 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신계-토산-철원-춘천, 삭녕-연천-포천-청평 등의 교통로 역시 이 과정에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세기 이후 낙랑과 대방이 차례로 몰락하면서 백제는 북방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해양 진출과 관련하여서는 한강 하구의 배후가 되는 임진강 하류지역은 물론 예성강 하구로도 세력을 확장하였다. 4세기 후반 369년에 이르면 고구려와 백제는 예성강 하구의 치양(현 황해도 배천)에서 격전을 펼쳤다. 이후 390년까지 예성강을 경계로 대결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 당시 백제와 고구려의 최대 격전지로 등장하는 지역이 수곡성이다. 수곡성은 현재 신계 남서쪽 예성강 동쪽 강언덕에 위치한 침교리 일대로 비정된다.19) 이 지역은 예성강의 주요 도강처로 사방으로 통하는 요충지에 해당된다. 북쪽으로 신계, 서쪽으로 서흥, 남서쪽으로 평산, 남동쪽으로 토산, 남쪽으로 장단과 개성 등으로 갈 수 있다. 한성에서 수곡성까지 가는 길은 먼저 한성-양주-적성-장단-백치-토산(시변리)-수곡성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주목된다. 또한 양주-동두천-전곡-삭령-조선시대 토산현-토산-수곡성으로 연결되는 노선도 있다. 전자의 노선이 후자보다 가깝고 지형적 장애도 적어서 한성백제시대 수곡성으로 가는 주교통로이고 후자가 보조교통로가 아닐까 한다. 이 노선 상에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후반의 성곽들이 분포되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칠중성과 육계토성 등 임진강 이남지역에서 백제토기가 발견되어 그 흔적이 보일 뿐 임진강 이북지역은 조사가 미진하여 확인할 수 없다.
원산방면의 교통로도 4세기 후반 이후 개척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포천 지역의 경우 고모리산성, 자작리 유적, 반월산성 등지에서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치는 백제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다. 하지만 포천 북쪽 철원 일대에서는 아직 뚜렷한 백제 유적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북한강 유역에서는 화천 일대에서 백제와 관련된 유적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철원 일대에도 백제 유적이 출토될 가능성은 있다.
이상과 같이 한성백제시대에는 낙랑과 말갈, 그 이후 고구려와 군사 및 정치적 관계에서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가 정비되어 활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성을 중심으로 주로 남북방향의 교통축이 활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광개토왕능비문」에 의하면 고구려는 5만의 원정군이 400년 신라를 거쳐서 가야까지 진출하였다. 이 당시 한강 유역은 백제의 세력권에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군이 한강유역을 관통해서 신라로 진출하였다고 보기가 어렵다. 필자는 이미 광개토왕의 400년 가야 원정을 중부내륙통로를 활용하였을 가능성을 여러 번 제시한 적이 있다. 즉, 수곡성에서 토산-철원-화천-춘천-원주-죽령 등을 거쳐서 서라벌에 이르는 길이다. 400년경에 이 길이 사용되었다면 이 길은 그 이전부터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 근거는 부족하지만 진한 수장이었던 염사치가 낙랑으로 망명했던 기록이나 북한강 유역 낙랑계토기의 유입로 등을 고려하면, 낙랑과 진한 사이의 교통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추정되기도 한다.
박제상 설화를 보면, 신라 눌지왕이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던 복호를 구출하기 위해서 신라 변경의 수장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이 때 등장하는 지역이 성주, 예천, 영주 등 소백산맥 고갯길로 통하는 곳이다. 그 중 영주는 죽령과 관련되어 있어 5세기 초에 죽령이 고구려와 통하는 교통로로 주목된다. 광개토왕능비문의 원정기록과 대비하여 보면 5세기에 고구려와 신라의 교통이 죽령로를 따라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5세기 후반에서 6세기에 이르면 보다 적극적인 근거들이 보이고 있다. 450년 삼척에서 신라 변장이 고구려 장수를 살해한 사건 이후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의 북변으로 추정되는 영남북부 지역으로 고구려군이 침입한 기록이 자주 등장한다. 당시 고구려군의 진출로를 추정하면 역시 토산과 철원을 거쳐서 영서지역으로 연결되는 교통로가 주목된다.
이상과 같이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남진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임진강 상류지역의 교통로는 고구려가 개척해서 장악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와 관련된 기록이 광개토왕대 축조했다는 國東 6城이다.20) 이 국동 6성은 이미 백제로부터 차지한 수곡성에서 동쪽으로 추정되며 대체로 임진강 상류 일대에 해당되는 것으로 비정할 수 있다. 국동 6성은 죽령 이북의 영서 지역 지방으로 통하는 토산, 철원. 이천, 평강 등 임진강 상류 일대 지역을 장악하려고 축조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21) 「중원고구려비」의 고모루성, 우벌성 등 역시 이 교통로와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
이같이 4세기 말에서 5세기에 이르는 시기에 백제와 고구려는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를 서로 장악하고자 하였다. 백제는 주로 임진강 하류지역에서 남북 방향의 교통로를 확보하여 활용하였다. 고구려는 임진강 상류에서 백제의 경계를 감싸듯이 동서 또는 북서-남동 방향의 교통로를 확보하고 활용하였다. 이러한 교통로는 신라가 한강 유역에 진출한 이후에도 대체로 크게 변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하류의 교통로는 백제의 노선을 그대로 활용하였다. 하지만 신라는 668년까지 임진강 이북으로 진출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임진강과 한탄강 이북은 여전히 고구려의 군사적 영향 속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강 상류 지역의 교통로는 상당히 복잡하다. 신라는 551년 고구려로부터 10군을 공취하면서 일단 철원 일대까지 진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마운령이나 황초령 일대로 일시적으로 진출하면서 철원-평강-회양-안변 등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도 활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한산주를 남천주로 이동시키고 비열홀주(안변)도 달홀주(고성)로 후퇴하였다. 특히 비열홀주의 이동은 철원에서 원주에 이르는 교통로에 신라의 영향력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임진강 상류지역을 다시 고구려가 회복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를 신라가 완전히 장악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로 추정된다. 통일신라시대 임진강 유역의 교통로는 신라 五通 중 북요통에 속하였다. 북요통은 이름 그대로 군사 교통로로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통일신라시대 지방군 10정 중 남천정(이천), 골내근정(여주), 벌력천정(홍천) 등에 배치되어 있었다. 이들의 관할하는 지역은 임진강 이북지역까지 였다. 남천정은 이천-서울-개성, 골내근정은 여주-양평-포천-연천-삭령-토산, 벌력천정은 홍천-춘천-화천-철원-평강 등을 작전로로 활용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임진강 유역 교통로에 큰 변화가 발생된 것은 태봉이 철원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시대 철원 지역은 북경의 교통과 군사 거점에 불과하였지만 태봉의 도성이 들어서면서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철원을 중심으로 태봉의 교통로가 재편되었던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이 때 태봉의 간선로는 그 이전의 교통로를 기준으로 할 때, 예성강 유역 및 대동강 유역(토산-신계-평산, 평양), 임진강 하류(연천-장단-개성-해주), 한강 유역(포천-서울-용인-안성-공주), 북한강 및 남한강 유역(화천-춘천-홍천-원주), 동해안(평강-안변) 등 궁예도성을 기점으로 방사선 형태로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이후 전국의 교통의 요지에는 국가에서 설치한 역이 등장하고 민간에서 운영하는 원도 늘어나면서 기간교통로가 정비되었다. 고려의 역제는 고려 성종 때 12목이 설치된 이후 본격적으로 정비되면서 시작되었다. 개경을 중심으로 한 전국에 걸쳐 방사선 형태의 역도망을 형성하였는데, 총 22역도 525역이라는 방대한 조직으로 편성되었다.22) 조선은 고려시대의 역제를 거의 그대로 수용하여 활용하였다. 전국에 500여 개소의 역이 있었는데, 주요 도로에 대략 30리마다 역을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23)
고려시대 임진강 유역의 역로는 도원도, 청교도 등과 관련이 되어 있다. 각 역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비정이 어려운 곳이 많다. 남북 분단으로 행정구역의 변동이 크고 현지 조사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원도에는 21개의 역이 소속되어 있었다. 도원역(개성), 백령역(장단), 옥계역(경기도 연천군 군남면 옥계리), 용담역(강원도 철원), 임단역(강원도 평강), 송간역, 단림역, 은계역(강원도 회양군), 임강역(장단군 강상면?), 전원역(철원?), 도창역·남역·단암역(김화), 동음역·삭녕역· 봉곡역(삭령 및 연천), 통언역(철원?), 이령역·직목역(금성), 웅양역(철원?) 등이 있었다. 대략 적인 위치로 짐작하면 대부분 임진강 유역 교통로와 관련된다. 개경에서 장단-연천-철원-평강-회양 방면으로 연결되는 역로와 관련된 역이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철원에서 김화나 금성 등으로 연결되는 역로나 장단에서 삭녕-안협-이천으로 연결되는 역로도 추정된다. 삼국시대 교통로와 태봉의 역로를 개경을 중심으로 재편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청교도 관할 역에는 청교역(개성), 통파역(장단 임진나루 북안), 마산역(파주시 파주읍), 벽지역(고양시 고양동), 영서역(서울 홍제동), 평리역(개풍), 상림역·단조역(적성)(積城), 청파역(서울 용산구 청파동), 노원역(서울 노원구 상계동), 행주역(행주), 종승역(김포 수안), 금륜역(부평), 중림역(인천), 녹양역(양주) 등의 역들이 있었다. 역의 위치로 보아 당시 교통로는 장단에서 파주-고양-서울이나 장단-적성-양주-서울 등으로 연결되는 노선이 역로로 사용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개풍에서 한강 하구(조강)를 도강하여 김포-부평-인천이나 김포- 수안 등으로 가는 교통로가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역로는 고려시대의 것을 대부분 그대로 계승하였다. 다만 도성이 개경에서 한양으로 바뀌면서 노선이 변화되었고 그에 따라 일부 역의 신설과 폐지 등 약간의 변화도 있었다. 특히 고려시대 임진강 유역의 역들은 동서 방향을 중심으로 주요 노선이 편성되었지만 조선시대에는 한양이 중심이 되면서 남북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교통로 노선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 것이다.
Ⅴ. 맺는말
임진강 유역은 한강 유역과 대동강 유역의 중간지대에 위치하며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량적 위치에 해당되었다. 그러한 교량적 위치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교통로가 군사적 기능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산성이 교통로를 따라서 이어졌던 것을 통해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반면에 고려시대 이후에도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한 대비책과 관련되어 군사적 기능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여기에 고려시대 이후 역로체제가 정비되면서 지방 행정과 조세수취 등의 기능이 더하여져 교통로의 활용 폭이 더 확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에서 전근대시대 교통로 연구는 아직 초보적인 단계에 해당된다. 노선에 대한 파악이 막 진행되는 단계로 교통시설, 교통양식 등 교통로의 활용 방식 및 기능이나 성격 문제에 대해서는 아직 접근이 어려운 상태이다. 그 중에서도 임진강 유역 일대의 전근대 교통로 연구는 더 열악한 실정이다. 임진강 일대가 대부분 군사 지역이거나 북한의 관할에 속하기 때문이다. 교통로 연구를 위한 현장 조사는 거의 불가능하고 고고학 자료도 확보하기 어렵다. 문헌이나 지도 등을 활용한다고 하더라도 행정구역을 파악하기 어려워 연구의 장애가 많다. 이 글 역시 이런 측면에서 많은 한계를 가지고 있다.
남북간 평화무드가 조성되면서 이런 문제를 넘어서 연구를 활성화할 수 있는 기회도 점점 나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고고학이나 역사 교류에 남북 공동으로 전근대 교통로를 답사하고 조사할 수 있는 방안도 수립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1) 절대고도로 해발 200m 이하이지만 상대고도는 이보다 더 낮아서 구릉성 지형에 가깝다.
2) 전근대시대 철원 일대와 연천 전곡일대 용암대지 주변의 마을은 대부분 용암대지 외곽이나 한탄강과 그 지류
의 강안에 위치하고 있었다. 생활용수 및 농업용수를 확보하는데 용이한 지역에 마을이 입지하게 되었기 때문
이다.
3) 조선시대 후기에도 임진강 중상류지역 군현의 인구는 불과 몇 백호 정도에 불과하였다.
4) 현재 북한의 평양-원산 사이 고속도로가 이 지역을 통과하여 지나간다.
5) 삼방로에는 삼국시대부터 고갯길을 방어하기 위한 관방시설이 설치되어 있었고 조선시대에 이를 수리하여
사용 하였다.
6) 임진나루는 남안에 갈라진 절벽이 있어서 강변으로 접근이 용이하며 수심도 깊다. 반면에 강폭은 좁아서 상대
적으로 강을 건너기가 편리하다. 그 덕분에 임진강 하류의 대표적인 도강처가 된 것이다.
7) 조선시대 파주목이 있었던 현재 파주시 파주읍이다.
8) 현재 파주시 군내면 일대.
9) 덕진산성이나 그 동쪽에 동파리 고구려보루 등이 존재하는 것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임진나루 일대가 도강처
로 활용되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0) 현재의 장단은 파주에 합쳐졌다. 합쳐지기 전 장단의 중심지는 파주시 군내면 일대였다. 이곳이 장단의 중심
지 되었던 것은 조선 후기이고 그 조선 전기 이전에는 고읍리가 중심지였다. 고려 중기 이후 남경로가 임진
나루를 지나는 노선으로 변화되면서 중심지가 고읍리로 이동하였던 것이다. 그 이전 삼국시대부터 신라시대
를 거쳐 고려 중기까지는 서울-개성간 간선로가 통과하는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와 자작리 일대가 장단의 중
심지였다.
11) 장단군 강상면 임강리 일대.
12) 산경표에는 「백치(白峙)」로 기록되어 있다.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삼전도에서 철군하면서 개성 북쪽의 청석
동에 조선군이 매복하여 공격할 것을 두려워하여 백치를 통해서 철수했다고 한다.
13) 현재의 토산의 중심지는 시변리 일대이다. 이곳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의 서쪽에 해당된다. 하지만 조선시대
토산은 임진북예성남정맥의 동쪽 임진강가에 있는 황해도 토산군 토산면 월성리 일대가 중심지였다. 이곳은
현재의 토산에서 철원으로 가는 나루가 있는 곳이었다. 조선시대 토산은 1914년 일제가 금천군에 통폐합시
켜서 사라졌다. 해방 후 1952년 북한에서는 금천 동쪽 지역의 일부를 더하여 토산군을 부활시켰다. 이 때 원
래 조선시대 토산 중 임진강 동쪽은 철원에 편입시켰다. 현재 대부분 지도에서 토산을 해방이후의 토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토산도 현재의 토산을 말하는 것으로 것이다.
14) 이 길은 한성백제시대 수곡성로와 관련하여 주목된다. 수곡성은 현재 신계군 침교리에 위치하였던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곳은 토산에서 서북쪽으로 약 20㎞ 정도 떨어져 있다.(손영종, 1990, 『고구려사』, 과학백과사
전종합 출판사, 292쪽)
15) 연천군 왕징면 북삼리.
16) 병자호란 당시 1636년 12월 황해도 황주 정방산성에서 나온 김자점군이 한양을 향해 철군하자 이를 청군이
추격하였다. 김자점군은 서흥-신계-토산으로 이동하다가 토산에 이르러서 뒤쫒아온 청군과 싸웠으나 패하였
다. 이후 김자점군은 삭녕-연천-포천-청평을 지나서 용문산 북편에 위치한 미원에 도착하였다. 또한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의 탱크가 이 길을 따라서 내려와서 연천-동두천-의정부 등을 지나 서울로 들어왔다.
17) 마현은 대성산 동쪽의 고개이다. 현재 국도 5호선이 지나고 있다. 대성산 서쪽으로 국토 56호선이 지나는 수
피령, 그 서쪽으로 광덕고개 등도 있다.
18) 여기 장단은 조선시대 이후의 장단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전의 장단의 중심지, 즉 호로고루 일대를 말한다.
19) 수곡성은 매차홀로도 불렸으며 신라 경덕왕이 단계현으로 개명하였다. 고려시대 다시 협계현으로 개명되었
으며 1445년 신은현과 합쳐서 신계현이라 하였다. 현재 신계군 침교리 일대가 단계현과 협계현의 중심지였
다. 수곡성도 이 부근에 위치할 것으로 추정되나 관련된 고고학적 근거는 아직 발견된 적이 없다.
20) 『三國史記』권18, 高句麗本紀6, 광개토왕 18년조. “가을 7월에 나라 동쪽에 독산 등 6성을 쌓고 평양의 주민
을 이주시켰다.”
21) 같은 시기에 백제는 포천 반월산성, 고모리산성-이천 설봉산성, 설성산성-충주 장미산성, 탄금대토성 등으
로 이어지는 죽령로와 평행선상에 방어시설을 구축하였다.
22) 『고려사』 지 병2 참역조.
23) 하지만 지역에 따라 역간의 거리는 일정하지 않은 곳도 있다. 역의 설치와 운영이 어려운 경우도 있었고 지
형상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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