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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문화재단

파주 탄현 성동리 통일동산…

경기학광장Vol.1 _ Trip & healing

< 파주 탄현 성동리 통일동산… >


- 경기학광장Vol.1 _ Trip & healing -



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전장의 말발굽 소리 들리는 분단의 현장…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 659. 낯선 아라비아 숫자로 마무리되는 옛 주소를 낮은 목소리로 읊조리면 까닭 모르게 코끝이 시큰해진다. 육지로는 더 이상 갈 수 없는, 한반도 남녘 맨 왼쪽 끝자락인 탓일 까. 지난 1950년부터 3년 동안 온 산하를 유린했던 한국전쟁의 결과로 국토가 절반으로 나뉘었고, 그래서 이곳에선 북녘을 향해 단 한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휴전선, 또는 비무장지대를 갈음하는 임진강(臨津江)이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기 때문이다. 더 걷고 싶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땅, 이른바 대한민국의 엄연한 최전방이다.

이곳에는 해발 110m의 야트막한 동산(동산이라기 보다는 언덕)이 도드라지게 앉아 있다. 자라의 머리처럼 볼록하다는 뜻의 오두산(鰲頭山)으로 불리는 이 언덕은 얼핏 봐도 자라가 목을 내밀고 있는 형세다. 왼쪽 아래로는 한강, 오른쪽 아래로는 임진강을 마치 긴 칼을 옆구리에 찬 장수처럼 내려보고 있다. 지금은 군부대가 설치한 통일전망대가 위치했지만, 오두산은 제법 연륜과 유서가 깊다. 삼국시대 백제의 땅이었을 때부터 둘레 길이 620m의 산성인 오두산성이 축조됐던 곳이기 때문이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삼국사기> 등에 나오는 관미성이 바로 이곳이다. 통일전망대를 오르면 평양이 고향인 독립운동가인 조만식 선생의 동상이 통일의 염원을 담고 북녘 땅을 배경으로 우뚝 서 관람객들을 맞는다.

예나 지금이나 오두산 일대는 천혜의 군사적인 요새였을 터이다. 풀숲에 귀를 기울이면 치열했던 전장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 싶다. 오두산성은 현재 통일전망대 입구 한쪽에 그 흔적만 남아있다. 오두산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임진강도 예사스럽지는 않다. 우리 국토의 한복판, 강원도와 경기도를 북동서 방향으로 관통해 흐르는 탓일까. 지금은 북녘 땅인 강원도 법동군 용포리 두류산에서 발원, 황해북도 개풍군 림한리(북한 행정지명)를 거쳐 남녘인 파주시 탄현면 사이에서 한강과 만난다.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른 뒤 늠름하게 서해 바다로 흘러간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이 강은 분단시대 남녘과 북녘을 가르는 자연경계선이 됐다. 그래서일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처절한 이별의 아픔과 한(恨)을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유난히 조석간만의 차가 심한 서해 바다에 인접한 이유로 인해 하루에도 두차례씩 썰물 때가 되면 짙은 회색 강바닥이 쩍쩍 갈라진 채 그 속살이 처연하게 드러난다. 그 속살 위로 철없는 텃새들은 오늘도 속절없이 발걸음을 옮긴다.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자유로

황복 많이 잡혔던 임진강 따라 남방한계선 구획…

다행스럽게도 오두산 아래로는 이름만큼이나 편도 4차선의 자동차 전용도로가 임진각을 향해 펼쳐져 있다. 지난 1990년에 착공돼 지난 1994년 고양 행주대교에서 임진각까지 준공된 길이 46.6㎞의 자유로다. 편도 4차선으로 제한속도만 없다면 마음껏 질주할 수도 있다. 내친 김에 임진강 건너 북녘 땅으로도 훌쩍 내달리고도 싶다. 자유로가 개통되기 전까지 이곳은 민간인들의 출입이 통제됐던 민통선이었고, 군부대 작전구역이었다. 지난 1960년 후반 북한군 특수부대 병력이 청와대로 침투할 당시에도 오두산 아래 임진강 갯벌이 루트였다. 이 일대 주민들은 밤낮으로 북한당국의 대남방송 확성기 소음에 시달려야만 했다. 불과 20여년 전 얘기다. 그래서 당시 이 일대 군부대에서 복무했던 장년층은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다.

임진강에는 예로부터 황복(황복어)이 많이 잡혔고, 장어도 많이 서식하고 있다. 임진강 황복은 전국에서 으뜸으로 쳐준다. 그래서 지난 70여년의 세월을 그 흔한 황복이나 장어, 붕어 등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라도, 아니면 강을 따라 널찍하게 펼쳐진 들녘에서 벼농사를 짓거나 푸성귀 등을 거두기 위해서라도 군부대 허가를 받아야만 출입이 가능했던 인고(忍苦)의 땅이었다.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위치한 파주시 탄현면 성동리의 군사적인 지형은 대다수 전방 지역과는 사뭇 다르다. 지난 1953년 7월23일 체결된 휴전협정으로 남녘에는 남방한계선이 그어졌다. 남방한계선은 군사분계선에서 남쪽으로 2km 떨어져 동서로 그어진 선(線) 이다. 연천이나 포천, 철원 등 다른 서부전선에는 민통선이 있고, 그 북쪽으로 남방한계선이 획정됐다. 남방한계선을 넘으면 비무장지대가 위치한 군사분계선이 있다. 그게 일반적인 구획이다.

그러나, 이곳은 남방한계선 구획이 특이하다. 임진강이 남과 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이라면 남방한계선은 다른 전방 지역처럼, 남쪽으로 2㎞ 떨어진 파주출판도시 정도에 있어야 마땅한데도, 자유로 옆에 설치된 철책선이 바로 남방한계선이다. 그리고 임진강이 군사분계선이자 비무장지대다. 이후 자유로가 개설되면서 (그나마 민통선이었던) 탄현면 성동리 일대 출입 제한까지 완전히 풀 렸다.

임진강·한강 만나 서해로 흐르는 땅…

오두산 통일전망대가 위치한 오두산은 조선 전기에는 오도성산(烏島城山)이라고 불렸으며, 구조산(鳩鳥山)이라는 별칭도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임진강과 한강이 흘러나와 산 앞에서 합쳐 지고, 리포와 함께 셋이 서로 어울려 바다로 흘러들어간다. 기세가 웅장해 옛날에 형승을 논하는 사람이 중국의 금릉(金陵)에 비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에 솟아 있어 높지는 않지만, 임진강과 한강, 그리고 한강의 최하류 부분인 조강(祖江)까지 조망할 수 있다.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 조만식 선생 동상

이곳에선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북녘 땅을 마주보고 있다. 통일 전망대에서는 날씨가 좋은 날이면 맨 눈으로도 주택들과 함께 김일성 사적탑, 탈곡장, 소학교 등의 시설물과 경작지 등을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북녘 땅의 주소는 북한 황해북도 개풍군 림한리(대한민국 이북 5도 행정구역상 경기도 개풍군 임한면 정 곶리) 선전마을이다. 맑은 날이면 멀리 개성시 북부의 송악산도 보인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700m 가량까지 좁아지는 곳도 있다.
오두산 남쪽은 움푹 패인 분지다. 이곳에는 거대한 한옥 구조물이 들어서 있다. 고려통일대전이다. 고려시대 인물들의 위패를 모신 사당과 그 인물들과 연관된 문화재를 전시하는 전시관이다.
그 아래에 있는 경기장들은 축구 국가 대표팀 훈련시설인 파주 NFC이다.

놀랍게도 북녘 땅이 지척인데도 제법 규모가 큰 예술마을과 출판도시까지 들어섰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과 파주 출판도시가 그것이다. 최근 이 일대가 ‘통일동산 관광특구’로 지정됐다. 넓이는 탄현면 성동리 일원과 법흥리 등 300만㎡이다. 파주시는 지난 2015년 타당성 용역을 시작으로, 지난 2017년 경기도 특구지정 신청, 문화 체육관광부 협의와 조정 등을 거쳐 지난 4월 30일 지정됐다.
이 일대는 기존에 오두산 통일전망대, 헤이리예술마을, 파주 출판도시 등 여러 관광 콘텐츠들이 있고 연간 20만 명이 넘는 외국인 관광객이 찾는다. 최근 4·27 판문점 선언 이후 한강 하구 물길이 열리기 시작하면서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관광정책이 진행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만 가능한 관광콘텐츠인 ‘안보관광’의 메카다.


파주 오두산성 터

광해군 때 한양 천도설 유력했던 곳…

조선도 한때 도읍지를 바꾸려고 했다. 임진왜란을 겪고 나서였다. 광해군이 집권하던 시기였다. 당시 한양은 이미 왕기(王氣)가 다해 옮겨야 한다는 의견들이 비등했다. 새 도읍지로 집중 거론된 곳이 파주 교하지역이었다. 오늘날 오두산이 위치한 임진강 유역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서울을 교하로 옮겨야 한다는 주장은 중대한 의논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개혁세력이 1612년 상소를 올리 면서 본격화됐다. 이들은 상소문을 통해 “한양과 개성의 중간 지점 으로 동으로는 멀리 삼각의 영산이 병풍같이 보이고, 북으로는 송악산이 웅장하게 섰으며, 남으로는 옥야천리(沃野千里)가 기름지게 펼쳐져 있어 오곡이 풍성하고, 서로는 한강이 넓게 흘러 배가 다니기에 좋은 땅”이라고 주창했다. 반발도 만만찮았다. 이항복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세력은 “도읍을 바꾸는 것은 난리와 수해를 피하 고 백성을 위하고 중국과 통교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신빙성이 막연한 말을 따라 이리저리 옮겨 다닌다면 솥이 깨지고 살림살이가 망가져 곤궁함만 더해 갈 뿐”이라고 주창했다. 결국 천도 문제는 광해군이 축출되면서 무산됐다.

400여 년의 긴 세월이 지난 뒤 이곳에는 새 도읍지 대신 단아한 예술마을이 들어섰다. 오금리 쪽으로 플라타너스들이 빼곡하게 들어선 도로를 따라 들어선 헤이리 예술마을이 그곳이다. 헤이리는 파주시 탄현면의 전래 농요인 ‘헤이리 소리’ 가운데 별다른 뜻이 없는 후렴에서 연유됐다. 애초 파주출판도시와 연계한 책마을을 구상하는 과정에서 다양한 문화예술인들이 참여하면서 예술마을로 개념이 확장됐다. 지난 1998년 창립총회를 기점으로 미술가, 조각가, 음악가, 작가, 건축가, 공예가 등 380여 명이 회원으로 참여해 집과 화랑을 세우고, 길과 다리를 놓아 예술마을을 만들었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

본격적인 운영은 지난 2001년부터다. 초창기 헤이리 예술마을 내 눈에 띄는 구경거리는 별다른 게 없었다. 이후 단아하고 다양한 건축물들이 갈수록 늘어나면서 유명세를 타게 됐고, 한적한 마을에 서 주말마다 사람들이 붐비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 지난 2009년 12월 문화지구로 지정되면서 전시 관련 업종과 문화시설에 대해 파주시로부터 지원받고 있다. 헤이리 예술마을이 문화지구로 지정된 건 지난 2002년 인사동 문화의 거리와 지난 2004년 대학로에 이어 대한민국에서 3번째이다.

주민들은 헤이리 예술마을이 문화지구로 지정된 뒤 파주시의 지원을 받아 박물관, 미술관, 서점 등 권장시설에 대해 취득세, 재산세 등을 50% 감면받는다. 이곳에 권장 시설을 새로 짓거나 기존 건 물을 개·보수하면 건물주는 많게는 융자금 5천만 원의 이자 50% 를 지원받을 수 있다. 반면, 문화시설과 관련 없는 상업시설이나 유흥오락시설 등의 설치는 금지된다. 마을규칙에 따라 개인이 헤 이리에 땅을 사더라도 그중 절반가량은 공익을 위한 용도로 사용해야 한다.

이곳을 제대로 즐기려면 미리 어느 곳을 갈 지 계획을 짜놓아야 한다. 당일치기나 1박2일로 일정을 잡는 일정의 특성상 선택을 잘 하지 않으면 짧은 일정 속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릴 확률도 높다. 체험시설 수준이 천차만별인데다 주제도 가지각색이기 때문이다. 상업성 시설보다는 갤러리나 공방 탐방을 하고싶다면 발품을 팔아 정보를 찾아야 한다. 자전거를 대여 받아 타고 돌아다니는 것도 좋다. 주말과 공휴일에 매표소에서 패키지 티켓을 구매하면 전기버스를 무제한으로 탑승할 수 있다.

헤이리 예술마을 건축물들은 국내외 유명 건축가가 페인트를 쓰지 않고 지상 3층 높이 이상은 짓지 않는다는 기본원칙에 따라 주어진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려 설계됐다. 그래서 건물 하나하나가 개성이 있는 작품들이다. 만약 건물 감상을 좋아한다면 굳이 체험을 하지 않더라도 산책하면서 건물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내도 된다. 일부 건물들은 저마다 건축가가 지어준 건물 이름도 있다. 식물들도 다른 마을과는 차별화됐다. 이곳에서 자라는 식물들이 대부분 파주 자생 식물들이기 때문이다. 길은 자연이 만든 굴곡을 그대로 따라가기 위해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다. 길고양이들이 유난히 많은 점도 주의해야 한다. 헤이리 예술마을은 한 마디로 ‘잘 꾸며진 시골 마을’이다.

이희승 선생이 사랑한 흰꽃 등나무가 있는 파주 출판도시


파주출판도시 아시아 출판문화정보센터 이희승 선생 흰꽃 등나무

통일동산 관광특구에는 다른 전방 지역 같으면 남방한계선이 설치됐을 법한 곳에 특이한 공간이 펼쳐져 있다.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버금가는 문화 콘텐츠를 갖춘 곳이기도 하다. 한강 철책선을 따라 자유로 주변 늪지에 소답스럽게 조성된 파주 출판도시를 일컫는 표현이다. 안보관광이라는 콘셉트에서는 다소 거리감도 있겠지만, 나름대로 독창성을 갖고 자연스럽게 통일동산 관광특구와 화학적인 결합을 이루고 있다.

특히 파주출판도시 한복판에 위치한 아시아 출판문화정보센터 옆에는 고풍스런 한옥이 한 채 늠름한 자태로 이방인들을 맞는다. 그 옆에는 봄을 맞아 흰꽃 등나무가 활짝 피어있다. 그런데 이 녀석은 이곳 토박이는 아니다. 국어학자이자 시인인 고(故) 이희승 선생의 자택인 서울 종로구 혜화동에서 사학자 김기협 선생의 주선으로 이곳으로 시집을 왔다. 지난 1922년이었다.

파주 출판단지는 행정지명으로는 파주시 문발동이지만 공릉천만 건너면 탄현면 성동리와 지척이다. 출판사와 출판 관련 기업들로 이뤄진 곳으로, 공식 산업단지로도 인가받았다. 이곳에는 국내 의 어지간한 출판사와 출판인쇄소 등의 절반 이상이 모여 있다. 대한민국 출판문화의 메카다. 내로라하는 출판 관련 기업들의 물류창고들도 이곳에 있다.


파주출판도시 전경

원래 파주 출판단지가 들어선 곳은 한강의 지류가 흐르던 늪지대였다. 이런 곳에 지난 1997년부터 출판사들이 들어오면서 지난 2002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됐다. 출판도시 초입 왼쪽에 낮고 장중한 종합유통센터 건축물이 서있고, 더 들어가면 각 출판 관련 기업들의 사옥과 창고, 공장, 상가 건물 등이 야트막하게 이어진다.

단지를 구성하는 각 출판사들의 사옥은 독특하고 야심찬 디자인이 특색이다. 초창기부터 헤이리 예술마을처럼 예술적 가치가 있는 건축물에 한정해 허가를 내줬기 때문이다. 대부분 국내외 건축 디자이너들에게 의뢰해 지은 건축물들이다. 그만큼 건축미도 빼어나다. 마치 미국이나 독일의 어느 도시에 온 것 같다. 이런 점 때문에 건축학도들이 단체 견학을 오기도 하고 모던하거나 근미래적인 분위기를 내고 싶은 광고·화보의 촬영도 많이 이뤄진다. 상당수 아이돌 그룹의 모 뮤직비디오나 유명한 CF 광고가 이곳에서 촬영된 까닭이다. 평일에도 드라마 촬영이 종종 이뤄지곤 한다. 파주 출판도 시는 그래서 오늘도 계속 변하고 있으며, 진화하고 있다.


글 허행윤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과를 졸업하고 경기일보에서 사회부 기자를 거쳐 사회부장, 정치부장, 문화부장으로 근무했다. 경기일보에 근현대 경기도를 빛낸 인물들과 삼국시대 탐사, 동아시아 각국의 예술과 문화를 탐방하는 시리즈물을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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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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