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다순

경기문화재단

용인 여성독립유공자 정정산 지사 친정집의 발견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용인 여성독립유공자 정정산 지사 친정집의 발견 >

-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정정산 지사

화려한 대한민국의 21세기 이면에는 여전히 일제강점기, 해방정국, 6.25를 관통하는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 용인 3대 독립운동가 집안의 며느리이자 만주 독립군의 어머니로 불렸던 여성독립운동가 정정산(1900~1992·애족장) 지사의 친정집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까지 질곡의 역사가 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화산리 정 지사 생가에서 만난 친정 손주 정인호· 정인희 형제는 그동안 아무도 들어주거나 관심 가져 주지 않았던 슬픈 가족사를 처음으로 이야기 하는 것이라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봇물 터지듯 쏟아냈다. 이들은 자신의 자녀들한테 가족사를 교육시키고 있다. 주된 구술은 정인희(동 생)씨가 했고, 정인호씨가 보완했다.

구술자 : 정정산 지사의 친정조카 정인호(67·전 이동농협 전무)·정인희(63·전 고교 교사) 형제


정인호(좌) 정인희 형제. 정정산 지사 생가에서

독립유공자 정정산 지사가 일제강점기 때 만주나 중국에서 활약하셨음에도 지역사회에는 거의 알 려져 있지 않습니다. 특히 친정쪽과 광복후 삶에 대해서는 뜬소문 외에 제대로 알려진 바가 없습니다. 시아버지 오인수 의병장, 남편 오광선 장군, 맏딸 오희영·신송식 지사(부부), 차녀 오희옥 지사 등 3대 독립운동가에 대해 잘 알려진 것과는 대조가 됩니다. ‘해주오씨 호군공파 용인군 원삼면 대 종회’ 오수환 회장님께 두 분을 소개받고 연락드렸습니다. 우선 이곳은 어디입니까? 가족 소개도 부탁합니다.

▲ 여기는 정정산 지사가 태어난 곳이에요. 저희 할아버지의 여동생이세요. 두 분이 남매셨어요. 우리에게는 대고모할머니죠. 정지사 아버지는 정학현(1855~1921), 어머니는 경주김씨. 우린 정 지사 친정 손주. 여기가 초계정씨 박사공파 용인 강헌공파 종손집이에요. 내(정인호)가 종손이에요. 근데 실질적인 종손인 제일 큰 사촌형은 만주에 살고 계세요.

만주에 실질적 종손이라니요.

▲ 저희 대고모할머니 정정산 지사의 시댁이 독립운동가 집안이잖아요. 그런데 일경의 괴롭힘이 우리집까지 있었어요. 우리 아버지가 5남 1녀, 6남매 중에 5째인데 아버지와 막내 빼고 나머지 형제 모두 뿔뿔이 흩어졌어요. 우리 큰아버지가 만주로 가셨어요. 제일 큰아버지. 그 밑에 둘째, 셋째 큰 아버지랑 고모가 원산으로 가셨구요.

좀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 우리 집안이 독립운동에 연유가 된거는 대고모할머니가 그리 시집을 가셨기 때문이죠. 큰아버지가 만주로 가신 연유가 일제강점기 때 집안 내력이 그러니까. 정 지사 시아버지가 오인수 의병장이잖아요. 남편 오광선도 독립운동가고. 여기 일본 순사들이 연좌제를 물어 괴롭히니 피해서 간 것도 있고, 먹고 살기 어려워 간 것도 있고 양쪽이 있겠죠. 광복이 되고도 못 오셨어요. 둘째, 셋째 큰아버지하고 고모는 원산에서 터를 잡으셨는데 6.25 때, 흥남철수 때 배타고 올려고 가족이 다 나왔는데 배가 안 떠나고, 언제 떠날 지도 모르니까 집에 살림을 하나라도 더 가져올려고 잠깐 갔다가 그사이 배가 떠난거에요. 고모만 애들 데리고 나왔어요. 그래서 우리 사촌들이 흑룡강에도 있고, 북한 원산에 있는 사촌들은 연락이 안되죠.

큰아버지가 조선족이 되셨다는 건가요.

▲ 그렇죠. 조선족.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 난거에요. 식구가 다 흩어진거죠. 그 바람에 우리 할머니가요 정신을 놓으셨어요, 정신을. 왜냐면 생 떼같은 아들 셋을 잃어버렸지 딸 잃어버렸지. 그러니 부모가 어떻게 온전한 정신에 사실 수 있겠어요.

그런 엄청난 비극이 있었군요. 북에 계신 분들 은 못 만날 테고, 만주 계신분들과는 연락이 닿는지요.

▲ 제가(정인희) 대학 1학년 땐가, 2학년 땐가, KBS방송국에서‘ 공산권에 계신 동포에게’ 그런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늘 아버지한테 들은 거니까 가족이야기를 쭉 해가지고 방송국에 보냈더니 방송이 됐대요. 만주에서 얼마만에 편지가 왔어요. 82년도에요. 거기가 흑룡강성 무량수전 이래요. 그래서 편지왕래를 했어요. 96년에 중국하고 수교가 돼 여행도 가고 그랬잖아요. 내가 교사였는데, 96년도 여름방학 때 아버지를 모시고 거길 갔어요. 하얼빈 공항에 내려가지고 거기서 1박하고 버스타고 한 7시간, 8시간 가니 까 무량수전이라는데가 있는 거에요. 밀산시. 거기 조선족 마을에서 큰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사촌형을 만난거에요. 큰아버지가 옛날에 살던 집이 남아있다고 해서 가봤더니 움막이에요. 반은 땅속에 있고 반은 땅위에 있고. 저희 아버지가 보시고는 이렇게 사실거면 고향으로 오시지 왜 여기서 이러고 사셨냐며 슬퍼하셨어요.

1982년 KBS 공산권동포에게 프로그램 공개방송 초청장 1984년 만주로 보냈다가 반송된 편지. 생사 확인                                                    후 한없이 울었다는 내용.

만주에서 사촌형님은 어떻게 살고 계시던가요. 요즘도 왕래하시나요.

▲ 큰 사촌형님은 농업대학을 나왔어요. 거기 근동에서 대학 나온 사람이 없어요. 지역 유지에요. 여기로 면장 정도 되는거 같아요. 동네 사람들이 존경하더라구요. 먹고 입고 하는 건 불편한게 없더라구요. 수전양궁장이라고 사촌형이 종자보급소장이에요. 우리가 초대해서 집에도 왔었고, 다른 사촌들도 한국 나와서 일도 했었어요. 형님들 돌아가신 후로는 좀 멀어졌죠.

여기 남았던 가족들도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 여기가 초계정씨가 집성촌이었고, 우리가 소위 여기서 땅도 있고 그런 집안이었어요. 내가 듣기로는 이 동네서 우리 땅을 밟지 않으면 다닐 수 없었어요. 그런데 일제 강점기 때 그 농토를 다 잃은 거에요. 어렸을 때 아버지가 “저기 저 느티나무가 우리 느티나무다.” 거기가 다 우리 농토였다고 했죠. 그때 우리가 재산을 잃은 이유가 우리가 살만하니까 할아버지가 당신 생일 때 밀주를 담궜대요. 사람들을 생일날 불러 먹였는데, 먹고 난 다음에“ 너 밀주 몰래 담궈가지고 했으니 너 잘못된거 아니냐. 너 신고한다.” 정지사가 빌미가 되가지고 협박당한거죠. 한편으론 그것들을 다 빚 도장(빚보증) 잘못 찍어서 넘어갔다 뭐 이런 식으로 얘길 듣기도 했어요. 그래서 가산이 아주 기운거죠.

정정산 지사 조카 정기영씨가 1940년 연길현 도문중학교 4학년 졸업을 보증하는 학력보증서(용인교육청, 1955년)

집안 살림이 졸지에 어려웠겠네요.

▲우리 아버지가 26년생인데 1950년도에, 그때 가 20대 때죠. 초등학교 선생님을 시작한 거에요. 초임 발령지가 영종도 영종국민학교. 지금 인천공항. 당시는 아마 경기도 땅이었을 거에요. 50년 1월 1일자로 발령을 받았는데 그해 6.25가 난거죠. 가산은 다 탕진됐는데. 그 당시에 아버지가 발령을 받은 게 정정산 대고모할머니가 서울로 올라오라고 했대요. 갔더니 대고모할머니가 우리 아버지를 데리고 이시영부통령한테 데려간거에요. 오광선 대고모할아버지는 절대 못 하게 했대요. 정지사가 중국에서 이시영부통령 밥을 해드렸대요. 그러니까 식구랑 마찬가지인 거죠. 우리 아버지를 데려가서 “얘가 조칸데 머리가 똑똑하고 공부도 얼만큼 하고 했으니 우리 조카 취직을 좀 시켜주시요.” “청년 무슨 일을 하고 싶은 건가.” 그래서 난 무슨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그 자리서 발령을 내주셨다는 거에요.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사셨군요.

▲ 그렇죠. 근데 6.25가 나가지고 딱 세상이 뒤집어지니까 아버지랑 같은 하숙집에 둘이 있었는데 같이 있던 사람이 빨갱이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냥 산으로 도망을 갔대요. 영종도에서. 낮에는 산에 있다가 저녁에 학부모 집 찾아다니면서 밥을 얻어먹었대요. 근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학부모도 이제 오지 말라고 그랬다는 거에요. 힘들다고. 그래서 우리 아버지가 고향으로 가고 싶으니, 가는 방법을 알려달라고 했대요. 그때 인천이 다 점령돼 공산화가 됐으니까 기다리면 빨갱이들 연락선이 온다. 저 부둣가에 가서 그 사람들 패거리들처럼 슬쩍 누워있어라. 그러면 배가 올거다. 언제 올지 모르지만 그 사람들하고 휩싸여 타고서 인천으로 나가시오. 아버지가 시킨대로 슬쩍 저기서 오줌을 누는 척 하고서 허리춤을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 사이에 슥 가서 누워 있었대요. 얼만큼 시간이 지났는데 통통대고서 연락선이 오더라는 거에요. 그걸 탔더니 그 배가 작약도며 여기저기 밤새 돌다가 새벽이 되니까 인천에 도착을 했는데, 내리려고 하니까 거기서 총 든 인민군들이 전부다 조사를 하더라는 거에요. 어디가냐. 그래서 아버지가 꾀를 냈다는거죠. 세상이 바뀌어 서 인민학교 교원인데 교과서를 받으러간다고 둘러댔다는 거에요. 그랬더니 동무 가시오. 그래가지고 그냥 안심하고 내렸다는 거에요. 거기서 걸어서 오산으로 해서 몇날 며칠 먹지도 못 하고 집에 왔더니 너 죽을려고 왔냐고. 빨갱이 들이 너 잡으러 다니는데 빨리 도망가라고. 그래서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그냥 되돌아 나갔다는 거에요. 안성 외가댁 쪽으로 도망가서 6.25 때 뭐 정처 없이 돌아다닌거죠. 수복돼서 집에 왔더니 이번엔 지서에서 오라고 그러더래요. 갔더니 우리 아버지가 머리에 먹물이 들었으니까 이번엔 빨갱이를 죽이는거에요. 붙잡아다가 옛날에는 시골에 농협창고라는 게 있었잖아요. 빨갱이 하던 사람들 잡아다가 가마짝 씌워놓고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6.25때 벌어졌다는거에요. 저 아래 고개에서도 있었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버지를 말하자면 대표로 세운거에요. 하루 이틀 가보니까 난 이거 안되겠다. 그래가지고 또 도망갔대요. 그때 이래서 죽고 저래서 죽은 사람이 엄청 많다는 거죠. 이 동네서 일제강점기 때도 말 안듣는 사람들 담배 건조실 같은데서 불 을 때서. 건너 말에 터가 있는데 교도소처럼 고문실이지. 어렸을 때 단편적으로 들은 건데 철이 들었으면 잘 들어가지고 기록으로 남겼어야 되는 건데. 그래도 아버지가 교육자여서 교육을 많이 시킨 거에요. 밥상머리에서만 들은거에요.

부친은 교편은 계속 잡으셨나요.

▲ 6.25때 연합학교가 생겼잖아요. 부천 소사초 등학교에. 듣기로는 6.25때 어떻게 통지를 받았는지 무슨 연락을 받아가지고 교원들 모두 모여라. 통지 받아서 소사초등학교에 교원들이 모여 가지고 애들을 가르쳤대요. 휴전이 되가지고 오산에 있는 성호초등학교 계시다가 부모님이 연로하시니까 여길 지원해서 오셨나봐요. 송전초등학교 이 인근에 계시다가 남곡초등학교서 정년하셨죠. 집에서 다 통근거리니까.

월급이 있어서 덜 어려웠겠네요.

▲ 월급이 반은 월급이고 반은 밀가루하고 분유가루 같은걸 받으셨어요. 어머니가 처음 시집와서 보니 살림이 어려워서 친정집이 남사면(용인)인데 거기서 쌀을 여섯가마 가지고 와서 그걸 밑천 삼아 억척스럽게 살림을 했대요. 이 반소도 동네 사람들한테 나눠줘 키우게 해서 팔고 그랬어요. 소를 키워 팔면 송아지값 빼고 반으로 나누는거에요. 차츰 땅도 사고 머슴도 두 명 두고 그랬어요. 어머니가 그 당시 별명이 농림부 장관이에요. 밥 지으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내일 비가 온다 그러면 동네 사람들한테 비가 온 대니 물 단속을 잘해라. 동네사람들을 지도하신 거에요. 겨울에는 화롯불 놓고 아버지하고 영농설계를 의논했대요. 동네사람들한테 존경 받으셨어요. 산양을 길렀어요. 동네에 풀이 많잖아요. 젖을 짜 끓여서 우리하고 동네도 주고. 저쪽에 비옥한 논이 있는데 거기는 모를 띄엄 띄엄 심었어요. 남들이 촘촘이 심으래도 이삭을 많이 달리게 하려구요. 우리 어머니가 앞서나가 셨어요.

정정산 지사가 광복후 생가에 들러 머물던 건너방

근데, 정 지사 귀국 후 삶이 알려져 있지 않아요.

▲ 정지사가 원삼에 거처도 있고 서울에 자식 집도 오갔는데 살기가 힘들어 여기 오셔서 한두달, 세 달씩 계시다 가시고. 60년대니까 우리 초등학교 때 오시면 농사일 도와주고 쌀 가져가시고 그랬어요. 여기서 시궁산을 넘어다녔어요 (시궁산 너머 동네가 시댁인 원삼면 죽능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우렁차고 아주 엄했어요. 말년에도 힘들게 사셨어요. 오광선 대고모할아버지도 여기 짚차타고, 말도 타고, 권총차고 오신 적도 있었대요. 광복후 광복군 소장(별 하나)으로 환국해서 육사8기 특별간부반 마치고 대령 다셨지만 정지사와는 따로 사셨어요.

여성독립운동가 정정산


정정산 지사 생가 뒷편의 모습


오래된 정정산 지사 생가 안방


정정산 지사 생가. 낡은 집에 지붕만 올렸다.


근데, 사랑채는 좀 최근 것 같고, 안채는 옛날집 그대로네요. 정지사님 생가라서 보존하시는 건가요.

▲ 이승만 때 농지개혁 했잖아요. 근데 대지는 개혁이 안 된거에요. 농지는 개혁이 됐어요. 그래서 집을 개축을 못하는 거에요. 먹고사는데 농토가 중요하지 집터가 중요한 게 아니라서 그랬나봐요. 이 사랑채는 60년대 지었는데, 그때는 증개축해도 나뒀어요. 근데 요새는 주인이 허락을 안하죠. 집만 우리 집이고 도지세를 내고 살아요. 이동네 우리 같은 집 많아요.

농지개혁은 어떻게 했나요.

▲ 1950년에 농지개혁 했는데, 6.25때에요. 이게 우리 작은 아버님 상환증서에요. 소작농은 땅이 없잖아요. 그럼 분배농지가 있어요. 3정보 이상 되는 사람은 내놔야 되는거고, 없는 사람은 내놓은 사람 것 가져가서 상환하는 거고. 상환액 이 여기 26석 1두 1승. 쌀로 환산해서 갚는 거죠. 면적이 2102평. 상환 기간이 단기 4283(1950)년 3월 25일부터 단기 4287(1954)년 12월 31일까지 한거에요. 도장에 1962년 돼 있어요. 이때 상환을 다 해서 확정된 거겠고. 상환이 끝나서 면사무소에 위임해서 농림부장관이 발급을 한 거지요. 땅이 이쪽으로 넘어온 거죠. 이걸 가지고 다 냈으니까 등기를 내 앞으로 내주소. 근데 저희가 땅이 정말 많았나봐요. 자꾸 모르는 땅이 나와요. 아버님이 교직생활 하고 그러니까 재산 관리를 잘 못하신거에요. 사람들이 저게 인호네 큰아버지 땅이야. 250평이 튀어나와서, 남들이 얘기해서 찾았어요. 그리고 숲거리 산소가 460 평인데, 저거 인호네 산소야. 그래서 특별조치법으로 그 땅도, 산소도 찾았어요. 산소가 동네 마을 어귀에 있어요. 다 찌그러진 가문이지만 동 네 입구 평지에 가족묘가 있다는 건 예전에 행세를 했다는 거죠.

농지개혁 상환증서 뒷면

농지개혁 상환증서 앞면

자녀분들은 이런 내용을 알고 있나요.

▲ 저(정인희)는 들은 얘기, 특히 막내아들한테 아픈 얘기를 자주 하는 편인데 어떻게 잘 조절 해서 얘기를 할까 항상 고민스럽죠. 오광선 장군은, 제가 딸 둘에 아들 하난데 다 알고 있어요. 막내아들이 지금 캐나다 유학중인데 선생이 일본계 캐나다인이래요. 난 일본을 싫어한다.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통치하면서 얼마나 나쁜 짓 많이 했냐. 우리나라 근대화 시켰다는 건 니 생각이지 우리민족도 스스로 할 능력이 있었다. 아빠 오늘 토론이 벌어졌는데 오광선장군에 대해 이야기 했어. 전화로 그러더라고요.

올해 3.1운동 100주년인데 혹시 바램이 있으신지요.

▲ 정정산 지사가 만주에서 하루에 열두 가마솥 을 독립군에게 밥해주고, 말 키워서 군자금 대고, 조강지처로 죽도록 고생만 하시다가 광복 후에도 힘들게 사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이런 분을 어떻게 보상할거에요. 잘 기록해서, 이런 게 문자 기록만으로라도 남아있으면 그걸로다 족해요. 그리고 여기가 정정산 지사 생가 아닙니까. 사서 달라는 건 우리 욕심이고 독립운동 정신에도 맞지 않고. 다만 경기도나 용인시에서 사서 보존하면 좋겠어요. 우리가 여기서 살 필요도 없고.

정인호씨는 말을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정인희 씨는 분노했다. 독립유공자 자손들이 정부 초청 등 위로를 받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정산 지사 친정 후손들은 무관심속에서 슬픈 가족사에 흐느끼고 있었다.


글 박숙현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대 대학원에서 공공감사정책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이사주당의 태교신기, 처인성 등 용인지역학을 연구하고 있다.

더 많은 경기학광장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 바로가기]


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글쓴이
경기문화재단
자기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