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다시 판화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판화인가?

2018-07-04 ~ 2018-09-09 / 판화하다 ― 한국현대판화 60년


이 글은 경기도미술관에서 개최한 《판화하다 - 한국현대판화 60년(Do Print! 60 Years of Korean Contemporary Printmaking)》 전시의 도록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한국현대판화의 역사 60년을 맞이하여 선보이는 이 전시는 한국현대판화사를 대표하는 작가 120명의 대표작을 통해 한국현대판화의 흐름을 조명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조망했습니다. 전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경기도미술관 홈페이지 gmoma.ggcf.kr 을 방문해주세요.


다시 판화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판화인가?



전시참여 작가,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윤동천 



애당초 우리 인간에게는 생존을 위한 삶밖에 없었다. 그 후 일상에서 특별히 신명나고 좋은 것들을 찾아 일구고 가꾸어 특별히 ‘예술’로 이름 지었다. 이를 낱낱이 구분하여 각각의 ‘장르’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탈장르, 융합, 복합 등의 이름으로 분화되었던 것들을 다시 하나로 엮는 추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일상’에서 이탈하였던 현대미술이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는 조짐이 만연한 시점이다. 하필 이러한 시점에서 다시 판화를 생각한다. 이는 무엇이 판화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보다는, 판화가 이 시대에 미치는 긍정적 기여와 발전 가능성을 알아보고, 이를 한층 더 진작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으리라.


판화의 기원은 선사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사람들은 동굴 벽에 손을 대고 그 주위에 색소가루를 불어 이미지를 만들었다. 여기서 손은 판화에 있어 ‘판’의 개념에 해당한다. 또한 기원전 3000년 전 수메르인들은 진흙에 돌이나 나무로 된 원통형 롤러를 굴려 무늬나 설형문자를 새겨 넣었다. 이는 이미지의 복제, 즉 멀티플(복수개념)의 효시로 볼 수 있다. 또한 이 원통형롤러는 인쇄기의 원리와 맞닿아있다. 이처럼 판화는 그릇에 무늬를 새기는 것으로 출발하여 벽지, 옷감 등을 꾸미고, 이윽고 책 등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정보를 전하는 소통의 매체로 자리매김한다. 즉 판화는 태생부터 생활의 필요(복제 혹은 복수생산)에 의해 테크놀로지와 결합하여 발전한 매체이다. 이후에도 목판, 동판, 석판, 실크스크린, 사진프로세스, 디지털 등 새로운 매체가 탄생할 때마다 판화의 재료, 기법, 나아가 개념까지도 연동하여 발전하는 궤적을 보이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리고 능동적으로 새로운 매체와 조우하여 판화가 전개되리란 것은 쉽게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판화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오리지널 판화인가? 이 논의는 사실상 판화를 순수예술작품으로 여겨 상업적으로 거래하기 시작한 시점에 촉발되었다. 그 이전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만들고, 얼마나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따라서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제작하였는지, 얼마만큼 생산하였는지 등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고 각종 복제수단이 등장하자 이와 대별되는 판화만의 고유한 특성―아름다움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순수예술의 후발 장르로 엄연히 자리를 잡자 그 판도는 사뭇 달라진다. 즉 작품으로서의 판화와 그 밖의 복제물을 구별하게 되고, 판화와 일품 회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제작되었는지, 과연 어떤 것이 판화로서 수집과 소장 가치가 있는지 등등을 궁금해 하게 되었다.


판화란 무엇인가? 어떤 것이 오리지널 판화인가? 이 논의는 사실상 판화를 순수예술작품으로 여겨 상업적으로 거래하기 시작한 시점에 촉발되었다. 그 이전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만들고, 얼마나 신속하게 공급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집중하였다. 따라서 누가 만들었는지, 어떻게 제작하였는지, 얼마만큼 생산하였는지 등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고 각종 복제수단이 등장하자 이와 대별되는 판화만의 고유한 특성―아름다움에 주목하게 된다. 그리고 순수예술의 후발 장르로 엄연히 자리를 잡자 그 판도는 사뭇 달라진다. 즉 작품으로서의 판화와 그 밖의 복제물을 구별하게 되고, 판화와 일품 회화의 차이는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얼마만큼 제작되었는지, 과연 어떤 것이 판화로서 수집과 소장 가치가 있는지 등등을 궁금해 하게 되었다. 다양성과 확장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여하튼 이미 50-6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에서 보면 위의 두 규정 모두 작품의 개념과 성향에 따라 반드시 고려해야하는, 필수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사항은 아니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규정이 필요할 정도로 판화에 대한 전반적인 양상과 인식도 크게 변모하였다. (물론 우리나라 일반인들의 판화에 대한 이해도는 여전히 비슷한 수준이지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판화의 가장 단순한 정의는 “판을 이용하여 찍은 그림”이다. 이때 ‘판’과 ‘그림’에 대한 세부적인 정의가 명확할 때 정의로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디지털 데이터처럼 물리적 실체가 없는 것도 ‘판’이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이미 판화의 범주에 편입된 복수 제작된 입체물이나, 입체 위에 찍은 이미지는 과연 평면을 지칭하는 ‘그림’의 정의에 합당한가?


물론 작가들은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그리하여 소통하고자 작업을 한다. 기존의 가치, 기존의 예술개념과 장르개념에 맞추기 위해 작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표현을 극대화하기 위해 무수히 새로운 궁리와 시도를 한다. 때문에 자주 기존의 이 모든 것들과 결별하고 새로운 지평을 열기도 한다. 이처럼 작가에게 있어 판화의 정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다르게 표현하면 예술을 위해, 판화에 종사하기 위해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 함께 소통할 관객들을 위해 작업하는 것이다. 자신이 표현하고자하는 내용이 기존의 정의와 개념에 위배될 경우 작가들의 선택은 그것을 뛰어 넘거나, 혹은 무시하거나 철폐하여 자신의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의 변모와 확장을 이룩한 원동력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판화의 경우도 예외가 아닐 터인데, 말을 바꾸면 “작가 스스로 ‘판화’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이 ‘판화’이다.”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판화의 정의, 개념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혹자는 판화를 ‘간접성을 특징으로 하는 표현양식’으로 정의하기도 한다. 이 정의 또한 ‘간접성’에 대한 구체적인 규정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판화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중간 매개체가 존재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아주 엄밀하게 말하자면 인간의 생각이나 느낌을 제외하고 나머지 표현은 모두 간접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말로 표현하면 입, 소리, 언어 등이 매개체가 되고, 그림으로 표현할 경우 바로 붓과 물감, 종이나 캔버스가 다 매개체가 된다. 이 엄밀함을 적용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표현양식 대부분을 판화로 간주할 수도 있다.)


판화는 다른 매체에 비해 유독 다양하고 복잡한 중간 과정을 거친다. 즉, 표현이 간접적이다. ①판–②판 만들기–③잉킹–④찍기–⑤지지체(종이 등) –⑥디스플레이(설치). 이것이 판화제작에 있어 전형적으로 필요한 유형이다. 이 과정이 생략, 중복, 변주되며 무수히 다양한 판화 혹은 판화개념이 탄생한다. 예를 들어 평판화의 일종인 마아블링은 물이 판이며 ②+③의 과정이 하나로 응축된 경우로, 압력도구(프레스)를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다. 모노타이프도 ②+③의 과정이 하나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 탁본이나 프로타주는 ①+②와 ③+④의 과정만으로 1차 완성된다. 사진의 경우는 ①판이 필름이고 ②판 만들기가 사진을 찍고 현상하는 과정이며 ③잉킹+④찍기가 곧 인화이다.


판화의 ‘간접성’은 판화의 본래 기능이었던 복수제작의 요건- ‘복수성’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안된 여러 가지 장치, 기술, 기법으로 인해 얻어진 결과이다. 또한 판화만의 고유한 아름다움, 독특한 맛- 즉 ‘고유성’은 판화의 ‘간접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결국 판화의 가장 큰 이 세 가지 특성은 모두 ‘복수성’에 기인한다. 이 특성들을 근간으로 살펴보면 미디어(중간 매개체)를 사용하는 수없이 많은 예술양식을 판화의 영역에 합류시킬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위에 예시한 판화의 중간 과정의 변모에 주목하여, 판화가 지니는 일종의 제약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이는 곧 판화개념이 어떻게 확대되었는지를 파악하는 과정과 같다.



1. 크기: 일반적으로 판화는 프레스를 통과해야 하므로 크기의 제약을 받는다. 이의 극복을 위해 에디션을 반복, 나열하여 큰 작업을 만들기도 하지만, 이제는 대형광고판에 옵셋 등의 기법으로 제작한 작품을 게시하기도 한다. (Gonzalez-Torres, Jean-Charles Blais)


2. 판 만들기: 각 판종은 고유한 장점과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 다양한 기법, 혹은 매체의 결합으로 서로를 보완하여 효과적 표현이 가능해졌다. 이제는 서너 가지의 서로 다른 기법을 결합하는 것도 드문 일이 아니다. 또한 사진기법이 대거 활용되고 있다. 특히 오목판과 실크스크린, 석판화의 경우 그 활용 가능성은 무한에 가깝다. 이는 또한 오리지널 판화의 개념에서 크게 변모된 사항이다.


3. 평면성: 처음 평면성의 극복은 소극적으로, 표면에 요철을 만든 엠보싱(embossing)에서 시작되었다. 이어 평면에 찍어 입체 구조물 만들기, 입체의 표면에 직접 찍기, 캐스팅이나 모울딩 기법을 사용하여 복수의 입체물 만들기 등으로 발전하였다. 경우에 따라서는 입체로 제작된 판을 찍을 수 있는 특별한 프레스를 제작하기도 한다. (Frank Stella)


4. 복수성: 판화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복수성’을 무시한 모노프린트가 공모전에서 수용된 지도 어언 50여년이 흘렀다. 이는 판화만의 ‘고유성’에 대한 존중으로, 복수제작 되지 않아도 판화로 인정한다는 선언적 성격이 강하다.


5. 디스플레이: 보이는 방법, 보여지는 장소 등이 전격적으로 달라졌다. 포스터, 아티스트북, T 셔츠, 범퍼 스티커, 신문의 광고, 상품의 표면, 광고판, 전광판, 길거리 낙서 등등 우리의 상상력이 닿을 수 있는 모든 종류와 범위를 포괄한다. (Banksy)


6. 찍기: 각종 복사기기, 팩스, 각종 디지털프린터(Ink Jet, Laser, Xerography, etc.), 3D 프린터 등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점점 증가하는 추세이다. - 이 밖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례들이 이미 판화개념의 범주에 합류하고 있으나 지면 상 다 열거하기 버거운 실정이다.



바야흐로 디지털의 시대이다. 디지털미디어는 ‘원본 없는 복제’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원본이 있어야 복제의 개념이 비로소 성립하는데, 복제한 결과물이 모두 원본이라니 실로 예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커다란 변화이다. 복수의 원본을 제작하는 것이 전통적인 판화의 본령이었음을 생각할 때, 지금이야말로 지극히 그리고 온당히 ‘판화의 시대’라고 불러도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인류역사상 어느 시기보다도 폭넓은 예술의 향유와 또 그로인한 소통이 가장 민주적으로, 가장 광범위하게, 또한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중심에 디지털이 자리한다. 말을 바꾸면 판화매체가 자리한다. 판화를 다른 매체로부터 구별하는 특성인 ‘복수성’, ‘간접성’, ‘고유성’의 세 가지 전제조건을 모두 충일하게 갖춘 매체가 바로 디지털미디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전통적인 판화개념 즉, 판화의 오리지널리티의 문제와는 다른 차원의 논의이다.)

곰곰이 살펴보면 지금의 상황은 판화 장르에 있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이다. 우선 판화가 디지털 매체를 적극 수용한다면 다시금 새로운 미디어로서 전에 없던 표현 영역의 확산을 꾀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판화의 전통적 제작방식은 디지털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공성(手工性)’이 강조되어 여전히 일품성(一品性)을 선호하는 관객들의 취향에 성큼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원본 없는 복제시대에 ‘복수(複數) 원본’을 만드는 일이야말로 의미 있고 신나는 일이다.


이렇듯 판화는 늘 변한다. 변해왔고,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사뭇 변할 것이다. 이처럼 판화는 사회의 변이 및 테크놀로지의 전개와 조우하여 성장, 발전하는 유기체적 성격이 강하다.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그 변화의 방향도 물론 지금까지의 변모를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여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아마도 판화는, 그리고 당연히 판화는;


판화는 민주적 소통양식이다.


판화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는 혁명이다.


이윽고 판화는 일상이자 생활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판화는 우리 모두의 신나는 삶이다.



― 이 원고의 일부분은 본인의 졸고에서 발췌하였음.




목차


각 글의 제목을 클릭하시면 해당 콘텐츠로 이동합니다.


인사말

DO PRINT! 한국현대판화 60년

최은주, 경기도미술관 관장


경기도미술관에서 ‘판화하다’

신장식, 한국현대판화가협회 회장

기획의 글

판화하다 ― 이미지와 개념의 변주동사

강민지, 경기도미술관 학예연구사

도판각인하다

부식하다

그리다

투과하다

실험하다


한국현대판화사의 개괄적 이해, 그 흐름과 좌표들

고충환, 미술비평가

한국현대판화의 담론과 비평의 흐름(1950 - 2010)

이은주, 아트스페이스 와트 대표

다시 판화란 무엇인가? 어디까지 판화인가?

윤동천, 전시 참여작가 / 서울대 서양화과 교수

한국현대판화 60년 연대표




세부정보

  • 판화하다 ― 한국현대판화 60년

    발행인/ 설원기 | 경기문화재단 대표이사

    편집인/ 최은주 | 경기도미술관장

    발행/ 2018.8

    편집기획/ 강민지, 장효진

    교열·교정/ 강민지,장효진,장남호

    도록디자인 / 11층

    번역/ 팬트랜스넷

    Ⓒ 2018 경기도미술관/ 15385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동산로 268

    이 도록에 실린 글과 사진 및 도판은 경기도미술관의 동의 없이 무단 사용될 수 없습니다.

  • 참여작가/ 강국진, 고자영, 곽남선, 곽태영, 권복희, 권순왕, 권혜정, 김란희, 김미로, 김민호, 김병주, 김봉태, 김상구, 김서영, 김선미, 김승연, 김영진, 김영훈, 김응식, 김이진, 김익모, 김정임, 김정자, 김제민, 김종환, 김창수, 김태혁, 김태호, 김현주, 김형대, 김혜나, 김홍식, 김효, 나광호, 남천우, 노재환, 박광열, 박성미, 박영근, 박주은, 방인희, 배남경, 백금남, 백승관, 서승원, 서희선, 석유선, 성기안, 송대섭, 송인영, 신경희, 신상우, 신수진, 신장식, 신진섭, 안유선, 안정민, 안혜자, 오수진, 원정희, 육경란, 윤동천, 윤명로, 윤병미, 윤신희, 이경희, 이상은, 이서미, 이선원, 이성구, 이순희, 이승일, 이은진, 정우리, 정원철, 정장직, 정주은, 정현조, 정희경, 조정성, 주성태, 주진아, 최미아, 최성원, 최혜민, 하동철, 하원, 한경화, 한규성, 하운성, 한지민, 허문정, 허은영, 홍대의, 홍승혜, 홍윤, 홍인숙, 홍재연, 황연주, 황용진, 황인선, 황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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