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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정씨 문헌공파 600년 세거지 평택 은산리

경기학광장Vol.2 _ Village & History

< 봉화정씨 문헌공파 600년 세거지 평택 은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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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학광장은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가 발간하는 계간지입니다. 경기도와 31개 시군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있는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이용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넓은 공간이고자 합니다. 전문학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경기도의 역사와 문화에 관심을 가진 누구라도 즐길 수 있도록 문을 활짝 열어두겠습니다. 경기학광장의 더 많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경기도사이버도서관에서 원문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봉화정씨 600년 세거지

봉화정씨 문헌공파 600년 세거지 평택 은산리

은산리는 진위면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고, 진위면은 평택 지방의 옛 중심지이다. 은산리는 기동, 방촌, 미동, 상리 같은 자연 마을로 이루어졌다. 마을은 약 20호에서 40호에 못미친다. 이곳은 1914년 이후 평택시, 용인시, 안성시 세 지역의 경계다. 경계지점은 은산리 방촌과 원곡면 산하리 평동 마을 사이를 흐르는 작은 실개천이다. 그러다보니 행정구역은 달라도 생활이나 문화는 함께 공유한다. 행정구역이 경계를 넘어 생활과 문화를 공유하게 된 것은 1914년 이전만 해도 이 지역이 양성군 승량원면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진위군 마산면에 속한 월경리, 산내리와 양성군 승량원면의 방촌, 기동, 신촌, 상리, 은정동 그리고 양성군 면하촌의 중리, 하중리, 상촌을 합하여 은산리라고 지명을 붙이고 진위군에 속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문화권이었던 평동과 신촌은 안성군 원곡면 산하리로 남겼고, 진목리는 용인군 남사면에 가져다 붙였다.

봉화정씨의 6백년 세거지 산대(山垈)

은산리와 원곡면 산하리 일대의 다른 지명은 ‘산대(山垈)’다. 산대는 은산리의 기동, 방촌, 미동, 상리, 원곡면 산하리의 평동, 새말, 모양말, 진목의 통미 등 모두 8개의 자연마을을 일컫는 지명이다. 이곳은 봉화정씨 문헌공파(奉化鄭氏 文憲公派)의 동족마을이다.

2000년 이후 산대(山垈) 곳곳에 공장이 세워지고 이주 노동자들의 주거가 늘어나고 있지만 기동과 방촌, 평동, 새말, 모양말은 아직도 동족마을을 유지하고 있고, 미동과 상리, 통미는 한 두집 살거 나 이거하고 없다. 그래서 옛날에는 봉화정씨를 ‘산대 정씨(山垈鄭氏)’라고도 불렀다. 산대(山垈) 봉화정씨의 입향조는 삼봉 정도전 (三峰 鄭道傳, 1342-1398) 의 장손인 용인공 정래(鄭來)다. 정래는 한때 용인현감을 지냈는데 그 인연으로 이곳에 마을을 일구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태종 16년 6월 10일 정도전 자손의 금고(禁錮)를 해제하였고, 6월 26일에는 큰아들 정진(鄭津, 1361-1427)에게 직첩(職牒)을 돌려주고, 7월 25일에는 손자 정래와 정속(鄭束)에게도 직첩을 돌려주었다. 그 뒤로 정진은 판한성부사, 공조판서,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세종 9년 3월에 죽었다. 봉화정씨가 은산리로 낙향한 뒤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면서 처음 터를 잡았던 협소한 기동(基洞)마을 ‘텃골’을 벗어나 방촌, 평동, 신촌, 통미 등으로 세력을 확장하였고, 지방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여 양성고을에서 확실한 반가(班家)의 입지를 굳혔다.
봉화정씨가 입향한 6백 년 전 은산리 일대의 지형은 서남쪽으로 산과 계곡이 발달하고 동쪽과 북쪽은 바닷물이 들어오는 황무지였다. 초기 정씨 집안의 경제적 기반은 동막골과 사냥골의 계곡이었 다. 이곳은 텃골과 가깝고 계곡물이 흘러드는 고라실이어서 최적의 논농사, 밭농사지역으로 꼽혔다. 그러다가 조선 후기쯤 밭농사보다 논농사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낮은 지대의 개간이 시작되었고 마을도 벌판 쪽으로 확대되었다.

삼봉 정도전 제단

삼봉기념관과 삼봉집 목판본

이 과정에서 분동(分洞)된 마을이 방촌과 말미라고도 부르는 상리(上里)다. 삼봉 정도전의 사당인 ‘문헌사(文憲祠)’는 방촌마을 에 있다. 이곳에 종가도 있고 최근에는 기념관과 삼봉의 큰아들 정진(鄭津)을 모시는 희절사(僖節祠)라는 사당도 건립되었다. 삼봉집 목판본은 1791년(정조 15) 왕명에 의해 대구에서 간행 되어 오대산, 정족산, 태백산 사고 및 홍문관에 수장되어 있었는데, 그 중 태백산사고 소장본 원판을 1912년 옮겨와 문헌사에서 보관하고 있다. 14권 7책의 목판 258매 중 236매가 보관되어 있다. 최근에는 사당 아래재실인 민본재(民本齎)를 지었고, 이 당호를 도올 김용옥 선생이 썼다. 2004년 문화방송에서 삼봉 정도전의 정치와 사상에 대하여 강의를 한 인연으로 직접 쓰게 되었다고 한다. 기동과 방촌 사이 나지막한 봉우리에는 제단도 있다.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죽음을 당하면서 시신을 수습할 수 없어 애태우던 후손들이 정성들여 만든 묘이다. 현재 음력 10월 3일에 제를 올리고 있다. 이 날은 전국에 흩어진 후손들이 모두 모이는데 최근 들어 더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삼봉집 목판본


삼봉기념관

젊은 시절의 정도전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고려 말 신진사대부이며 조선 개국의 1등공신이다. 본관은 봉화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는 삼봉(三峰)이고 아버지는 고려 말 형부상서를 지낸 정운경(鄭云敬, 1305-1366)이다. 그의 집안은 5대조 정공미(鄭公美) 이후 대대로 봉화지역에서 향리직을 세습하였다. 그러다가 부친 정운경 때 처음으로 중앙 관직에 진출하였으며 벼슬이 형부상서까지 올랐다.
어머니는 우연(禹延)의 딸로서 노비의 피가 섞여 있었다. 어려서 경상북도 영주에서 살다가, 아버지를 따라 개경에 와서 아버지의 친구인 이곡(李穀)의 아들 색(穡)의 문하에서 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이존오(李存吾)·김구용(金九容)·김제안(金齊顔)·박의중(朴宜中)·윤소종(尹紹宗) 등과 함께 유학을 배웠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成均試), 1362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충주사록·전교주부·통례문지후 등을 지냈다.
1366년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이어 죽자, 영주에 내려가 3년간 여묘(廬墓)하면서 지방 자제들과 동생들을 가르쳤다. 1370년 성균관 이중영(重營)되고 이색이 대사성이 되자, 성균박사가 되었다. 이 듬해 태상박사가 되고, 이어 예의정랑이 되었다. 1374년 공민왕이 암살당하자 이 사실을 명나라에 고할 것을 주장하여 이인임(李仁任)의 미움을 받았다.
1375년(우왕 1) 성균사예·지제교가 되었으나, 이인임·경복흥(慶復興) 등이 친원정책(親元政策)으로 돌아가려 하고 원나라 사신이 명나라를 치기 위한 합동작전을 위해 오자, 이를 반대하고 관련되는 업무를 거부하다가 전라도 나주목 회진현 거평부곡(居平部曲)으로 귀양을 갔다.

이성계를 만나다

정도전은 유배자의 불우한 삶을 통해서 고려 말의 정치 사회적 모순을 인식하고 혁명의지를 키웠다. 그가 42세 되던 1383년 함경도의 함주막사로 동북면 도지휘사였던 이성계(李成桂, 1335- 1408)를 찾아간 것도 꿈을 이루기 위한 절실한 선택이었다. 그의 선택은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후 정치적으로 복권되어 1384년(고려 우왕 10) 정몽주와 서장관의 신분으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388년에는 이성계의 추천으로 대사성에 오르고, 같은 해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위화도 회군은 소수파였던 이성계와 정도전 세력이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는 결정 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권을 장악한 후 정도전은 조준(趙浚, 1346- 1405)과 함께 전제개혁(1391)을 주장하여 실현시켰다. 전제개혁은 개혁의 걸림돌인 권문세족의 경제권을 박탈하는 조치임과 동시 에 신진사대부에게 경제적 주도권을 갖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와 함께 군제개혁도 실시되었고 권문세족의 부정부패를 일소하는 조치도 내려졌다.
구세력이 제거되고 이성계와 신진사대부가 정권과 군권, 경제권을 장악하면서 정도전도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였다. 1389년 (고려 공양왕 1)에는 밀직부사로 승진하였고, 창왕을 폐하고 공양 왕을 옹립하는데 앞장섰다는 공로로 봉화현충의군(奉化縣忠義 君)에 책록되었다. 이후 동판도평의사사사 겸 성균대사성(同判都評議使司事兼成均大司成) 등 요직을 두루 거쳤으며, 신진사대부 내의 정치적 갈등으로 정몽주 등 반대파를 제거한 뒤에는 조준 등과 함께 이성계를 추대하여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 건국후 정도전은 분의좌명개국공신(奮義佐命開國功臣) 1등에 녹훈되었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事)에 임명되어 정권(政權)과 병권(兵權)을 장악하였다. 또한 한양천도를 주도하였으며, 수도건설사업을 추진하였고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을 저술하여 통치규범과 제도정비에도 큰 공을 세웠다. 제도정비와 아울러 정도전의 큰 업적 가운데 하나는 조선 초의 국방력 강화와 요동수복운동이다. 요동수복은 일찍이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좌절되었지만 정도전은 이를 일생의 큰 아쉬움으로 여기고 건국 후 은밀히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는 국방력 강화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잔도와 같은 병법서를 저술하여 요동공격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이 같은 움직임은 명나라를 자극하여 외교적 분쟁으로 이어졌다. 명은 정도적의 압송을 요구하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결국 제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죽음을 당한 후 정도전의 요동정벌 계획은 태종에 의해 명의 승인을 받는 정치적 도구로 역이용당했다. 그의 죽음이 두고두고 아쉬운 대목이다.


문헌사와 희절사


문헌사의 유종공종

조선건국의 일등공신이지만

정도전의 정치이념은 이상적인 유교국가 실현, 다시 말해서 재상 중심의 신권정치(臣權政治)와 민본정치(民本政治)로 압축된다. 그러나 이 같은 정치적 이상은 왕권정치를 지향하는 이방원 등 왕 자들과 갈등을 빚었고, 조준 하륜 변계량 등 구신세력(舊臣勢力)을 기반으로 일으킨 제1차 왕자의 난(1398) 때 참수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정도전이 참수당할 때 아들 영(泳)과 유(游) 그리고 조카 담(澹)도 살해당했으나 큰아들 진(津)만은 태조를 따라 안변의 석왕사(釋王寺)에 갔다가 살아남았다. 그 뒤로 진은 세종 때 형조판서에 올랐고, 그의 손자 문형(文炯, 1427-1501)은 벼슬이 우의정 에 이르렀다.
정도전은 조선왕조 건국과 국가체제 정비에 가장 공이 컸으면서도 19세기 대원군에 의해 복권되기까지 권력의 암투에서 왕자와 종친을 모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살아야 했다. 그의 훈작은 죽은 뒤 467년이 지난 1865년(고종 2)에 복원되었다. 또한 1870년에는 ‘문헌’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유종공종(儒宗功宗)’이라고 쓰인 편액이 하사되었다. 1872년(고종 9)에는 죽산 부사 이헌경(李憲 璟)의 노력으로 양성현 산하리에 ‘문헌사’가 건립되었다. 문헌사는 1912년에 은산리 기동마을로 이전하였다가 1930년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겼다.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본래 위치보다 북동쪽으로 20 여보 옮겨서 건축한 것이다. 묘는 기동마을에 있으나 가묘이다.
묘 앞에는 제단비를 세워 표식을 하였는데, 앞면에 ‘조선개국원훈 봉화백 문헌공 정선생 제단’이라고 쓰여 있다.
저술로는 문집인 『삼봉집』을 비롯하여 『경제육전』 『경제문감』 『심기리편』 『불씨잡변』 『진도』 그리고 정총과 함께 저술한 『고려사』 등이 있다. 『삼봉집』은 1397년 정도전이 살아있을 때 2권으로 간행되었고, 죽은 뒤 1465년(세조 11) 증손에 의해 6책으로 다시 간행되었다가, 1486년(성종 17) 8책으로 증보 강행되었다. 그러나 앞서 간행된 것들은 현재 전하지 않고 사료관에 보관중인 것은 1791년(정조 15) 왕명에 의해 14권 7책으로 편차를 다시 분류해 간행된 것이다. 이때 간행된 문집은 태백산, 정족산, 오대산, 홍문관 사고 등에 보관되었는데, 문헌사의 목판은 태백산 사고의 것으로 1913년 대구에서 이곳으로 옮겨왔다. 목판은 총 258매였는데 보관상의 어려움으로 14매는 유실되어 현재는 244매가 전하며 이중 8매는 경기도박물관에 옮겨 보관 중이다.

글 이진복

성균관대학교 중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중국고대사로 석사 박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성대를 비롯하여 한양대, 카이스트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96년 열린사회연구소를 창립하여 현재까지 닫힌사회가 아닌 열린사회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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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정보

  • 경기학광장 Vol.2 _ 2019 가을호

    발행처/ 경기문화재단 경기학센터

    발행인/ 강헌

    기획/ 이지훈, 김성태

    발행일/ 2019.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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