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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지역 1세대 향토사학자 가곡 이기현 선생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파주지역 1세대 향토사학자 가곡 이기현 선생 >


- 경기학광장Vol.1 _ People & life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파주지역 1세대 향토사학자로 지역문화 연구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이기현 선생(1923~ 2014).
선생의 호(號)는 가곡(柯谷)으로 본관(本貫)은 경주(慶州)다. 1923년 8월 27일 파주시 금능동 가나무골(柯谷)에서 아버지 이윤영(李允榮)과 어머니 유경숙(劉瓊淑)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의 호(號) 가곡(柯谷)은 고향 마을‘ 가나무골’에서 따왔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어린나이에 인근 조리면 뇌조리의 이경호(李慶浩) 선생 문하(門下)에서 한문을 배웠다. 그리고 교하보 통학교(交河普通學校)를 나와 서울의 명문학교로 알려진 배재중학교(培材中學校)를 다녔다. 당시로서는 파주에서 서울로 유학을 간 셈이다. 배재중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 12월 해방이 되던 해 선생은 21세의 나이로 파주군 아동면 (衙洞面) 서기보(書記補)로 사회 첫 발인 공직 생활을 시작한다. 아동면사무소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업무처리에 매사 빈틈이 없고 꼼꼼하다는 칭찬을 많이 받았다.
이러한 업무 능력이 인정돼 곧 파주군청으로 발령받아 내무과를 비롯해 산업과 양정계 등 군청의 주요부서에서 약 20여년간을 근무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공직생활에 답답함을 많이 느꼈고 또 다른 일에 새롭게 도전해 보고 싶은 욕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정년을 채우지 못하고 1968년 40대 초반에 공직을 그만두게 된다.
공직생활을 그만둔 선생은 1970년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제창한 국가재건운동 파주군 지부 간사(幹事)로 선임돼 민관이 함께 새마을 운동을 전개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하기도 했다.

단양 도담삼봉 답사

향토자료조사와 자료집 발간에 헌신

공직을 그만둔 후 선생은 곧바로 금촌에 <선 진문화사> 라는 인쇄소를 차렸다. 당시 파주에는 인쇄소가 없었던 시대다. 공공기관에서 의뢰하는 각종 인쇄물과 학교의 상장제작 등 인쇄업은 꽤 잘 운영 되었다. 선생이 인쇄소를 차린 것은 공직을 그만두었으니 다른 업(業)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가 평소 생각해오던 지역 향토사 자료들을 수집해 책으로 만들고자 하는 바램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파주에는 지역의 향토사 및 전통문화 보존 계승을 위해 1967년 창립된 파주문화원이 있었다. 선생은 인쇄소 일을 처남에게 맡기고 1971년부터 파주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 선생이 평소 하고 싶었던 지역의 향토사자료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첫 번째 자료조사 대상은 유난히 많은 파주지역의 조선시대 사대부 묘역에 대한 조사였다. 묘역 대부분이 산속에 있기 때문에 묘역조사를 하기 위해서는 파주지역의 모든 산속을 뒤져야만 했다. 차량이 없으니 발품을 팔아야 하는 일이기도 했지만 시간도 오래 걸리는 일이었다. 끈기가 없이는 더욱 해내기 힘든 일이었다.
선생은 아침이면 도시락 두 개를 싸서 자전거 짐받이에 묶고 묘역조사를 위해 집을 나섰다. 묘역조사는 사전에 계획을 세워 읍면별로 구분해 차례차례 온 산을 뒤져가며 오래된 묘역에 대한 전수 조사를 시작했다. 실로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당시 산 속에서 하루종일 묘를 찾아 다니다가 허기가 질 때면 싸 온 도시락을 먹곤 했는데 어느날엔가는 이 모습이 간첩으로 오인을 받아 신고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선생의 파주시 조선시대 묘역 조사는 5년이 넘게 걸렸다.
마모된 비문을 확인해 모두 종이에 옮겨 적고 위치를 확인하고 하다보면 시간이 꽤 걸리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시작한 조사를 중단할 수도 없었다.
파주는 조선시대 분묘가 수도권 일원에서 가장 많은 지역 중에 한 곳이기 때문에 묘역의 숫자만 하더라도 6백여기가 넘는 숫자였다.
수 년에 걸친 파주지역의 조선시대 묘역 조사를 마치고 선생은 이를 모두 정리해 1994년「坡州文化遺蹟誌」라는 한 권의 자료집을 발간하게 된다.
실로 엄청난 자료조사 분량이며 이 책에는 파 주지역의 당상관(정3품 이상)과 당하관(정3품 이하) 묘역 수백기가 기록되었고 당상관 이상의 묘역이 150여기에 이르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선생이 펴낸 이 자료집은 훗날 파주지역의 묘역 관련 연구에 기초자료로 널리 활용되고 있다.

파주지역 묘역조사를 통해 그 결실로 한 권의 자료집을 만들어 내고 나니 선생은 뿌듯했다. 그리고 곧 또 다른 목표를 세우고 지역자료조사에 나서게 된다.
그것은 파주시 전 지역의 지명(地名)에 대한 유래와 지역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설(傳說)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이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선생은 또 다시 파주 전 지역의 마을을 돌아 다니며 마을의 지명유래와 전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각 마을 노인정을 모두 찾아 다녔고 마을의 노인들은 이기현 선생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정도였다.
한 마을을 여러번 방문하여 조사하기도 하고 미흡한 자료는 다른 문헌을 뒤져가며 보충하여 자료를 정리해 나갔다.

이렇게 해서 1997년「坡州 地名由來와 傳說 誌」라는 자료집을 엮어냈다.
이외에도 선생은 파주지역에서 펼쳐진 전쟁사 자료들을 모아 「坡州戰鬪史誌」를 1995년 발간하기도 하였고 파주에 소재한 문화유적의 향사(享祀) 예의(禮儀) 및 일반가정에서의 관혼상제(冠婚喪祭)에 관한 전통예법을 간추려 정리한 「儀禮解說典書」를 1990년 편찬하기도 했다.

2002년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회의


무성서원 현지 답사

향토사학자로서의 자리매김

선생의 애향심은 남달랐다. 당시 파주지역의 향토사 관련 분야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파주 문화원을 제외한 별도의 연구단체도 없었다.
먹고 살기에 바쁜 시대이다 보니 향토사 자료의 중요성을 인식하기도 어려웠던 시대였다. 하지만 선생은 파주지역문화의 정체성을 찾는데 있어 향토사자료의 수집과 정리는 무엇보다 중요한 일임을 인식하였던 것이다.

주변사람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래도 선생은 멈추지 않았다. 지역과 관련된 자료가 발견되거나 구술에 의해 전해들은 이야기는 꼼꼼이 노트에 적어 보관했다가 글을 쓰거나 자료집을 낼 때 자료로 활용하였다.
사실 이 당시만해도 지역의 향토사가들은 인정받지 못했다. 자료집을 발간해도 내용의 신뢰성에 시비를 걸기도 했다. 그것은 1970~80년 대 지역에서 활동한 향토사가들 대부분이 지역의 촌로(村老)들이었으며 학업에서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토사 관련 자료집의 내용도 허술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향토사가들이 모아놓은 자료들은 분명 향토사 연구의 기초자료로서 훌륭한 자료들이 아닐 수 없다.
이기현 선생이 펴낸 향토사 자료집들이 지금도 파주지역의 향토사 연구자들에게 꼭 필요한 참고자료가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전국 문화원장 회의에서 대통령과 인사

파주문화원 사무국장에서 제15대 파주 문화원장 취임

1971년부터 3년간 파주문화원 사무국장을 지낸 선생은 1984년부터 1990년까지 또 다시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문화원은 지역의 향토사 자료 수집과 정리, 연구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공간이었다. 선생은 파주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그 동안 향토사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만났던 많은 사람들을 모아 파주문예진흥회를 조직하고 초대 회장직을 겸임하였다. 파주문예진흥회는 지역의 향토자료들을 조사하고 발굴해 정리하고 이를 바탕으로 지역문화의 정체성을 확립하는데 그 목적을 두었다. 그리고 조사된 자료들을 엮어 『文鄕』이라는 책을 매년 발간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파주지역의 정자(亭子)와 나루터를 조사해 향토자료집으로 엮어냈으며 그 밖에도 수많은 향토사 자료들을 수집해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수년간을 파주문화원 사무국장으로 재직한 선생은 1996년 제15대 파주문화원장에 취임하게 된다. 파주문화원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순수 민간 주도의 율곡문화제를 개최했으며 율곡문화제를 기념해 전국 율곡서예대전을 열기도 했다. 그리고 문화원 소식과 향토사 연구 관련 글들을 수록한 파주문화원 소식지인 「坡州文化」를 발간해 현재까지 속간되고 있다.

선생은 파주지역 향토사연구의 초석을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파주문화원장을 비롯해 문예진흥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등을 역임했다.

선생은 지역의 유림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파주문화원장에서 물러난 후 교하향교 전교(典校)로 취임해 충효도의 선양교육, 전통문화 기로연 등 지역의 유교문화 활성화와 전통문화 보존 계승에도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 선생은 향토문화 창달에 기여한 공로로 파주 시문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기도 했다.
이외에도 경주이씨 파주화수회장을 맡으면 서 종사에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경주이씨 국당 공후사천공파(慶州李氏菊堂公后泗川公派) 종원들에게 숭조사상을 함양하고자 「사천공파보(泗川公派譜)」를 자비로 편찬해 배포하는 음덕(陰德)을 베풀기도 했다.


김호기 2대 문예진흥회장과 함께


2005년 향교 기로연에서 장수노인 표창

끝없는 향토사랑 실천

파주문화원장에서 물러나서도 선생은 <안국 산악회>를 조직해 정기적 산행을 하는 건강함을 보였다. 또한 민통선내 의성(醫聖) 허준묘(許 浚墓)와 장단향교(長湍鄕校) 부지, 도라산과 백학산 아래 이궁(離宮)터의 사료 발굴을 위해 백방으로 나섰으며 2009년 8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강원도 평창을 찾아가 봉평(蓬坪) 백옥포리(白玉浦里)에 구전되는 율곡 이이선생의 잉태지(孕胎地)와 대화리 주막(酒幕)을 답사해 율곡 선생의 행적 발굴에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는 끝임없는 향토 사랑을 실천했다.

선생은 22세에 전주이씨(全州李氏) 이정수(李貞秀) 여사와 혼인하여 슬하에 4남 2녀를 두고 지난 2014년 7월 31일 숙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91세다.


초대 파주문예진흥회장


문화원장 재직시 율곡서예대전 개최

선생의 뜻을 기리는 공적비 건립

지난 2015년 4월 6일 오전 11시 파주시 탄현면 금산리 경주이씨 사천공파 종중 묘원(墓園) 에서는 뜻있는 행사가 열렸다.
지난해 타계한 전 파주문화원장 가곡(柯谷) 이기현(李琪鉉) 선생의 공적비 제막식이 열렸다. 가곡 이기현 선생 공적비 건립 추진위원회에서 주관한 이 날 공적비 제막식에는 평소 고인과 친분을 함께했던 지인들을 비롯해 파주관내 향교 및 서원의 유림, 유가족, 경주이씨 종중 등에 서 약 70여명이 참석했다.
한식일을 맞아 가곡 선생의 묘소 아래에 세워진 공적비는 선생의 생평사적(生平史蹟)을 적어 후손 및 그를 사모했던 많은 지인들에게 그의 업적을 오랫동안 기억하고자 하는 뜻이 담겨져 있다.
제막식은 조촐하게 치러졌다. 별도의 지역 기관단체장도 초청하지 않았다. 추진위원회에서는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 제막식이니 평소 선생과 가깝게 지내던 지인들끼리 소박한 행사를 갖기로 했다. 공적비 건립에 드는 비용도 그래서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의 성금을 십시일반 모아 건립하게 되었다.


가곡 이기현선생 공적비 제막식
 


글 이윤희

파주출생. 중앙대 대학원에서 역사학과를 졸업,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파주지역문화연구소장으로 파주지역의 향토사연구활동과 아울러 지역의 이야기자원을 아카이빙하는 파주이야기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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