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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화성 두레농악의 살아있는 역사 안병선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화성 두레농악의 살아있는 역사 안병선 >


-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화성두레농악의 살아있는 역사 안병선


두레는 농촌사회의 상호협력을 목적으로 한 공동 노동체다. 그러나 두레풍장 (두레굿)을 친다고 할 때의 두레란 두레노동을 가리킨다. 또한 두레소리는 두레를 할 때 불렀던 소리로 노동요에 속하며, 두레놀이는 두레소리를 하며 노는 놀이문화를 말한다.

향토성과 전통이 살아있는 화성두레농악

화성두레는 경기도 화성지역의 독자적인 소리로 긴요하며 향토성이 짙은 소리다. 특히 화성의 남양반도 지역은 소금생산과 풍부한 어물, 그리고 중국으로 가는 배가 닿을 수 있었던 경제적 세(勢)의 특징으로 독자적인 농요가 생성되었다. 이러한 점은 두레소리의 전승에 있어 지역적으로도 소중하고, 역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전거가 있는 것이다. 오늘의 주인공 안병선(1950년 4월 8일 생)은 향토문화예술인 두레소리와 농악을 올곧이 전승하고 있다. 화성은 현재 인구가 75만을 앞두고 있으며 급속도로 도시화가 되어가며 지역문화가 점점 사라져 갈 위기에 있다. 이는 화성의 전통예술뿐만 아니라 사라져 가는 향토문화예술인 두레소리와 농악을 이어가는데 중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

1963년 동네 결혼식에서 소고를 하고 있는 안병선

안병선은 9살의 나이인 어릴 적부터 마을두레에 참여하며 화성의 두레소리를 자연적으로 전승 했다. 이후 당시 영좌(領座)이자 화성소리의 대가인 박장원에게 두레소리, 어업요, 고사소리 등을 전수 받았으며, 박장원의 스승인 박용규에게 행여(상여)소리, 달궁(상여)소리를 전수 받으며, 목소리 청이 좋다고 하여 특출한 실력을 인정받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10대 때부터 선소리꾼으로 활동을 했다. 또한 현재 화성에서 두레소리와 어업요, 상여소리, 고사덕담을 전승하는 사람은 안병 선이 유일하며 안병선의 소리는 이미 정평을 얻은 바 있다.
경기도의 향토성과 전통성, 개인적인 특색으로 보아도 안병선의 화성두레소리와 농악은 화성 지방의 문화를 지켜왔으며 지금도 지켜가고 있다.


1963년 동네 결혼식에서 북을 치고 있는 안병선

화성두레농악의 특징

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화성시는 서해에 닿아 있으며, 남쪽으로는 평택시와 오산시, 동쪽으로 용인시, 북쪽으로는 수원시와 시흥시 및 안산시에 접한다.
평야가 많은 화성지방은 농업과 어업이 주산업이었으며 밭농사보다는 논농사의 비중이 높은 지역이기에 두레가 매우 발달했다. 또한 농사의 풍요와 관련이 있는 각종 제의(祭儀)와 민속놀이 등에도 쓰였다.


1983년 어업을 하고 있는 안병선

정초에는 지신밟기에 이어 당제를 지내 마을의 안녕(安寧)을 빌면서 공동체의 결속을 다졌다. 육지 깊숙이 바닷물이 유입되는 저지대가 대부분인 지형적 특성상, 논농사에 필수적인 물의 확보를 위하여 우물고사를 지냈으며 농사의 풍요를 위해 고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화성시 해안지역 역시 일찍이 조선조 아래로 계속되었던 국토확장사업으로 간척지화 되었기에 농경지의 확대가 계속되어 왔고 벼농사를 주축으로 하는 농업과 어업이 생활의 근간이었다. 이 농업노동에 있어서 마을 공동작업인 두레가 서는 것은 보편적인 현상이었고 이에 따른 노동요(勞動謠)의 형성과 계승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물고사굿 재연


두벌(재벌)매기

화성두레의 진행과정

두레에 의한 공동노동은 모내기에서 시작하여 가을걷이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논농사의 전 과정과 함께 했지만, 특히 짧은 기간에 많은 품을 들여야 하는 모내기와 김매기에는 반드시 두레노동이 행해졌다. 화성지역에서의 두레는 모내기 시기부터 논매기가 끝나는 7월 백중(百中)전까지 농업노동 과 연관하여 행해졌다. 음력 4월말에서 5월초까지 모내기를 하고 논매기는 초벌매기(애벌, 아 시)와 두벌매기(재벌)는 호미로 하며 세벌매기 (논 훔치기, 만물 훔치기)가 있다.

초벌 때에는 일직선으로 앞으로 이동하고 논의 끝에 도착하면 돌아서서 다시 매는 형태로 논을 매며, 두벌 때에는 양 옆쪽의 사람들이 앞으로 이동하며 중앙으로 모여 매는 형태이며 세 벌을 할 때에는‘ 도리 띤다.’라고 하여 일직선으로 시작하여 우측의 농군이 빠르게 이동하여 시계 바늘 움직이듯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며 논을 맨다. 이러한 이유는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한 것과 더불어 논을 촘촘히 매기 위해 하는 방법이다.



두레소리는 이러한 두레노동을 할 때 협동심을 북돋우고 힘든 노동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힘을 내게 하는 역할을 한다.
화성두레농악의 소리는 선소리꾼이 독창으로 메기면 여러 사람이 합창으로 받는 형식을 취한다. 봄철 모를 심으면서 목청이 좋은 사람이 선소리꾼이 되어 ‘모심는 소리’ 를 부르면 여러 사람이 제창으로 후렴구를 받는 형식이다.
물을 댈 논에 모춤을 흩어 놓으면 농악을 치고 농군들은 논에 일렬로 늘어서 모내기 소리를 하며 모를 심는다. 이어 초벌(애벌, 아시)의 ‘상사디야 소리’, 재벌의 ‘얼카덩어리’, 세벌(논훔 치기, 만물훔치기)의 ‘에키나 방아’ 등의 논맴 소리와 지게놀이에 쓰인 ‘상여소리’ 가 있다.

모내기철이 다가오거나 김맬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이 영좌의 집에 모여 두레노동할 일을 상의한다. 언제부터 시작할 것인지 그리고 어느 집부터 어떤 순서로 할 것인지를 정하고 두레의 구성원을 편성한다. 약정한 날이 되면 이른 새벽에 두레 조직원들이 영좌의 집으로 모인다. 두레꾼들이 모여 복색을 갖추고 모든 준비가 끝나면 풍장을 치며 흥을 돋운다. 이는 두레의 시작을 알리는 것으로 이를 보통 ‘두레 났다’고 한다.
농기를 선두로 풍장을 치며 일할 논에 도착하면 잠시 가락을 치다가 맺는다. 두레 시에 농기는 두레의 상징으로서 두레꾼들은 이를 상당히 신성시하고 존중했던 고로 두레꾼은 농기를 중심으로 서로 결속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두레가 길을 오갈 때는 농기(農旗)를 앞세운다. 전라도의 농기에는 용의 그림만 그려놓은 예들이 있지만 경기도의 농기에는 농자천하지대본야“( 農者天下之大本也”)라고 세로로 쓴 것이 많다. 때로는 제일흥업지기“( 第一興農之 旗”)나 신농유업“( 神農遺業”)이라고 표현한 경우도 있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중농사상(重農 思想)의 표현이며 농기를 앞세우고 들로 나가는 논매기꾼들의 의식 속에 농사의 중요성과 함께 농사꾼이야 말로 나라살림의 근본이라는 자부심을 가질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두레가 길을 갈 때는 농기를 앞세우고 농악을 울리면서 오고 가는 것이 원칙이지만, 논에 들어가 지심을 맬 때는 악기 없이 소리만 한다. 만약 악기를 쓸 경우엔 경기지방의 선소리꾼들은 북을 치면서 소리하는 경우도 있다.
두레조직의 구성원에 대한 명칭은 지역적으로 영좌(領座) 혹은 좌상(座上)이라고 부르며 총 지휘자라 할 수 있다. 화성에서는 영좌(領座)라고 부르며 농사경험이 많고 지도력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영좌는 두레가 나면 두레 일정 조율 및 모든 것을 총괄 지휘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보통 상쇠나 선소리꾼이 맡는다.


2016 정기공연 - 두레소리

화성두레농악만의 전통

화성두레농악의 구성은 보통 농군이 15∼20 인 정도로 구성되었으며 좌상(座上)과 영좌(領 座)를 중심으로 한 지휘체계로서, 좌상은 제일 나이가 많은 사람을 지도자로 모셨으며 영좌는 그보다 약간 아랫사람으로 농사일을 좌우했다.

낭대는 보통 농기1, 명기1, 영기2 등 4명으로 구성되고 악기는 상쇠, 부쇠를 비롯하여 징 1명 이상, 장구 2명 이상, 북 2명 이상 둔다. 나비 상모를 돌리는 법고는 4∼6법고 이상 두었는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함께 했다. 태평소(胡笛)는 ‘두레를 제대로 차린다.’고 할 때는 2인으로 구성하기도 한다.
두레농사 때는 보통 5번 식사를 하였는데, 김 매기를 할 때에는 농군들이 일을 하는 동안 동네 아낙네들이 밥을 지어 먹거나, 새참을 날라 먹기도 했다.

전승현황

화성시는 광주산맥과 차령산맥 사이에 위치하여 동북쪽으로 비교적 산세가 깊은 산지를 형성하고 중앙은 구릉지이며, 서쪽은 평야지대를 이루면서 서해와 접하고 있다. 서해안으로 남양 반도와 조암반도가 돌출되어 있고, 화성시 중심부를 남류하는 황구지천과 발안천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넓게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북쪽으로 군자만, 남쪽으로 남양만을 끼고 있으며, 해안선은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이다. 이러한 지역적 특색으로 반농반어의 산업적 특색을 지니고 있는 도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현재는 반농반어에 도시화까지 진행되고 있는 도농의 형태를 띄고 있다.

1960년대 중반기부터 우리나라 농사에 제초제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농업의 기계화로 인하여 재래식 논매기가 사라지며 자연전승으로 이루어지던 두레소리는 점차 소멸되었고, 이후 두레소리는 선소리꾼들의 기억에만 그 노래들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과거부터 넓은 평야지대에서 이어지던 두레소리인 논매는 소리와 고사소리, 어업요, 상여소리는 사라지고,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를 전승하던 소리꾼들은 하나, 둘 세상을 떠나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당시 두레소리를 전승 하였던 화성시 신외동의 안병선 옹은 고향을 떠나지 않고 농사를 지으며 화성지역의 두레소리, 고사소리, 어업요(배고사), 상여소리 등 화성의 소리에 있어서 가사는 물론 가락까지 잊지 않고 보존하고 있으며, 이를 전승하고자 후학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현재 경기도 화성시 신외동에 거주하고 있는 안병선(安柄善: 1947-현재)은 4살 때부터 현재까지 지역에 거주하면서 화성에 전승되고 있는 두레소리를 자연적으로 보존 계승하고 있다. 당시 영좌인 박장원에게 두레소리, 고사소리, 상여소리 등을 전수 하였으며 1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이 좋다고 하여 어른들의 추천으로 선소리꾼으로 활동하였다.
화성에서 농악을 하던 故최태봉(쇠), 故최철 상(장구), 故신상쾌(북), 故최태업(징), 故최덕지 (소고) 등 뒤를 이어 故신현주, 최진항(1933년~), 배복진(1943년~), 신오철(1936년~)과 함께 두레를 형성하여 농악, 두레소리 등으로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동네에서 뿐만 아니라 이웃 마을까지 불려 다니며 농악과 두레소리를 하였다. 같이 활동한 최진항, 배복진, 신오철의 말에 의하면 현재 온전한 화성두레소리의 연행은 안병선만이 유일하며 화성두레소리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꼭 필요한 존재이자 중요한 존재라고 말한다.


2017 사할린공연 - 고사소리

화성두레농악은 반드시 전승돼야

안병선은 어릴적부터 두레농악을 시작한 후 상쇠로 활동하며 화성시의 크고 작은 행사에 참여하였다.
이후 2002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화성시 지부 부지부장, 2010년 사단법인 경기전통화성 두레보존회의 이사장으로 화성의 농악과 두레 소리의 전승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다. 정기 공연을 연1회 진행해 화성의 농악과 두레소리의 전승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화성의 전통문화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 화성두레농악과 두레소리를 알리기 위해 연간 50회 이상의 국 내·외 공연과 전국대회에 참여하여 많은 성과를 이루었다.
대표적으로 제63회 개천예술제에서 개인 특별상을 수상하였고, 화성시장과 국회의원 표창장을 수여 받았고, 제11회 전국두레풍물경연대회에서 대상, 제18회 지평선전국농악경연대회 금상, 제63회 개천예술제 전국국악경연대회 종합대상 등을 수상하였다.
또한 제21회 경기도민속예술제와 농림축산 식품부가 주최하는 제11회 전국두레풍물경연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함으로써 화성시의 문화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기여하였다.

지난해에는 제44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농악부문 장원, 제20회 전국농악명인경연대회 대상을 수상으로 농악으로 인정을 받았으며, 제59회 한국민속예술축제 금상 수상함으로 화성 두레농악뿐만이 아닌 화성두레소리로도 대내외적으로 인정을 받는 성과를 이루었다.

국내 뿐만 아니라 대만, 태국, 상해, 오만, 우즈베키스탄, 키르키즈스탄, 카자흐스탄, 사할린, 싱가포르, 사우디아라비아 등에서 초청을 받아 농악을 선보이며 해외에서도 주목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개최한 ‘2019 카멜 페스티벌’ 에서 대한민국의 농악 소리를 알리며 세계 곳곳에 퍼뜨리고 있다.


                                         ▲ 2010년 태국과 상해 초청공연

오늘도 안병선을 중심으로 화성두레농악은 전통문화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농악의 저변확대 및 후학 양성을 위해 전공자와 관내 청소년 및 일반인 등을 대상으로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다.

안병선의 인생은 올곧게 가락과 함께해왔다. 어렸을 적부터 마을에서 어른들의 농악 가락을 귀로 들으며 자라왔고, 별다른 악보나 가르침 없이 몸으로 받아들였던 그다.
안병선은 “세월이 지날수록 농촌 인구에서 젊은이들의 비율이 적어지며, 자신처럼 농악을 물려줄 후대가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웠다” 면서 뜻을 함께하는 몇몇과 함께 우리 소리를 기록하고, 전승하기로 결심하게 됐고 농촌 곳곳에서 발품을 팔며 한 가락 한다는 어르신들의 소리를 채록하고, 장단과 몸짓을 녹화했다. 그렇게 자료를 모으고 집대성하는 과정을 거쳐 10년전 (사) 화성두레농악보존회를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별다른 전승 체계가 없기 때문에 이같은 특성도 우리 세대가 사라지면 함께 묻혀질 것이라고 생각해 보존회를 만들기로 마음먹게 됐다” 면서 “소중한 우리의 전통이 명맥을 이어갈 수 있도록 후학을 양성하는데 남은 평생을 바치겠다” 고 피력했다.

보존회는 화성 각 지역에 산재해 근근이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화성두레가락을 발굴해 악보로까지 만들어 체계적으로 우리나라 전역에 전파하고 두레농악의 세계화라는 더 큰 꿈을 꾸며 대한민국의 전통 예술을 널리 알리고 있다.
화성두레농악. 이제는 전통지역문화를 넘어 신한류문화로서도 손색이 없도록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지켜나가고 보존해야 할 때다.


키르기즈스탄 공연 - 두레소리

전승계보

안병선은 1947년 서울 만리동에서 출생하여 4살에 사변으로 화성군 남양면 신외2리로 부모를 따라서 피난을 왔다가 정착하게 되었다. 제2의 고향인 신외리에서 자라며 1956년 만 8세 때부터 신외리 마을 두레에 참여하며, 자연적으로 화성 두레 소리와 꽹과리를 전승받았다. 신외2리 토민인 故박장원에게 고사덕담을 비롯한 화성두레소리 등을 사사받았으며, 故박 장원의 스승인 故박용규에게 행여(상여)소리와 달궁(상여)를 사사받았다. 마을 두레 쇠가락은 故최태봉 선생으로부터 故신현주, 신원철(1930 년~)로 이어졌으며, 안병선은 두 사람으로부터 쇠가락을 사사 받았다.

당시 두레 농악의 쇠는 故최태봉이 맡았으며, 징 故신형근, 장구 故최철상, 북 故신상쾌, 故최태업, 상벅구에 故최덕지 등과 함께 소리꾼으로 故박장원이 함께하였다. 이후 고인이 되시거나 원로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쇠는 故신 현주, 신원철(1930년~) 등을 비롯하여 안병선이 있었으며, 징은 신오철(1936년~), 장구는 故최 병두, 북은 최진항(1933년~), 상벅구에는 배복 진(1943년~)등이 연희를 하였으며, 안병선이 소리와 연희를 병행하였다.

당시 함께 활동하던 최진항(1933년~), 배복 진(1943년~), 신오철(1936년~)의 말에 의하면 명맥이 끊겨가던 화성두레농악 및 화성두레 소리의 연행은 안병선을 필두로 (사)화성두레 농악보존회가 발굴하여 복원한 화성두레농악만이 화성두레농악의 정통성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안병선은 두레소리와 두레농악의 명맥을 보존 전승하기 위하여 1980년대 신외리 부녀회 농악 지도를 비롯하여 1990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화성시 남양 두레단 등에서 화성시의 다양한 행사에 참여하였으며, 지도와 더불어 상쇠 및 소리꾼으로 활동하였다. 2002년 사단법인 한국국악협회 화성시지부 부지부장을 역임하였으며, 2010년 사단법인 화성두레농악보존회의 전신인 경기전통화성두레보존회의 이사장에 취임하여 화성두레농악의 발굴 복원을 비롯한 보존 및 전승에 노력하고 있다.



글 이형찬

홍익대학원 국어교육과를 마치고 20여년 주간신문 및 인터넷신문 언론에서 활동했으며 현재 화성시에 기반을 둔 주간신문 화성저널에서 근무하고 있다. 최근 성산효대학원대학교에서 한국의 효문화를 연구하는 효문화학과 다문화학을 전공하고 석사학위를 마쳤으며 경기학연구자모임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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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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