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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남부 최대의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 - 화성 수영리 유적 -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경기 남부 최대의 청동기시대 마유적 >

- 화성 수영리 유적 -


- 경기학광장Vol.1 _ Column & stud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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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 농진청 등 종전부동산 유적(이하 화성 수영리 유적)은 경기도 화성시 수영리 3-6번지 일원에 해당한다. 조사지역은 봉담 인터체인지에서 나와 수영오거리 방향으로 가는 오른쪽에 보이는 얕은 구릉 전체에 해당한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까지 왕실의 소유지로 되어 있었고, 특히 이왕직(李王職)의 목장이 있었던 곳으로 유명하다. 현대에는 국립축산과학원의 목초지로 이용하고 있었다. 유적의 주변에는 얕은 구릉과 저평한 충적대지가 잘 발달해 있다. 구릉을 제외한 충적대지는 대부분 최근 개발에 의해 원지형을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유적이 위치한 구릉 지역은 국립축산 과학원의 시험목초지와 방목장으로 이용되었기 때문에 원지형을 비교적 양호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화성 수영리 유적은 「국가균형발전특별법」에 따라 농촌진흥청이 지방으로 이전하면서 수도권에 보유하고 있었던 청사 등의 건축물과 그 부지에 대한 개발이 진행되면서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화성 수영리 유적이 위치한 지역에는 한국농어촌공사에서 약 11,660여 세대가 신규 입주하는 효행도시개발구역으로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약 29,000여 명이 입주할 예정으로 2020년 착공을 위하여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유적은 북쪽의 칠보산(238.5m), 서쪽의 태행산(294.8m), 남쪽의 태봉산(223.8m)으로 둘러쌓여 있고, 동쪽으로는 황구지천이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흘러가고 있으며, 시화호의 발원이 되는 하천이 잘 발달해 있다. 주변 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인 1917년 고지도를 통해 볼 때 수영리 유적은 칠보산에서 남서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에 해당된다. 유적은 얕은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으로 수계가 풍부하게 발달되어 있는 천혜의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조사 전부터 대규모 마을 유적이 존재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화성 수영리 유적 조사단 (겨레문화유산연구원, 한강문화재연구원 조사단)

화성 수영리 유적의 주변으로도 많은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보고된 바 있다. 우선 북쪽의 화성 천천리 유적에서 구석기시대 유적이 조사되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화성 천천리 유적, 봉담 수영리 아파트 건설부지 유적, 화성 동화2지구 유적 등이 확인되었다. 대부분이 집자리로 구성된 마을 유적이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원삼국∼한성백제 병행기에 해당하는 유적이다. 대표적으로 고금산 전체는 원삼국시대 대규모 마을 유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고금산의 서쪽에 해당하는 기안리에서는 원삼국∼삼국시대 제철유적이 확인되었다. 특히 기안리 유적은 중부지역에서는 처음으로 발견된 제련관련 유적으로 더 유명하다.
화성 수영리 유적은 2015년 경기문화재연구원의 지표조사 과정에서 구체적인 유적의 징후를 발견하게 되었다. 2016년에는 표본조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경기문화재연구원에서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 결과 조사 구역이 광범위하고, 청동기시대∼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유구가 확인됨에 따라 단일 기관이 조사를 수행하기 어렵다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이에 2018년 다수의 연구원이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공동조사와 관련된 입찰을 진행하였다(정밀발굴조사 면적 284,924㎡). 이 과정에서 겨레문화유산연구원(143,380㎡)을 주무기관으로 한 컨소시엄이 조사를 수행하게 되었으며, 한강문화재연구원(85,821㎡), 한성문화재연구원(55,723㎡) 등 3개 기관이 공동으로 2018년 6월 4일(허가 제2018-0622호)부터 발굴조사를 실시하게 되었는데 현재도 계속해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9년 5월까지 확인된 조사 결과는 다음과 같다.

<표 1> 화성 수영리 유적 조사 결과(2019년 5월 15일 기준)


<그림 1> 화성 수영리 유적 조사 현황

먼저 수영리 유적에서 가장 많이 확인된 것은 청동기시대 집자리이다. 총 198동의 청동기시대 집자리가 발견되었다. 현재 조사의 진행 상황이 30% 전후인 점을 감안할 때, 향후 집자리의 수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기대된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저평한 구릉 정상부 평탄면에 만들어졌다. 조사지역에서 제외되어 있으나 구릉 하단의 낮은 충적대지에는 농경과 관련된 유구들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기는 다르지만 인접해 있는 화성 송산동 유적에서 원삼국시대 논유구가 확인된 점에서 이 시기 농경과 관련된 시설들은 현재 논으로 이용되고 있는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전기 전반, 전기 후반, 중기 전반, 중기 후반, 원형점토대토기단계 등 모두 5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들은 구릉의 사면을 따라 등고선과 평행하게 장축을 설정하여 놓았다. 그러나 저평한 구릉 정상부를 따라서는 등고선과 직교하게 대형의 집자리를 만든 점이 특징이다. 집자리의 형태는 가로 방향으로 매우 길게 만든 세장방형 집자리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리고 소수의 원형 소형 집자리가 확인되었다. 세장방형 집자리는 역삼동식으로 분류되는 것이고, 원형의 소형 집자리는 송국리식으로 분류된다. 모두 처음 발견된 유적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청동기시대 집자리들은 공통적으로 구릉 및 충적대지상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역삼동식 집자리는 전국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송국리식 집자리는 서남부지역에서만 발견된다. 송국리식 집자리의 특징은 중앙에 타원형 수혈 및 2개의 주혈이 마치 돼지코와 같은 형태로 발견되는 점이다.

<그림 2> 화성 수영리 유적 청동기시대 집자리 각종

두 형태의 집자리는 약간의 시차를 보이는데 역삼동식이 청동 기시대 전기 후반에 등장하여 중기까지 지속되고, 송국리식은 청동기시대 중기에 등장하여 후기까지 이어진다. 따라서 역삼동식의 집자리가 약간 먼저 나타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경기 남부의 경우 역삼동식과 송국리식 집자리가 점이지대를 이루는 지역으로서 출토 유물에서도 두 유형 문화권의 유물이 서로 혼합되어 발견되는 사례가 많다. 이를 호혜적(互惠的)인 관계 속에서 서로의 물질자료를 공유하였던 결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한편, 역삼동식 집자리의 하한이 늦은 시기까지 지속되는 점을 감안할 때 두 형태의 집자리는 시기적으로 선후관계에 있다기 보다는 함께 공존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세장방형 집자리는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확인되는 집자리 형식이다. 이러한 세장방형 집자리의 특징은 집자리 내부를 확장시켜 다세대 주택처럼 살도록 시설한 점이다. 따라서 불땐자리도 집자리의 중앙을 따라 여러 개가 발견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수영리 유적에서도 집자리의 중앙을 따라 다수의 불땐자리가 확인된다. 수영리 유적에서 가장 큰 청동기시대 집자리는 한강-43호 집자리로 장축 길이 25.8m, 단축 길이 3.7m로서 총 면적은 95.46㎡에 달한다. 대체로 청동기시대인들은 1인당 3∼3.5㎡의 면적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집자리 한 동에는 많은 사람이 함께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청동기시대 집자리의 출토 유물은 구순각목공렬토기, 공렬토기, 외반구연호, 원형점토대토기, 반월형석도, 석부, 석촉, 석검 등이 있다.


<그림 3> 화성 수영리 유적 출토유물(위 : 청동기시대[겨레]), 아래 : 원삼국시대[한성])

다음으로 원삼국시대 집자리는 한성문화재연구원 조사지역에서 주로 발견되었다. 원삼국시대 집자리의 평면형태는 원형, 방형, 장방형으로서 북한강 및 남한강, 영동지역에서 확인되는 여·철자형 집자리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원형 및 방형 집자리는 마한의 대표적인 집자리로 알려져 있다. 여·철자형 집자리가 주로 하천과 인접한 충적대지상에서 발견되는 점과 달리 원형 및 방형 집자리는 구릉에서 발견되는 사례가 많다. 집자리들은 최초 굴착 후 높이 약 10㎝ 가량을 점토로 다짐하여 보강한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불땐자리는 노, 부뚜막 등을 사용하고 있다. 출토유물은 단경호, 타날문토기편들과 방추차 등이 있다. 기타 통일 신라∼조선시대에 해당하는 다수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특히 인접한 태안3지구 유적에서는 다수의 대규모 건물지 등이 확인되고 있는 점에서 근대까지 조사지역 주변이 이 지역의 중심지로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화성 수영리 유적은 경기 남부에서 발견된 최대 규모의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다. 경기 서해안 지역에서 발견된 인천 검단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과 더불어 경기도를 대표하는 청동기시대 마을 유적이다. 특히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초기철기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집자리가 발견됨으로써 중부지역의 청동기시대 문화상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되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또한 역삼동식 집자리와 송국리식 집자리의 점이지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발견된 청동기시대 유적으로서 양 문화 요소의 특징과 상호 교류 양상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그림 4> 청동기시대 집자리 복원도


글 박경신

숭실대학교 대학원에서 고고학을 전공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학예과장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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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1 _ 2019 여름창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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