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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소년 동화작가 윤수천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오늘도 소년 동화작가 윤수천 >


-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여든을 코앞에 둔 동화작가 윤수천. 그는 매일 새벽 4시께면 눈을 뜬다. 그리고 집 밖으로 나선다. 목적지는 없다. 이른 새벽에 꼼꼼하게 읽고 하나하나 잘라 챙긴 손바닥만한 신문 조각, 그리고 우연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일상적인 풍경이 그가 매일 반복하는 ‘창작여행’의 목적지라면 목적지다.

‘그리움’으로 시작한 창작의 길

윤수천(1942년·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지동) 은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매년 새로운 창작 동화를 발표하는 국내 대표적인 동화작가다. “인세로 생활하는” 국내 몇 되지 않는 동화작가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돌아보면 그의‘ 평생 직업’이 된 동화작가는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외동아들로 유복하게 자라던 그는 11세가 되던 1954년, 경기도 안성으로 삶터를 옮기게 된다. 정부가 시행한 농지개혁으로 많은 땅을 잃고 집안 살림이 “궁색해지자” 고모가 있는 지역으로 이사하면서 고향을 떠나게 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과 낯선 곳에서 적응해야 하는 변화는 소년의 마음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불러일으켰다.
“고향에서의 이탈로 생긴 그리움, 그 그리움에 대한 대상을 글로 풀어냈던 것 같다. 방학이면 큰아버지 댁과 친구들이 있는 고향으로 내려가 생활했다. 방학을 기다리며 학교는 건성으로 다녔던 것 같다. 낯섦과 외로움에 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게 됐다.”

소년 시절 윤수천은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문학의 길에 발을 내디뎠다. 대개 결핍은 과한 욕망과 나쁜 결과를 불러오지만, 그에게는 다행스럽게도 건강한 인생 항로가 정해지는 계기가 됐다. 우수한 성적으로 안성초, 안성중학교를 졸업 한 후 안성농업고등학교 입학한 그는 18세의 나이에 중앙호국단이 발행하는 학도주보에 수필 <가을과 S>를 발표했다. 작가로서의 윤수천 이름 석 글자가 최초로 활자화된 사건이었다. 이 수필은 5~6매 분량으로, 고향의 이웃집 소녀를 모티브로 가을이면 생각나는 풋풋한 첫사랑을 그려낸 작품이다. 같은 해 단국대와 경북대가 각각 주최한 전국 고교생 논문 모집에서 연거푸 입상하고 학원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 <슬픈 미소>로 수상 기록을 쌓았다.

“전국으로 나가는 신문에 수필이 딱 한 편 보도되는데 내 작품이 실리니까 선생님과 친구들 사이에서 ‘글을 잘 쓰는 학생이자 친구’로 주목 받기 시작했다.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지금의 한국예술인총연합회)가 주최하는 백일장에 교장 추천으로 경복궁에서 시 <하늘>을 썼는데 장원을 했다. 그 바람에 대한 뉴스에도 나오고 일반 신문에도 나오고 이름을 날렸다.”
전국 고등학생의 백일장 개최와 수상 소식도 뉴스가 되던 시대에 청소년 문인으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국학대학 국문과에 문예 부문 특기장 학생으로 입학한다. 그렇게 탄탄대로 문인의 길을 걷던 소년 윤수천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갑자기 펜을 놓게 된다. 5·16 이후 국학대학이 부실재단으로 분류되면서 폐교됐기 때문이다. 편입이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당시 공군 지원 입대를 선택한 그는 만 3년의 복무 기간 중 2년 동안 서해안 최북단 백령도에서 활동했다. 윤 작가는 왜 당시 편입을 선택하지 않았을까.
“당시 편입 절차에 드는 돈도 부담이었지만 가정교사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문학을 하는 사람이 대학까지 나와야 하는가’ 하는 짧은 생각 탓이었다. 아쉬움은 있지만, 문인으로 살아오면서 그것이 장애가 되진 않더라. 결혼하고 현실적인 문제로 문학에 잠시 손을 놓게 되었지만 결국 갈증을 느끼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나.”



글쓰기는 절실함, 그리고 고마움

군 제대 후 국가공무원 공개채용 시험에 합격한 윤수천은 안성우체국에 다녔다. 1967년 26세가 되던 해이다. 2년 후 1969년 용인시 원삼면 출신의 꽃같은 아내 이종진과 부부의 연을 맺고,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됐다.
“가장으로 살던 어느 날 ‘이게 내 삶의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 셋에, 처남 식구까지 가족을 먹여 살리자니 돈도 필요했다. 다시 펜을 잡고 신춘문예에 동화와 동시를 출품했는데 덜컥 우수작으로 뽑히면서 상금으로 받은 쌀도 팔고 막내딸 출산 비용도 충당하고…. 그래서 글은 내게 고마움이다.”

소년중앙문학상에 응모한 동화 <산마을 아이>가 우수작으로 선정되면서 당시 꽤 큰 상금인 10만원을 받았다. 산속에 사는 아이‘ 석이’가 자신이 뛰놀던 산을 허물어 길을 내며 개발하는 소리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추억을 회상하고 걱정하는 마음을 섬세하게 그린 동화다. 윤 작가가 석이처럼 산골에 살지는 않았지만 당시 개발붐의 현실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작가적 마음을 순수한 소년에게 투영시켜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의 활발한 문인으로서의 삶에 다시 불이 붙었다.

1974년 수원체신청 총무과로 발령받은 후 가족들을 수원으로 데려오기 위해서라도 창작과 상금이 절실했고, 그 결과는‘ 고마움’ 이었다. 이듬해에는 소년중앙문학상 공모에 동시 <아침>으로 다시 한번 수상의 기쁨을 얻었다. 재점화한 글쓰기에 상금 이상의 희열을 느끼며 창작 영역을 확장했다. KBS 주최 광복 30주년 애국가요 가사 모집에서 <소망>, MBC 주최 광복 30주년 애국가사 모집에서 <우리들의 새 노래>로 각각 최우수상을 거머쥐었다. 이 같은 능력이 직장 내에서 알려지면서 청장 훈시문을 비롯해 대회사, 신년사 등의 각종 글을 쓰면서 동화·동시 작가로서의 창작욕을 동시에 불 태웠다. 그 결과 상금으로 아이들의 책상을 사고 집을 마련하고 빚을 갚았다. 직장도 국방부 정훈국, 국군홍보관리소에 이어 글쓰기에 더욱 전념할 수 있는 국방일보로 옮겨 명예퇴직하기 전인 1998년까지 근무했다.

“아쉬울 때마다 응모해서 고료로 충당했다. 돈 때문에 글 썼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분명한 것은 궁핍한 현실이 글쓰기의 계기가 됐고 그만큼 글에 대해 갖는 고마움이 컸다.”

꾸준한 창작 활동으로 동화집과 동시집을 출간했다. 교과서에 실리거나 수상의 영예를 안긴 작품을 나열하자면 지면이 모자랄 정도다. 첫 동화집 <예쁘지는 병원>(1981, 견지사 刊) 을 시작으로 40대에 들어서면서 <천사의 선물 >(1985, 가톨릭출판사 刊) · <피리섬>(1986, 견 지사 刊) · <난쟁이와 무지개 나라>(1987, 신원 출판사 刊) · <뽀숭이의 여행>(1988, 견지사 刊) 등의 동화집을 잇달아 출간했다.
이러한 가운데 동화 <꽃가게 손님>으로 제 15회 한국아동문학상, <돈키호테 소방관>으로 제7회 방정환문학상을 각각 수상하는 등 화려한 수상 이력을 쌓으며 국내 대표적인 동화작가로 입지를 다졌다. 이에 대한문인협회 경기도지부장에 추대되는 등 문인의 지지를 얻어 폭넓은 활동을 벌였다.
그럼에도 창작 활동을 단 한 번도 쉰 적이 없다. 그 결과 교과서에 작품이 실리는 영광을 안았다. 1990년 그가 49세가 되던 해에 그의 동시 <연을 올리며>가 초등학교 4학년 2학기 교과서에 실린 것을 시작으로 최근 창작 발표한 동화와 시까지, 여러 편의 작품이 교과서에 수록됐다. 동화 <별에서 온 은실이>, <행복한 지게>, <쫑쫑이오 넓죽이>, <누나의 생일>, 중학교 1학년 도덕 교사서에 실린 시 <바람 부는 날의 풀> 등 이다. 작품성을 인정받아 해외에 판권이 수출된 작품도 여러 편이며 공연 무대에 올려지고 노래로 불리우기도 했다. 이는 그의 성실한 창작 자세, 녹슬지 않는 현실 감각과 소년의 감성 등 타고난 동화작가로서의 능력을 방증하는 기록 중 하나다.



매일 조금씩 천천히 떠나는 창작여행

윤 작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 해도 그의 집 앞을 지나간다면 그가 동화작가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다. 그가 현재 사는 집 대문에는 ‘동화작가네 집, 윤수천’ 이라는 명패가 걸려 있고, 담벼락에는 순박한 눈빛의 동화 속 아이 꺼벙이가 미소짓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왜 많은 문학 장르 중 동화를 선택했을까. 아니, 동화는 왜 윤수천을 선택했을까.

이와 관련 윤 작가는 “소설도 써봤지만 항상 최종심에서 탈락하더라” 라며 “한 소설가가 나에게 ‘ 윤 형은 동화, 동시가 어울린다 ’고 하는 데 이제는 그 이유를 알 것 같다” 고 술회한다. 소설은 좀 더 굴곡진 체험을 기반으로 탄생하는데 자신은 외아들로 곱게 자라 매끄럽고 예쁜 글에 더 특화돼 있다는 설명이다. 이어 그는 동화를 단순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예쁘고, 교훈적이고, 쉬운 글로 한정 짓는 것을 우려했다.

“모든 사람이 자신만의 어린 시절 인상적인 체험이 있다. 많은 이들이 겁도 없이 동화를 쓰겠다고 덤비는 이유일 테다. 그러나 그 1~2편이 끝이다. 동화는 엄연히 글이다. 개인의 푸념 혹은 체험이 아니다.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겪는 현실에 발을 딛고 의미있는 가치를 일깨우는 창작물이다.”

그가 매일 아침‘ 창작 여행’을 거르지 않고 떠나는 이유다. 윤 작가는 퇴사한 이후 지금까지 20여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새벽 4시면 일어나 신문이나 영감을 얻을 만한 새로운 읽을 거리를 잘라 챙긴다. 이를 가방 하나에 넣고 서는 오전 7시쯤 버스나 지하철에 몸을 싣고 3시간 가량 유랑한다. 78세의 나이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목적지 없는‘ 창작여행’을 떠나 글을 읽고 그 시간 한 공간에서 우연히 함께 하는 사람들과 풍경에서 새로운 글감을 찾는다. 어른들의 케케묵은 체험만을 기반으로 한 동화는 지금을 사는 어린이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여행 끝에 집으로 돌아온 그는 흔들리는 버스와 지하철 안에서 메모한 기록을 옮기고 그날의 아이디어를 글로 쓴다. 아니, 이 제는 컴퓨터 키보드에 손을 얹고 단 한 손가락 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친다. 수기에서 컴퓨터로 작업 방식은 바뀌었지만‘ 매일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창작 철학은 변함이 없다.

“윤수천 동화는 재미있고 따뜻하다고 하는데 아동문학이 그러한 것 아닐까. 절망을 보여 주더라도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아이들이 서점에서 나를 알아보고 다가와 인사하고, 부모들이 고맙다고 말하고, 손녀가 내 작품을 학교 시험 문제에서 읽었다며 자랑스러워 해주니 나는 참 행복한 동화작가다.”

여든을 코앞에 둔 할아버지 동화작가는 여전히 매년 창작물을 발표하고 있다. 수십 년의 나이 차가 나는 어린이 독자들이 그를 사랑하고 동화 속 새로운 친구를 기다린다. 어린이 독자에게 백발 성성한 윤수천은 자신들과 같은 시선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소년일 뿐이다. 오늘도 꿈꾸는 소년 동화작가 윤수천, 인터뷰를 마치고 글쓰기 강의에 나서는 그의 뒷모습이 싱그럽기 그지없다.



글 류설아

수원대학교에서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단국대학교 지식재산대학원 석사학위를 받았다. 신문과 방송사에서 15년 동안 취재기자로 활동, 한 국기자상을 수상하고 인간의 삶에 주목하는 다양한 저술을 펴냈다. 현재 구술사 채록 등 프리랜서 인터뷰어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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